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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윤동주 <위로>, 기형도 <나리 나리 개나리>

봄의 이면에 가려진 상처와 죽음

지난 주말 나들이는 확실히 불운했다. 오랜만에 인왕산 둘레길을 걸으며 활짝 핀 봄꽃들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설렘과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왕산에 불이 난 것이다. 오랜 가뭄이 이어진 탓이었으리라. 불시에 일어난 산불로 산은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소방차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봄을 에워싸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한 꽃들의 모습과는 달리 한결같았다. 당황스럽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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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작업이 시작되는 것을 확인하고 인왕산 초입에서 발길을 돌렸다. 햇살을 받아 환해진 부암동 길을 걸었다. 자하문 고개를 넘다가 윤동주문학관에 이르렀을 때가 점심시간 무렵.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게 꾸며져 있는 기념관을 나오니 오후의 봄빛이 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의 삶의 이력을 생각하면 봄빛에 에워싸인 기념관이 더욱 안타깝게 보였다. 너무 일찍 세상을 뜬 시인의 삶을 햇살이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봄, 그 너머의 진실 

봄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들에게 봄은 그 너머의 진실이 보이는 계절일 수도 있다.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나는 대자연에도 소실되고 어긋나는 생명이 있다. 죽음이라는 숙명적 유한성을 갖고 태어나는 인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활기찬 생명의 이면에는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존재들도 있기 마련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어본다. 제목처럼 누군가에게는 진심으로 건네지는 ‘위로’가 되길 바란다.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퍼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꼬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라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_ 윤동주, <위로(慰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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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하는 위로 

담백하게 읽으면 되는 시이지만 잠깐의 설명을 덧붙여본다. 화자는 관찰자의 입장으로 시에 등장한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을 한 ‘젊은 사나이’는 어떤 병인지는 모르지만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시의 대부분은 사나이가 병원 ‘옥외’에서 다른 대상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서술한다. 꽃밭을 찾아들던 나비는 실수로 그물에 걸린다. 끝없는 실을 뽑아 만든 거미의 그물에 걸린 나비의 심정은 어쩌면 때를 놓치고 병에 걸린 젊은 사나이와 같을 수도 있다. ‘긴 한숨을 쉬’는 사나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한 나비를 보는 심정이 드러난다. 거미는 끊임없이 실을 뽑아 나비를 고립시키지만 사나이와 나비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벌릴 수는 없다. 사나이의 시선과 심정적 반응인 ‘한숨’을 통해 나비와 인물의 유대감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자신의 정서를 대신하는 대상물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는 ‘옥외 요양(屋外療養)을 받는 젊은 사나이’의 객관적 상관물이 ‘거미의 실에 온몸이 감겨버린 나비’이다. 여기에 한 명의 시선이 추가된다. 시의 표면에 직접 드러나지 않은 화자이다. ‘거미란 놈의 흉한 심보’가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극한 상황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젊은 사나이’에게 화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라는 것밖에’는 없다.  

시의 제목은 위로이다.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행위가 위로이다. 요란하지 않고, 시끌벅적하지 않지만 화자가 건네는 그 한마디의 말은 젊은 사나이에게 분명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위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뭉클해지는 이유는, 어찌 보면 사소해 보이는 그 한마디를 들은 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촉각적 사고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_ 기형도, <나리 나리 개나리> 

1989년도에 기형도 시인(1960~1989)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29살 청년 시인의 죽음이라는 안타까움이 전부는 아니었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의 견고한 예민함과 슬픔을 느끼는 시인의 남다른 감각은 탁월한 것이었다.
시집의 해설을 쓰고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난 평론가 김현의 말을 빌리면 기형도 시인의 시에 나타난 세계관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전형이었다. 기괴하거나 기이한 모습을 의미하는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단어로 시인의 시 세계를 설명한 평론가 김현 역시 문학평론을 문학의 하위 갈래에서 문학과 대등한 반열로 올려놓은 뛰어난 평론가였다. 한 시집에 이름을 올린 두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은 유고시집의 비장함이 더욱 증폭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기형도 시인의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촉각적 이미지를 슬픔과 절망적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효능감 있게 활용한다는 점이다. 시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누이를 추억하는 이 시에서도 그의 촉각에 대한 탁월한 감각은 돋보인다.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 ‘찬물로 눈을 헹구며’ 등의 이미지는 시상의 구체화에 많은 기여를 한다.
시상을 구체화하는 요소로 활용하는 인간의 오감각,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일정한 거리감을 통해 표현된다. 그중 촉각은 대상과 화자가 가장 가까이 있을 때 발현되는 감각이다. 피부의 접촉을 통해 대상의 특징을 인지하는 촉각은 막연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는 감각을 통해 누이의 죽음을 확인하고 환기하는 시인의 촉각적 사고는 어찌 보면 본능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이 시에는 죽은 누이를 직접 만져볼 수 없다는 절망이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촉각에 의해서 역설적인 거리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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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꺾어버리는, 깊이도 모를 절망 

불행한 사고를 당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간 누이의 삶을 회상하는 이 시는 흔히 말하는 봄의 생동감과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있다.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라는 구절은 이 시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를 관통한다.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라는 절망적 인식은 봄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겨울과 봄, 불모성과 생명성이라는 이원적인 구분을 넘어 시적 상상력이 가닿는 곳은 죽음을 몰고 온 봄이다. 그렇게 죽은 누이의 기억은 화자에게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적 인식을 안겨 준다.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를 걷는 화자의 모습에서 봄은 비정하며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는 봄의 속성에 화자는 ‘찬물로 눈을 헹구’는 행위를 통해 누이가 부재하는 현실을 직시한다.  

봄이 누이를 앗아간 것은 아니지만 화자에게 봄은 누이를 잃은 상황과 등가적으로 다가온다. 그 봄이 피워낸 꽃을 화자는 ‘꺾는다’는 행위를 통해 절망에 대응한다. 그런데 ‘유령처럼’이라니…. 스스로를 죽은 사람의 혼령에 빗대는 시적 행위는 ‘꽃을 꺾는’ 행위보다도 더 가학적이다. 시인에게 이 시는 어쩌면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동시에 죽은 누이에 대한 ‘씻김굿’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이 깊이도 모를 절망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읽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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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