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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박인수의 <봄비>

아웃사이더가 남긴 불멸의 히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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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국내 최초의 록밴드 ‘애드 포(Ad 4)’를 이끌고 일반무대에 첫 선을 보인 신중현의 등장은 그 자체로 국내 대중음악사에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미8군 무대의 슈퍼스타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 약관의 기타리스트는 데뷔앨범에서부터 가요계의 관행을 거스르는 파격적인 실험으로 눈길을 끌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멤버들이 직접 연주와 노래를 소화하는 록밴드 형태의 구성이었다.

지금이야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지만 세션과 가수의 역할이 엄격히 분리돼 있던 당시만 해도 기타, 베이스, 드럼 등의 세션과 보컬이 한 팀을 이뤄 자체적으로 공연 레퍼토리를 소화한다는 건 영미권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8군 무대를 제외하면 트로트와 신민요가 양분하고 있던 척박한 음악적 토양, 하물며 영국 출신의 록밴드 비틀즈가 막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으니 애드 포의 등장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8군 무대의 공연 수익이 연간 수출총액을 상회하고 있던 극동의 불모지에서 자생적으로 록밴드라는 전위적 형태의 음악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보아도 무척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시대를 앞서나간 밴드 음악의 출현은 분명 신중현이라는 천재 뮤지션의 존재를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 기현상이었다.


너무도 운명적이었던 천재들의 만남

신중현의 야심은 데뷔 후 2년 만에 발표된 첫 앨범의 레퍼토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신중현은 애드 포의 데뷔앨범을 ‘커피 한 잔’과 ‘빗속의 여인’ 같은 자작곡들로 채웠는데 이 역시 트로트나 신민요 외에 창작곡이라는 개념이 없던 당시로써는 무척 생소하고 도발적인 시도였다.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리지만 애석하게도 신중현의 가창력은 객관적으로 볼 때 당대의 보컬들에 비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신중현은 밴드 결성 후에도 실력 있는 보컬을 확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애드 포의 데뷔 앨범에 실린 곡의 노래 역시 초대 보컬이었던 서정길에 의해 주로 녹음되었고 객원보컬인 신인가수 장미화와 신중현이 몇 곡의 노래를 나눠 부르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이 생소한 밴드 음악에 대한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신중현이란 천재 뮤지션의 등장은 영미권 팝음악처럼 새롭고 전위적인 사운드를 갈망하던 젊은 음악팬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데뷔 앨범에 대한 미온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중반에 접어든 신중현에게는 아직 세상에 꺼내 보이지 않은 음악적 야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미8군 데뷔 후 뒤늦게 익힌 정통 음악이론을 바탕으로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 등 음악 전 분야에 걸친 뮤지션으로써의 갈증이었다. 애드 포 해체 후 조커스(Jokers), 덩키스(Donkeys) 등의 그룹 활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는 바로 그런 음악적 갈증에 대한 그 나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밴드 마스터이자 기타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던 신중현의 활동반경은 차츰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뻗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신중현이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분야가 바로 신인가수들을 발굴해 조련시킨 뒤 톱스타로 길러내는 프로듀싱 쪽이었다. 1968년 발표한 ‘님아’로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펄 시스터즈를 필두로 무명에 불과하던 김추자, 장미화, 이정화, 김정미, 임희숙 등이 신중현의 손을 거쳐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거듭 태어났다. 이때부터 그의 곁에는 자연스럽게 ‘신중현 사단’이라 불리는 젊은 음악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로듀서로서의 입지가 탄탄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신중현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새로운 고민에 직면해 있었다. 자신이 발굴한 신인가수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발판으로 솔로가수로 독립해나가는 일이 반복되면서 실력 있는 보컬을 구하는 일은 그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그룹 덩키스로 활동하고 있던 1969년에도 그는 ‘신중현 사단’의 여가수로는 예외적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한 채 월남위문단에 합류해 팀을 떠난 이정화를 대신할 새로운 보컬을 찾고 있었다. 그때 그의 뇌리에 떠오른 인물이 바로 몇 년 전 이태원에서 만났던 박인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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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를 처음 본 건 1967년 무렵이었어요. 미8군들이 이용하는 이태원의 어느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습 중에 누가 찾아와 자기한테 테스트 기회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소울(soul) 음악을 한다고 대답하는데 말투에서부터 왠지 자신감이 느껴졌어요. 무대 위에 올라가 템테이션의 <My Girl>과 오티스 레딩의 <Dock of the boy>를 부르는데 영어발음도 좋고 무대매너도 인상적이라 오래 기억에 남았죠.”

흑인병사들도 감탄한 소울 음악의 천재

그 인연으로 얼마 뒤 신중현 사단 최초의 남자보컬로 합류하게 되는 박인수는 전쟁고아 출신의 젊은 가수였다. 신중현이 회고하듯 그는 당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유창한 영어발음과 흑인들의 아픔을 담아낸 소울 창법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1947년생인 박인수가 하필 흑인 소울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 이유는 범상치 않은 그의 성장기 때문이었다.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헤어져 기지촌을 전전하던 박인수는 열두 살 되던 해 미8군 봉사단체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입양돼 갔던 한인 입양아였다. 하지만 막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던 박인수의 미국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김치를 먹는다는 등의 이유로 핀잔을 주는 양부모와의 불화가 심해지면서 그는 할렘가를 전전하며 흑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친구들과 함께 듣던 음악뿐이었다. 양부모의 방치 속에 마음 붙일 곳 없이 떠돌기만 하던 그의 마음속에 샘 쿡, 레이 찰스 등의 흑인 음악은 한 줄기 빛이며 위로였다.

1962년 무작정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박인수는 학업을 중단하고 미8군에서 활동하던 ‘코끼리 브라더스’의 객원보컬로 합류하며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흑인 특유의 슬랭이 섞인 영어발음과 무대를 휘어잡는 무대매너로 소울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한 그는 곧 흑인병사들 사이에서 ‘흑인보다 더 진한 흑인 영혼의 소유자’로 불리며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여세를 몰아 그는 일반무대와 미8군을 넘나들며 키보이스(Key boys), 샤우터스(Shouters), 데블스(Devils), 바보즈(Babos) 등 수많은 밴드들의 객원보컬로 주가를 높여갔다.

그런 박인수에게도 신중현과의 만남은 획기적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새로운 보컬로 박인수가 영입되면서 밴드 이름을 ‘퀘션스(Questions)’로 바꾼 신중현은 한해 전 이정화가 불렀던 <봄비>라는 노래를 다시 꺼내 들었다. 호소력 짙은 소울로 재탄생한 이 노래는 신중현이 듣기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색다른 매력이 충만했다.

1970년 박인수의 목소리로 다시 세상에 나온 <봄비>는 예상대로 가히 신드롬이라 부를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시민회관에서 열린 덩키스의 리사이틀에서 객석에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객석은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곡의 후렴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절규하는 박인수의 <봄비>는 그만이 재현할 수 있는 새로운 경지였고, 소울을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영혼의 울림이었다. “이정화는 봄비고 박인수는 소낙비”라는 찬사가 쏟아진 데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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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길 없네 한없이 내리는 내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신중현의 안목은 정확했다. 박인수는 곧 젊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울고 웃는 여성관객들의 비명소리로 리사이틀 무대는 후끈 달아올랐고, 노래를 마친 뒤 무대를 내려가는 그의 곁에는 언제나 수백 명의 여대생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심지어 열성적인 여성팬에게 납치되어 며칠 만에 나타난 일도 있었을 만큼 박인수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신중현 역시 박인수라는 걸출한 보컬을 찾아내면서 오래 동안 짓눌러오던 고민을 털어내고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문제는 박인수가 갑작스런 성공에 도취되어 끝내는 스스로 절제하지 못할 만큼 급격히 망가져 버린 것이었다. 인기를 얻은 뒤 박인수는 툭하면 공연을 펑크 내고 어딘가로 잠적했다가 며칠 후 태연한 얼굴로 나타나 멤버들의 애를 태웠다. 여자들과의 스캔들이 계속되면서 그룹의 리더인 신중현과도 갈등이 깊어졌다. 데뷔음반 하나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퀘션스가 전성기를 구가할 틈도 없이 흐지부지 해체되어버린 데는 밴드 활동에 소홀해진 박인수의 무책임한 처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잦은 공연펑크와 기행으로 얼룩진 영광

신중현과 결별한 후 박인수는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점점 더 가요계의 외톨이로 변해갔다. 툭하면 불거지는 여성들과의 염문,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는 공연 펑크에 그를 원하는 무대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첫 부인과의 이혼으로 방황하던 그에게 1975년 연예계를 휩쓴 대마초 파동은 피할 수 없는 결정타였다. 활동금지라는 족쇄를 차고 무대를 박탈당한 그에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보였다.

태생적으로 그는 한 곳에 안주할 수 없는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십대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사랑 앞에서 그는 너무나 어이없이 허물어지곤 했다. 80년대 들어 해금이 된 후에도 여대생과의 스캔들로 두 번째 부인에게마저 이혼 당한 박인수는 인간관계마저 점점 고립돼 갔다. 뒤늦게 김기표, 김준, 신촌블루스 등과의 작업을 통해 재기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끝내 박인수에게 과거와 같은 영광은 허락되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 잦은 잠적과 공연 펑크로 오점을 남겼던 그는 80년대 후반 생계를 위해 지방극장가의 쇼무대를 전전하면서 서서히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급기야 1994년 오랜만에 잡힌 방송 스케줄을 앞두고 저혈당으로 쓰러지면서 영욕이 뒤엉킨 그의 무대인생은 쓸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가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허망한 은퇴 이후 박인수는 오랜 기간 무료요양원을 전전하며 병마에 시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저혈당 쇼크의 후유증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는 췌장암까지 발병하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다행히도 37년 만에 다시 만난 첫 아내와 재결합해 다시 가정을 이뤘지만 그의 몸과 영혼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망가져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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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가 남긴 불멸의 히트곡 <봄비>는 이후 인순이, 나미, 한영애, 이은미, 장사익 등 내로라하는 후배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된 희대의 명곡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선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외로운 방랑자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봄비’를 듣고서야 비로소 새봄이 돌아왔음을 실감하곤 한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짧은 한 순간 음악적 재능을 탕진해버린 뒤 스스로 전설이 되어버린 박인수의 절규처럼 지금도 이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글.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