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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시네마] 아이티 거리의 아이들

불모의 저 땅에 다시 희망이 자랄 수 있기를!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인 아이티는 신대륙 발견 이후 일찌감치 유럽인들이 이주해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전했던 곳이다. 한때는 전 세계 설탕과 커피의 최대 생산지였던 이곳은 1804년 최초의 흑인공화국으로 독립한 후 프랑스와 서구 열강의 보이지 않는 간섭과 견제로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기아와 가난에 시달려 왔다. 201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티 거리의 아이들>에서 보듯 아이티는 지금도 ‘희망’을 말하기 힘든 불모의 땅으로 남아 있다.

지형 대부분이 산악지대인 아이티(Haiti)는 천제 인구가 천만 명에 불과한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입니다. 그리고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기도 하죠. 설상가상 지난 2010년 1월 12일, 아이티를 강습한 진도 7.0 규모의 강진은 23만 명의 사망자와 230만여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키며 나라 경제를 궤멸적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한순간에 집과 가족을 잃고 거리로 뛰쳐나온 국민들의 비명과 절규가 가득 찼지만 이들을 보듬어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환자를 치료해야 할 병원 건물의 절반이 무너져 내렸고, 정부기관 건물도 60%가 넘게 파괴돼 기본적인 국가행정마저 마비돼 버린 탓이었죠. 피해복구나 위급 환자 치료는 고사하고 당장 국민들의 안전이나 식량조달조차 기대하기 힘든 상황, 피해 가옥의 규모가 25만 채, 망가진 기반시설의 경제적 손실이 9조 원이 되는 현실 앞에서 재건이란 구호는 한낱 희망고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폐허로 변해버린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이후 시작된 국제 사회의 지원이 황폐화된 아이티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은 금방 드러났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와 비교해 아이티의 상황은 무엇 하나 크게 나아진 게 없습니다.

오히려 그사이 부패한 관료들과 기득권 세력이 국민에게 전달돼야 할 국제 사회의 지원을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지금도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계속되는 굶주림과 질병을 피해 외국으로 탈출하거나 폐허 속에 방치된 채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현실은 기아와 질병에서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재난 뒤 아이티는 사실상의 ‘NGO(비정부기구) 공화국’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정부를 대신해 그나마 국제 사회생존에서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최소한의 생존을 돌봐주고 있는 건 비정부 구호기구들뿐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 이듬해 큰 홍수 피해를 입은 뒤에는 치안유지를 위해 들어온 국제 평화유지군에 의해 감염병까지 퍼져 ‘콜레라 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으니 아이티에서 희망을 말하는 건 아직 이릅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의 중남미 식민지 중 가장 많은 부를 생산하던 아이티는 이렇듯 현재 어떤 희망도 말할 수 없는 가난과 절망의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이 다시 긴급 구호가 필요 없을 만큼이라도 삶의 질을 회복할 수 있을지 현재로썬 섣불리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인구의 40%가 문맹자인 낮은 교육 수준, 도시지역 주민의 35%, 농촌지역 주민의 52%가 제대로 된 상수도 시설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는 지금도 1인당 국민 소득이 세계 174위로 지구촌 최고의 극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삶은 말 그대로 동물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국민 1인당 하루 평균 수입이 2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다 보니 많은 국민들이 굶주림에 고통 받고 있고, 물에 갠 진흙에 소금과 버터를 섞어 햇볕에 말린 ‘진흙쿠키’로 끼니를 연명하는 게 아이티의 현주소입니다. 조사차 현지를 방문했던 미국의 한 의사는 도무지 회생가능성이 없는 그곳의 현실을 ‘급성이자 만성인 재앙’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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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티 거리의 아이들> 포스터

희망을 잃고 떠도는 거리의 작은 아이들

이렇게 하루하루 벼랑 끝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티 사람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지진 피해로 인해 더욱 피폐해진 아이티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원래 이 나라의 민낯을 볼 수 있어 더 흥미로운 이 다큐멘터리는 재미교포 영화감독 강영만이 연출을 담당했죠. 제작비를 지원한 비영리단체 ‘아이티 키즈 나우’의 대표 역시 재미교포 이옥희 씨란 점 때문에 2013년 서울시민영화제에 초청돼 국내 관객에게도 선을 보인 바 있습니다.

제작비 부족 등 여러 사정이 겹쳐 지진발생 후인 2013년에야 개봉됐지만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티 거리의 아이들(Innocence Abandoned: Street Kids of Haiti)>이 담고 있는 시공간적 배경은 지진 피해가 나기 10여 년 전인 2001년의 아이티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문법대로 영화는 미리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아이티 공화국의 수도 포르토프랭스(Port au Prince)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카메라에 담게 된 열두 살의 고아 소년 윌너(Wilner)는 열악한 환경에 방치돼 있는 수십 만 명의 거리 어린이 중 한 명입니다. 영화 속에서 윌너는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 노예로 팔려가 일만 하다가 거리로 도망쳐 나왔다는 사연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털어놓죠.

거리의 삶에 내몰린 윌너 같은 부랑아들에게 안전한 곳이 있을 리 없습니다. 촬영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길옆에서 자고 있던 윌너가 부주의한 운전사의 실수로 트럭 바퀴에 다리를 밟혀 울부짖어도 이 연약한 소년을 도와주러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도와줄 마음이 없다기보다 길거리 부랑아 소년의 고통에 신경 써 줄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티 사람들의 무거운 표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짓누릅니다.

영화의 감동이 더해지는 건 첫 촬영 이후 9년이 흐른 2009년, 감독이 다시 아이티를 방문해 윌너 일행을 찾아갔을 때입니다. 어느덧 윌너는 21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 있습니다. 여기서 관객들은 예상치 못했던 감동과 마주하게 됩니다. 길거리 부랑아로 힘겹게 살아가던 윌너가 스스로 고아원을 설립해 거리의 어린이들을 보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윌너의 친구였던 지미(Jimmy) 또한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나 포르토프랭스의 한 빈민가에 고아원을 열고 거리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이 키우는 작은 희망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영화 같은 결말’을 마주한 감독은 영화의 개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물론 이 영화는 2001년 프로젝트로 아이티를 방문했을 때 수도 포트토프랭스를 방문했을 때 거리에서 만났던 고아 소년 월너의 성장기를 담은 실화이다. 그로부터 9년 후 아이티를 재방문했을 때 놀랍게도 월너는 21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변해 두 친구와 함께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말로 이 자신이 느낀 감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윌너와 친구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암시하며 끝을 맺습니다. 국내에서 정식 개봉을 하지 않은 탓에 영화를 본 국내 관람객은 많지 않지만 유튜브 등에서 공유되는 짧은 동영상 클립만으로도 이 영화가 전해주는 진한 감동을 느끼기엔 모자람이 없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이티 사람들이 처해 있는 기구한 운명을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연민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불행은 대체 누구의 탓이며, 어떤 식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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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 캡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아이티가 안고 있는 온갖 재앙과 고통의 근원은 단순히 10년 전에 일어난 대지진에서 비롯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혹한 말이지만 하루하루 목을 옥죄는 가혹한 현실은 모든 아이티인의 등덜미에 낙인처럼 찍혀버린 ‘고통의 연대보증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스페인(1492~1697), 프랑스(1697~1803)의 식민지 시절을 경험한 아이티는 1804년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으로 독립할 당시부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구조적 문제를 안고 출발한 나라였습니다.

콜럼버스가 다녀간 뒤 4년 후부터 섬에 이주해온 유럽인들에 의해 ‘생도맹그(Saint Domingue)’로 불리던 이곳은 독립 당시 3만 6천여 명의 유럽인과 50만 명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정착해 대규모 사탕수수, 설탕, 커피 농장을 일구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수많은 흑인 노예들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할 때였죠. 그들은 단지 초기 유럽 이주민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99%가 전멸한 현지 원주민들을 대체하기 위한 노동력일 뿐이었으니까요. 그 모든 권력과 결실을 독차지했던 백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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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독립운동을 이끈 투생 루베르튀르(1743-1803)

전체 국민의 80%가 절대빈곤층인 아이티의 현실

착취와 차별에 신음하던 흑인노예들이 식민지 모국인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해방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건 1791년 무렵입니다. 이때 아이티 흑인노예들의 구심점이 되어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게 해방 노예였던 ‘투생 루베르튀르’라는 인물입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독학으로 글을 깨우친 뒤 프랑스 계몽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아 흑인노예들이 주축이 되는 독립공화국을 꿈꾸기 시작했다고 하죠.

흑인들의 생존과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 프랑스로 끌려간 그는 결국 차디찬 알프스 감옥에서 숨을 거두지만 이때부터 모든 아이티 흑인들의 가슴속엔 독립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게 됩니다.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잡혀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지금도 많은 아이티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맹그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를 내릴 것이다.”

살아남은 동료들의 항쟁 덕분에 마침내 아이티는 생도맹그 동편의 도미니카공화국과 국경을 맞댄 섬 서쪽 지역에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 직전까지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이 발달한 아이티가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던지라 프랑스는 한때 국가 재정의 25%를 충당하던 중요한 식민지를 잃었고, 자국 소유였던 북아메리카 루이지애나주를 미국에 매각해야 할 만큼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죠. 이에 독립을 조건으로 프랑스가 요구한 거액의 배상금 지불을 수락하고 말았던 게 아이티의 운명을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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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산에 빼곡히 들어선 주택들 @gettyimage

프랑스는 루이지애나주 매각 대금 7,500만 프랑의 2배나 되는 1억5천만 프랑을 ‘배상금’으로 요구했고 1825년 함대를 이끌고 온 프랑스의 무력시위에 굴복한 아이티 정부는 그 불합리한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아이티는 1947년 미국의 개입으로 지불을 중단할 때까지 130년 가까이 매년 국가 예산의 80%나 되는 돈을 프랑스에 독립 배상으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지옥 같은 아이티의 현실을 그들 탓으로만 돌리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보편적인 인간 해방을 내세운 프랑스 혁명이 정작 식민지 아이티의 비극을 촉발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아이티 사람들이 처해 있는 이 지옥 같은 현실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36년의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독립 이후 지금껏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들에게 “왜 우리처럼 스스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가?”하고 비난하는 것 역시 온당한 처신은 아닐 겁니다. 영화는 마치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건 결국 스스로의 각성과 의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랬듯, 아이티가 그래야 하듯, 인간 보편의 권리와 자유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이티의 커피 산업 –

아이티는 프랑스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기반으로 당대 최고의 설탕, 커피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18세기 중반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 커피의 60%가 생도맹그 산이었다. 이 때문에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메리카에서 경영하던 단일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곳으로 불렸으며, 최전성기에는 식민지 모국 프랑스의 전체 수입 중 25%를 책임질 정도로 관련 산업이 크게 번창했다.

이 무렵 아이티는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동인도제도의 레위니옹 섬과 함께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량을 자랑했지만 1804년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할 때 오히려 이것이 족쇄로 작용했다. 흑인 정권은 독립 승인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는데, 배상금 책정의 기준이 된 것이 프랑스가 포기해야 할 아이티에서의 커피 수익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백인 농장주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아이티의 국민들은 독립 이후, 노동력을 착취하던 커피나무를 갈아엎고 식량 재배지로 바꾸는 일이 빈번해 국적 커피산업은 금방 쇠퇴했다.

19세기 들어 카리브 해 각지로 커피 재배지가 넓어지면서 커피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아이티 커피의 비중은 더욱 낮아져 지금은 거의 명목상의 커피생산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잇고 있다. 아이티 커피는 카리브 제도에서 생산되는 블루마운틴의 원조 격으로, 원두의 외형이 블루마운틴과 흡사한 것이 특징이며 제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커피시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