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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외로움에 병든 한 천재의 죽음

여성 싱어송라이터, 장덕

1977년 5월 28일, 문화방송 주최로 열린 제1회 서울가요제는 당시로는 보기 드문 국제규모의 음악 행사였다. 국경 없는 음악을 통한 국제교류와 친선 강화를 목적으로 마련된 이 행사가 특히 큰 관심을 모은 이유는 각각 자국에서 인기정상을 달리던 홍콩의 마이클 라이, 일본의 사가와라 요이치, 대만의 류이스 추이 등 3개국 초청가수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 대회는 출전곡 역시 ‘유러피언 송 페스티벌’처럼 새롭게 선보이는 창작곡들로 구성돼 기대감을 높였다.

대회 시작 전부터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탓에 가요제 출전권을 놓고 벌어진 국내 가수들의 경쟁도 매우 치열했다. 주최 측은 결국 두 번의 예선을 거쳐 출전 가수를 선발했는데 1차 예선을 통과한 20명의 가수들이 대회 하루 전날 다시 2차 예선을 벌인 끝에 윤향기, 하수영, 혜은이, 방은미, 이성애 등 10명의 가수가 본선 진출자로 최종 확정됐다. 
그런데 서울 퍼시픽호텔에서의 성대한 전야제에 이어 이튿날 오후 7시, 서울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이 대회 본선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인물에 의해 꽤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될 만한 진풍경이 연출됐다.

열여섯 살 때 서울가요제서 ‘충격적’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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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였는지 그해 서울가요제에는 특이하게도 출전 가수와 작곡가가 함께 무대를 올라 공연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로써는 거의 신인가수나 다름없던 여가수 진미령의 차례가 되자 출전곡인 ‘소녀와 가로등’의 작곡가 자격으로 무대에 올라온 건 한 눈에 보아도 앳된 얼굴의 10대 소녀였다. 

길옥윤, 정풍송, 안건마, 정민섭 등 가요계를 주름잡고 있던 쟁쟁한 성인 작곡가들 사이에서 이 자그마한 열여섯 살 소녀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랬으니 납작한 빵모자를 눌러쓴 귀여운 10대 소녀가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진귀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후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긴 그녀의 발자취를 생각해보면 이 무대는 우리 대중음악사에도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공연을 마친 이 안양예고 1학년 여학생은 결국 그해 서울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작곡가 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며 화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그 후에도 소녀는 서울가요제에 3년 연속으로 출전해 출품곡 모두를 입상시키는 진기록을 세우며 서서히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귀여운 보조개와 동그란 눈, 트레이드마크가 된 깜찍한 단발머리 차림의 소녀는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가요계의 스타로 군림하게 되는 싱어송라이터 장덕(1962∼1990)이었다. 당시 대중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싱어송라이터였던 여고생 장덕은 서울가요제를 계기로 당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열광하는 스타로 급부상했다. 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소녀와 가로등’을 만든 건 그녀가 서울사대부중 3학년에 다닐 때였다. 중학교 때 이미 자작곡으로 다섯 살 터울의 오빠 장현과 듀엣으로 데뷔음반을 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는 한 마디로 하늘이 낸 천재였다.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그녀의 활동은 가요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커다란 눈망울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청순한 이미지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하이틴 영화의 여주인공으로도 적역이었다. 이 무렵 그녀는 <내마음 나도 몰라(1977)>, <선생님 안녕(1977)>, <우리들의 고교시대(1978)> 등 10여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며 배우로도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런 한편 그녀는 박경희, 최병걸 등 당대의 인기가수들이 부른 히트송의 작곡가이자 듀엣 또는 솔로가수로 인기를 이어갔다. 

어린 소녀를 병들게 한 외로움, 그 절망의 끝

하지만 그녀의 삶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그리 유복하거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1962년생인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던 아버지와 서양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혼 후 동양철학에 심취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 도봉산 아래 작은 사찰에 머물던 어린 장덕은 남의 집 가정교사로 일하던 오빠가 귀가할 때까지 텅 빈 방안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외로움을 달랬다. 첼로, 피아노, 그림, 글짓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장덕은 이 때문인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어설프지만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우했던 가정사 때문인지 그녀가 만든 곡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둡고 쓸쓸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의 출세작인 ‘소녀와 가로등’만 해도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의 감수성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절절히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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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창가에 소녀 혼자서 외로이 서 있었지요
밤하늘 바라보았죠 별 하나 없는 하늘을
그리곤 울어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에 가로등불은 내 맘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밖에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 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사춘기가 되면서 장덕의 성격은 더욱 침울해졌다. 급기야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출을 하는가 하면, 수면제를 먹고 음독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충격을 받은 장덕의 어머니는 딸이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걸 떠올리고는 오빠와 함께 ‘드래곤 랫츠’라는 듀엣을 결성해 미8군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오빠와 함께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 일반무대로까지 진출해 본격적인 대중연예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덕의 삶은 모두가 선망하는 스타가 된 후에도 꽤 많은 부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뒤편에서 남몰래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재혼을 계기로 또 한 번 자살소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하이틴 스타의 자살소동은 팬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했던 그녀는 결국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79년 말, 국내 활동을 모두 접고 미국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도망치듯 태평양을 건너고 말았다.

80년대 중후반, 가수·프로듀서로 전성기 

미국에 도착한 후 델몬트 칼리지를 거쳐 테네시 주립대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장덕은 그 후 약 2년 동안 국내 가요계에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한인 기독교방송에서 1년 간 MC로 활동한 것이 그 당시 그녀의 유일한 공식 활동이었다.

내쉬빌 작곡가 모임인 BMI에 가입해 활동할 만큼 공부에 열중했던 그녀는 그 덕분에 음악적으로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미국 본토의 음악을 수혈 받은 후 그녀의 노래는 소녀적 감수성에서 벗어나 정서적으로나 사운드 구성에서 훨씬 더 풍부해졌다. 또한 장덕은 유학 초창기부터 자신을 살뜰히 돌봐주던 한 재미교포와 결혼해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는가 싶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리 패밀리’라는 가족그룹을 결성해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 시절의 장덕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독한 향수병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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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발표한 솔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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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장현과 함께 듀엣 ‘현이와 덕이’을 결성해 발표한 앨범
 

결국 한국생활을 잊지 못해 힘들어하던 그녀는 2년여의 짧은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83년 10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써의 재기를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어린 여가수의 자살소동에 찍힌 주홍글씨는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장덕은 서라벌레코드와 3년 간 1,000만원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전속계약을 맺고 ‘날 찾지 말아요’, ‘수렁에서 건진 내 딸’ 등의 노래를 발표할 수 있었다.

가수활동의 공백기를 극복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장덕 역시 음반에 대한 미적지근한 반응을 통해 몇 년 사이에 완전히 잊혀 버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한남동에 있는 자취방에서 틀어박혀 외로움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동생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게 된 오빠 장현이 울산에서 찾아와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듀엣 재결성을 기념하기 85년 내놓은 음반 수록곡 중에서 ‘너 나 좋아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장덕은 기적적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1년 후 솔로가수로 독립해 ‘님 떠난 후’를 연속 히트시키는 등 다시 한 번 자신의 음악적 저력을 과시했다. 이은하가 불러 큰 인기를 모은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역시 장덕이 만든 곡이었다.

그 후 장덕은 이선희, 정수라와 함께 여성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며 80년대 중후반까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이런 인기를 발판으로 장덕은 87년 9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3회 ABU가요제(아시아태평양방송연합)에 한국대표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가수활동 뿐 아니라 이선희,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등의 가수들에게 곡을 주거나 음반 프로듀서로 참여한 명실상부한 ‘히트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의 뒷바라지를 위해 오빠 장현 역시 가수생활을 청산하고 매니지먼트사를 설립했다. 바야흐로 이제 남매에게 또 한 번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운명은 이번에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오빠 장현에게 내려진 설암 판정 이후 장덕은 실의에 빠져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석에 누운 오빠를 대신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녀는 급기야 다시 우울증 증세까지 도져 외부 활동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1990년 2월 4일 약물과다복용으로 자택에서 스물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치러진 그녀의 장례식에는 평소 그녀와 음악적 교분을 나누었던 50여 명의 선후배 가수들이 참석해 눈물바다를 이뤘다.

천재들의 요절은 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십여 년 전 서울가요제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또랑또랑한 눈망울의 열여섯 살 소녀는 그렇게 자신의 재능을 다 펼쳐놓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