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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시네마] 커피처럼 달콤쌉싸름한 그의 거짓말

영화 <테일러 오브 파나마>의 무대, 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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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는 대부분의 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식민지로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아메리카 신대륙이 발견된 지 10년째 되던 1501년, 황금을 찾던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의 에스파냐(스페인) 원정대에 의해 식민지로 편입된 이곳은 1513년 발보아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의 최단 지협을 횡단하면서부터 신대륙 교통의 요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신대륙 개척 초기부터 파나마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이곳이 가진 특수한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아메리카 대륙의 한가운데인 북위 9° 부근에 S자 모양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파나마는 남쪽은 태평양과 맞닿아 있고 북쪽은 카리브해로 이어진다. 길고 좁다란 파나마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각각 넓디넓은 태평양과 대서양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미국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는 최단거리가 4,800km인 것에 비하면 60km 내외에 불과한 파나마 지협은 길어야 일주일이면 아메리카 대륙의 동과 서를 오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횡단코스였다.

 

 

두 개의 대양을 잇는 파나마운하의 역사

선박을 통해 대서양 건너 식민지에서 막대한 재화를 실어 날라야 하는 유럽 열강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륙 최남단 마젤란 해협을 돌지 않고 태평양 연안의 대륙 서쪽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새로운 항로가 더욱 절실해졌다. 이때 열강들이 눈독을 들인 곳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의 최단 지협(地峽)인 파나마였다. 만약 이곳에 운하를 파 물길을 이을 수 있다면 대서양에서 태평양 연안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최단 항로가 열리는 셈이다.

1881년, 마침내 유럽 열강들의 주도로 대양과 대양 사이를 잇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파나마운하 건설의 책임자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였다. 프랑스 외교관 출신의 레셉스는 1869년 아시아와 유럽을 배로 직접 오갈 수 있게 한 수에즈운하 건설을 진두지휘했던 장본인으로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에서 대서양 연안의 크리스토발까지 전장 64km에 이르는 구간에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7년 만에 운하를 완공하겠다던 레셉스의 장담과는 달리 공사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레셉스가 간과했던 가장 큰 문제는 이곳의 지질 조건이었다. 모래땅이었던 수에즈운하에 비해 파나마 공사현장에는 암반이 많아 좀처럼 굴착 작업에 속도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레셉스는 수평식 굴착계획에서 갑문식 운하로 계획을 변경해가며 공사를 독려했지만 인부들 사이에 황열,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까지 번져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레셉스는 공사 시작 9년 만에 자금 부족으로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사업권을 인수한 프랑스계 회사 역시 공사를 계속하는 대신 1903년 운하굴착권과 기계 ·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미국 정부에 넘기고 손을 떼었다.

당시 파나마운하 건설에 가장 애가 달아 있던 것은 미국이었다. 국토 면적이 넓은 미국은 동서 내륙의 원활한 물류 이동을 위해 경제성 있는 해운 항로가 꼭 필요한 시점이었다. 미국 동부의 뉴욕 항을 출발한 화물선이 서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도리 없이 대륙 최남단을 돌아 장장 25,000km를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하루 빨리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두 항구 사이의 항해 거리는 불과 9,500km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미국의 조바심과는 달리 1812년 에스파냐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출범한 콜롬비아연방은 운하 건설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콜롬비아 정부는 자국 영토인 파나마에 운하를 건설하는 것도 모자라 치외법권(治外法權)까지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미국 정부는 결국 운하조약의 비준을 둘러싸고 중앙 정부와 갈등을 빚던 파나마 주(州)를 부추겨 독립에 나서도록 지원했고, 이 결과 1903년 파나마는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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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단사의 거짓말이 만들어낸 반전의 매력

1904년부터 재개된 공사에는 미국 본토에서 파견된 공병대와 유럽에서 1만2천명, 서인도제도에서 3만1천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고, 완공까지 무려 3억8천7백만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었다. 2년 동안 철저한 방역대책을 세운 후 재개된 공사는 그 후 8년 동안 증기삽(steam shovel), 준설선(浚渫船) 등 새로운 토목공학이 모두 동원된 끝에 1914년 8월 15일 마침내 역사적인 완공을 보게 되었다.

파나마와 미국은 곧 운하 운영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미국의 파나마운하 소유 및 운영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파나마 국민들도 거세게 반발했다. 1964년 1월 파나마에서 운하지대의 주권회복과 미국 자본의 축출을 요구하는 유혈 사태가 일어나 23명이 숨졌으며 잠시나마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운하의 통행수입이 줄어든 데다 외국자본마저 잇따라 철수함으로써 파나마는 실업률 증가, 농업생산성 후퇴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는가 하면 1968년 10월에는 군부 쿠데타까지 일어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 정부로 운하관리권이 완전 이양된 후에도 이곳은 지금도 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난 2001년 개봉된 존 부어만 감독의 <테일러 오브 파나마(The Tailor Of Panama)>는 파나마운하가 본국으로 반환된 후 벌어지는 일련의 소동을 그린 걸출한 첩보영화다. 영화 속에서 영국은 냉정하고 매력적이지만 여자 문제로 종종 말썽을 일으키는 스파이 앤디 오스너드(피어스 브로스넌)를 파나마 현지로 파견한다. 사실상 스파이로서의 효용 가치를 의심받고 좌천된 오스너드의 목표는 이제 파나마에서 마지막 크게 한 건 올려 은퇴 후의 새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 정보원을 물색하던 그의 눈에 거물급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양복점의 재단사 해리 펜덜(제프리 러쉬)이 눈에 들어온다. 펜덜은 재단사로 성공해 아름다운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사실 그에게는 숨기고 싶은 어두운 과거가 있다. 젊은 시절 영국에서 형을 살해하고 파나마로 도망쳐 온 펜덜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스너드의 정보원으로 일하게 된다.

운하 운영을 불안해하는 영국 정부는 오스너스에게 운하에 관한 고급 정보를 빼내올 것을 종용하고, 이런 압박은 고스란히 펜덜에게도 전해진다. 아내 모르게 빚에 쪼들리고 있던 펜덜은 결국 오스너스에게 파나마 정부가 운하 운영권을 외국에 넘기려 한다는 것과 반정부 세력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제공해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그런데 오스너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받은 영국과 미국은 전투기를 급파해 파나마로 진격해 온다.

사실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는 자신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시작된 거짓말이 기어이 미국의 개입까지 불러오게 되자 사태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펜덜의 임기웅변, 즉 또 다른 거짓말을 지켜보는 것에 있다. 자신이 창조해낸 가공의 인물 베니를 빌어 펜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또 다른 거짓말로 오스너스와 관객들을 조롱한다.

베니의 입을 빌어 재단사 펜덜은 파나마의 뒤틀린 근현대사를 비웃고, 자국의 이해를 위해서라면 무력까지도 서슴없이 동원하는 강대국의 오만함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외세와 결탁된 파나마 정치가들와 타락한 상류층,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영국대사관과 정보부, 무력을 동원해 세계 질서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편하려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일개 재단사의 거짓말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릴 때마나 지켜보던 관객들도 어느새 은밀한 쾌감을 느끼며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정통 첩보물은 아니지만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개봉 당시 “완성도는 뛰어나지 않아도 109분의 런닝타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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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부터 유명세 떨치는 파나마커피

영화에도 그려진 것처럼 현재 파나마 재정 수입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운하통행료와 바나나 수출이다. 그 중에서도 파나마운하 통행료는 국가 재정수입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바나나 역시 전체 농업수출품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 비해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파나마에서는 커피 역시 전 세계로 수출되는 효자 작물중의 하나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파나마는 19세기 초 퇴역한 영국 선장에 의해 처음으로 커피나무가 들어왔지만, 대량생산으로 승부하는 브라질과 베트남 등에 비해 경쟁력을 갖출 수 없어 일찌감치 스페셜티 커피를 연구하고 재배하기 시작했다. 생육환경도 적당한 편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부는 산들바람과 미네랄이 풍부한 화산토양, 그리고 바루 화산의 그늘은 커피의 향미를 충분히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됐다. 이 때문에 파나마 커피는 꽃향과 과일향이 나는 상큼한 맛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며 달콤하고 산뜻한 신맛이 나는 덕분에 입맛 까다로운 커피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다. 주요 커피 생산지는 보큐대(Boquete), 삐에드라 칸델라(Piedra Candela), 볼칸 바루(Volcan Baru) 등이며 매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수확되어 습식가공법으로 처리된다.

파나마커피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생산량이 너무 적어 일명 ‘신의 커피’라 불리는 게이샤(Geisha) 커피이다. 2004년부터 파나마에서 열린 한 커피경진대회에서 미국의 한 유명 커피전문가는 “커피잔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고 다른 심사위원 역시 “이 커피를 맛본 경험이 너무나 강렬해 커피잔으로부터 빛이 쏟아지는 것 같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생산 농가의 이름을 따 ‘하시엔다 라 에스멜랄다 스페셜’이라고 불리는 파나마 게이샤 커피는 그곳 농장 안 계곡에서 자라던 나무 일부에서 소량으로 수확한 것이었다. 이 품종은 원래 에티오피아 서남쪽 마지(Maji) 지역에 위치한 게이샤 숲에서 자라던 나무를 코스타리카를 거쳐 파나마에 이식한 것으로 일본의 게이샤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에로틱한 어감과 뛰어난 맛 덕분에 커피 미식가들 사이에 곧 널리 알려졌다.

2004년 처음 세계 커피시장에 등장한 게이샤 커피는 그해 파운드당 21달러에 팔리다가 해마다 수요가 급증하며 지난 2010년 경우 170달러에 팔리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국내 유명 호텔에서도 현재 이 게이샤 커피 한 잔의 값은 3만 원을 넘는 것이 보통이다. 게이샤 커피 외에도 아라비카의 베이스가 되는 티피카(Typica), 브라질 버번 종의 변종인 카투라 등이 유명하다.

파나마의 스페셜티 커피는 화산지역인 바루산 주변의 작은 커피농장에서 주로 생산된다. 대부분의 커피나무는 주변에 바나나처럼 키가 크고 잎이 넓은 작물과 함께 심어 길러 그늘을 만들어주는데 이렇게 하면 커피 체리의 생육을 지연시켜 향미가 깊고 단단한 생두를 생산할 수 있다. 파나마 커피의 품질이 입증되면서 국내 수입량도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9년 47,193 달러이던 파나마 커피 수입액은 지난해 373,031달러로 5년 만에 8배 가까이 상승했으며 올해도 지난 6월 현재까지 141,532 달러를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1%나 증가했다.

 

글.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