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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in가요] 유신이 만든 ‘70년대 금지곡’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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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시작됐던 금지곡의 역사는 해방 후에도 정권을 바꿔가며 이어졌다. 특히 1970년 초 유신정국을 통해 종신집권의 야욕을 드러낸 박정희는 사회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대중가요에 대해 가혹한 탄압과 제재를 시작했다. 부끄러움을 몰랐던 유신 정권기 금지곡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1972년 대선 후보로 나선 대통령 박정희의 가장 큰 공약은 차기 임기를 끝으로 더 이상 대선에 나와 표를 부탁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약속대로 그는 국민에게 표를 부탁할 기회를 스스로 원천 봉쇄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약 또한 공약(空約)으로 만들었다.

그해 말,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는 불과 1년 만에 기습적으로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통령 1인에게 민주주의의 근간인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까지 제한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까지 주어지면서 더는 이 나라에 선거가 필요 없어진 것이었다.

독재 권력은 그렇게 법의 이름을 빌어 민주주의로 위장했다. 절대다수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유신헌법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법이었다. 특히 대통령에게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이 부여한 것은 진정한 자유민주 국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1980년 10월 폐지될 때까지 총 9차례나 발동된 긴급조치는 그 무렵 막 꽃을 피워가던 한국 대중음악계도 서슬 퍼런 규제의 칼을 들이댔다. 이른바 가요계에 ‘금지곡’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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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화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정권욕

1975년 6월 5일, 문화공보부에 의해 ‘공연활동 정화대책’이 발표된다. 금지곡 지정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그로부터 보름 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를 거쳐 1차로 43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뒤이어 추가 심사를 통해 그해 말까지 모두 222곡이 금지곡으로 묶여 음반제작, 방송 및 공연, 청취가 전면 금지된다.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던 한 일간지는 이에 대해 ‘전체 심의대상 23,567곡 중에서 1%에 불과한 것이니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애써 의미를 축소했지만 명백히 국민들의 귀와 입을 틀어막으려는 정권의 폭거가 분명했다.

‘사회정화’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것은 국민의 의식과 행동을 통제하겠다는 거짓 위정자들의 욕망뿐이었다. 어떤 근거로 금지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창법 미숙, 퇴폐풍조 조장, 불신풍조 조장 등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누구 하나 그 결정을 거스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정권에 의해 ‘금지곡’이란 딱지가 붙은 노래들은 일사불란하게 방송과 유통시장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70년대 금지곡 목록을 살펴보면 그 면면만으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패티 김의 <무정한 배>를 비롯해 신중현의 <미인>,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기러기 아빠>, 배호의 <영시의 이별>,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 등이 모두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사실상 방송이나 공연무대에서 유행하던 인기곡 대부분이 금지곡으로 묶인 것이다. 왜색풍, 창법 저속, 불신풍조 조장, 퇴폐풍조 조장 등 당국이 발표한 금지곡 지정의 이유 또한 말 자체는 번지르르했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국민들은 거의 없었다.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1971년 발표 당시 아름다운 노랫말 덕분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건전가요로 선전되었던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었다. 대학가 및 다운타운에서 사랑받던 이 노래는 초기에는 방송, 공연 등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뒤늦게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란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 북한 김일성이나 공산주의 혁명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하필이면 왜 태양이 불길하게 묘지 위로 떠오르느냐’ ‘행복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한낮의 찌는 더위나 시련이란 말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진 끝에 이 노래는 유일하게 ‘공식적인 금지곡 선정의 이유가 없는’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가사 일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대학생들이 방황을 그린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에 수록돼 인기를 얻고 있던 송창식의 <왜 불러>가 금지곡 목록에 오른 이유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경우였다. 이 영화에선 두 남자 대학생이 길거리에서 장발단속을 하는 경찰관을 만나 도망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게 송창식의 ‘왜 불러’였다. 그런데 크게 문제 삼을 것 없을 것 같은 이 음악에도 정권의 철퇴가 내려졌다. 한마디로 ‘왜 불러’라는 반말조의 어투가 ‘신성한 공권력을 조롱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이 노래의 가사는 자신의 구애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원망과 이제라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연인의 흔들리는 마음이 절묘하게 표현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권 연장을 위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데만 혈안이 돼 있던 독재정권과 하수인들은 귀엽고 애틋한 연인들의 사랑싸움마저도 색안경을 끼고 보았다.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왜 불러
토라질 땐 무정하더니 왜
자꾸자꾸 불러 설레게 해

아니 안되지 들어서는 안되지
아니 안되지 돌아보면 안되지
그냥 한번 불러보는 그 목소리에
다시 또 속아서는 안되지 (가사 일부)

 

이보다 더 어이없는 금지의 이유도 있다. 이금희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던 <키다리 미스타 김>이 느닷없이 금지곡 목록에 오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노래는 신장이 158cm에 불과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우려가 있어 방송관계자들이 알아서 1년 동안 금지곡 목록에 올렸다는 설이 파다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리기엔 시대의 공기가 너무나 냉랭했다. 술자리에서 무심코 나눈 대화 한마디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 가고, 온 가족이 용공분자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정권이 불편해할 단어 하나 때문에 어제까지 애창되던 노래를 더는 들을 수도, 부를 수도 없게 되어도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던 시대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김추자의 히트곡 <거짓말이야>는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울음도 거짓말’이라는 가사가 위정자들이 판치던 당시의 정치 현실을 빗댄 것이라 의심받아 금지됐는데 한 라디오방송 PD가 대통령 담화문 뒤에 바로 이 노래를 틀었다는 이유로 잡혀가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 국민가수 이미자조차 <기러기 아빠>의 가사가 ‘아빠가 월남에 파병됐다가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가정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 (가사 일부)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독재정권의 폭력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이장희도 어처구니없는 제재의 희생자였다. 한창 히트 중이던 <그건 너> 또한 금지곡 목록에 올랐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면 심의위원들의 의식 구조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못 이루나
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
어이해 한 자도 보이질 않나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가사 일부)

놀랍게도 이 노래가 금지된 이유는 ‘가사가 저속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밤새 잠 못 이루며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 것이 ‘바로 너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조차 불순한 의도를 가진 범죄로 보았던 것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애교로 넘겨야 할 수준이었다.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허무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에’, 이장희의 <한 잔의 추억>은 ‘음주를 조장하기 때문에’, 사이키델릭 록의 여제 김정미의 <바람>은 ‘콧소리가 신음소리처럼 들려 저속하기 때문에’, 배호의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를 위반하기 때문에’가 금지의 이유였다. 0시부터 4시까지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당시에 0시(자정)에 헤어진다는 것은 통행금지 위반이 분명하다는 제재 이유 앞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을 찾기 힘들다.

긴급조치 1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심야방송 라디오DJ로 인기를 모으고 있던 가수 서유석이 월남전 파병에 부정적인 멘트를 한 것이 문제가 돼 생방송 중 잠적해 3년 동안이나 대전에서 숨어 살았던 이야기는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해프닝이었다. 신중현의 <미인> 또한 석연찮은 이유로 금지곡 목록에 올랐는데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이 노래가 워낙 유행하던 당시라 젊은이들이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박정희의 권력욕을 빗대 ‘(대통령직을) 한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라는 가사로 바꿔 부르는 게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일명 ‘박정희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거절한 일도 있어 신중현은 유신정권 하에서 모두 12곡의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본인 또한 대마초 파동에 엮여 오랜 세월 활동을 음악 활동을 금지당했다.

가수 한대수 역시 뮤지션으로선 참기 힘든 굴욕을 맛본 장본인이다. 미국 생활 중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고 돌아온 그의 노래 <물 좀 주소> 또한 인기 급상승 중에 금지곡으로 묶여버려 음반판매, 방송출연, 공연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저속한 창법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고문이 횡횡했던 유신을 풍자하는 듯한 제목과 가사가 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란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가사 일부)

금지곡 지정, 대마초 파동 동 1970년대 중반 이후 국내 대중가요계는 ‘가요대학살’이라고 부를 만한 큰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 여파로 한창 꽃을 피우던 록, 포크 음악이 급격히 위축되었고 잠시 주춤했던 트로트가 다시 방송 공연계의 주류로 나서게 되었다. 유신이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이 불러온 변화 속에서 청춘문화와 문화다양성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유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70년대 대한민국의 문화 전반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언론 보도, 출판, 방송 등에서 사전검열이 일상화되었고 대중문화 또한 대본이나 악보를 미리 제출한 후 심의를 통과해야만 활동을 허락받는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1979년 한 일간지 기사에 따르면 긴급조치 발동 이후 4년 사이 국내곡 376곡, 외국곡 369곡 등 총 745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돼 ‘활동 금지’ 조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돌이켜보면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피로 쟁취한 자유의 가치를 망각한 채 아직도 그 흉흉하던 유신의 시대가 그립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진짜 부끄러움이 뭔지를 가르쳐주고 싶다.

글. 최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