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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키 보이스 <정든 배>

한 시대를 풍미한 청년 록 밴드

[커피 in 가요] 키 보이스 <정든 배> |

1970년 8월 12일자 경향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바로 전날 저녁, 이십 분 간격으로 방송되는 두 개의 라디오 음악프로에서 노래 한 곡을 연달아 틀어줬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제목은 ‘한 프로에 같은 가요를 두 번씩이나!’입니다. 해당 기사를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가요스타살롱(진행 김상희)>와 <지당한 말씀(진행 오승룡)>은 20분을 사이에 둔 DJ프로인데 키 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를 방송했다. 한 방송에서 20분 사이로 같은 곡을 두 번 방송하는 것은 음악프로에서 일찍이 그 예가 없었던 것.” 

방송사마다 하루 온 종일 경쟁적으로 인기곡을 틀어대는 지금이야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퍽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신문에서도 이 사건을 ‘이례적으로’ 언급한 것이죠. 이 기사를 보고 있으면 한 방송사에서 이례적으로 하루 두 번씩이나 같은 노래를 연이어 틀게 한 키 보이스((Key Boys)의 정체에 대해 덩달아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키 보이스는 지금의 남자 아이돌 못잖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당대의 보이밴드였습니다. 1963년 결성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멤버 교체가 잦았던 데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초기 멤버들이 다 빠져나가는 바람에 부침이 심했던 전설적인 록 밴드이죠. 국내 초창기 록그룹의 전설, 키 보이스에 대해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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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항기 주도로 1963년 창단

앞서 말한 것처럼 키 보이스는 1963년 창단됐습니다. 밴드 결성을 주도한 것은 당시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윤항기. 주로 드럼파트를 맡던 그는 옥성빈(리듬기타), 차도균(베이스), 유희백(보컬), 김홍탁(리드기타)과 함께 5인조 밴드를 결성하면서 ‘키 보이스’란 재미있는 이름을 붙였죠.

그런데 밴드 이름이 왜 하필 ‘열쇠 소년들(키 보이스)였을까? 그 연유는 리더 윤항기가 그 직전까지 미8군에서 주로 ‘락앤키(Rock&Key)라는 그룹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락앤키는 원래 가수 송달영의 딸인 송영란의 세션맨으로 출발한 연주 그룹이었습니다. 송달영의 미망인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게 된 딸 송영란의 매니저를 맡아 실력 있는 연주인들을 붙여 주었는데 그 세션맨들의 애칭이 바로 ‘키(Key)’였죠. 윤항기는 이때 송영란의 노래 반주를 돕던 세션맨의 일원이었습니다.

송영란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에도 윤항기는 락앤키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고 객원가수를 들여 미8군의 하우스밴드로 계속 활동했습니다. 결성 당시 그룹 이름을 ‘열쇠들’이라는 뜻의 ‘더 키즈(THE KEYS)’로 정한 윤항기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름을 키 보이스로 변경했습니다. 말하자면 키 보이스는 미8군이 아닌 일반무대에서 공연할 때 쓰려고 임시로 붙인 이름이었던 셈입니다.

키 보이스가 데뷔하던 1963년은 비틀즈의 1집 앨범 《Please Please Me》가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만들어내던 해였습니다. 영국 리버풀의 작은 술집 캐번 클럽에서 시작된 ‘연주하며 노래하는 젊은이들’의 인기는 극동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고무된 윤항기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평소 알고 지내던 젊은 음악 동료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해 일반 무대 진출에 강한 의욕을 보였습니다. 처음 유희백이 맡았던 보컬은 차중락으로 바뀌었고, 마땅한 멤버를 구하지 못해 마지막까지 고심하던 기타 주자에 경희대 입학 예정이던 기타 신동 김홍탁이 가세하면서 키 보이스는 드디어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던 일반 무대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록 밴드 논쟁

키 보이스가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인 장소는 젊은이들의 명소였던 종로의 유명 음악감상실 ‘드 씨네’였습니다. 리드 기타 김홍탁은 초창기 활동에 대해 “이종환이 사회를 맡고 있던 드 씨네의 디제이박스 옆에 임시로 만들어놓은 간이무대에 서서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 곡들을 주로 연주했다”고 기억합니다. 비록 현실은 음악감상실의 간이무대였지만 키 보이스의 빛나는 재능을 알아본 관객들은 이내 이 재기발랄한 밴드에 열광하기 시작했죠.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무대에 올라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으로 젊은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 차중락은 물론이고 빼어난 연주시력을 자랑하던 김홍탁, 옥성빈, 차도균 등 멤버 개개인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 그룹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음악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미8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윤항기가 레이 찰스처럼 검은 안경을 쓰고 더듬거리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객석은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죠.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키 보이스는 멤버 각자의 개성과 음악적 역량이 출중한 슈퍼밴드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가요팬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 최초의 록 밴드 논쟁’도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동안 한국 최초의 록 밴드는 신중현이 결성한 ‘애드4(ADD4)’로 알려져 왔습니다. 애드4포의 데뷔 앨범이 발표된 것은 1964년 12월. 하지만 얼마 전 발견 된 ‘키 보이스’의 데뷔 앨범은 그보다 한 해 앞선 1963년 7월 3일에 발매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따라서 키 보이스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인 ‘그녀 입술은 달콤해’가 한국 록 밴드가 발표한 최초의 트랙이라는 얘기는 반박이 불가능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키 보이스의 데뷔앨범(1963, 신세기레코드)에 수록된 노래 전부가 멤버들의 창작곡이 아니라 트로트 전문 작곡가인 김영광의 곡과 번안곡으로 채워져 있음은 논란을 부추기는 대목입니다. 시기적으로 앞선 키 보이스의 데뷔 앨범이 발견된 후에도 가요 연구가들이 여전히 애드4의 첫 앨범을 ‘국내 최초의 록 앨범’으로 인정하려는 분위기는 모든 곡이 신중현의 창작곡으로 이뤄진 애드4와 달리 키 보이스는 ‘오리지널 창작곡’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사실 당시 활동했던 원로 연주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밴드 형식으로 결성된 최초의 록그룹은 키 보이스나 에드4가 아닌 ‘코끼리 브라더스’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영한 최영훈 형제가 이끌던 이 캄보밴드(5~7인조 정도로 소규모 편성된 밴드)는 뛰어난 연주 실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장도 전해지는 녹음 음반이 없어 말 그대로 ‘구전으로만 전해오는 전설’일 뿐입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록밴드 중에 ‘김치스’와 ‘바보스’도 록 음악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이들 또한 녹음 앨범이 없어 국내 록그룹의 효시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차중락, 차도균 등 솔로 독립

멤버 각자의 활화산 같은 인기는 밴드 운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음악적 역량이 출중한 데다 개인적 인기까지 높아진 멤버들은 이제 저마다 새로운 밴드를 만들거나 솔로 가수로 독립하려는 꿈을 내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주자는 잘생긴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여성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차중락이었습니다. 차중락은 솔로 진출을 권유하는 음반 제작사들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밴드 활동을 접고 솔로로 독립해 나갔습니다. 차중락의 사촌형인 차도균 역시 솔로로 독립해 ‘철없는 아내’ 등의 노래를 히트시키며 인기가수로 자리를 잡았죠.

이 무렵 키 보이스는 잦은 멤버 교체가 이뤄졌습니다. 1기 멤버들이 빠진 자리는 곧 다른 멤버가 들어와 채웠으며 원년 오리지널 멤버들과 구분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키 보이스를 2기, 3기, 4기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당대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군림하던 키 보이스 분열에 결정타가 된 것은 팀의 리더인 윤항기와 김홍탁의 이탈이었습니다. 69년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할 만큼 음악적 역량이 뛰어났던 윤항기는 월남위문공연단에 지원하면서 슬그머니 밴드를 탈퇴했고, 이 무렵 점점 비트가 강한 지미 핸드릭스의 음악에 심취해 있던 김홍탁도 키 보이스의 얌전한 음악노선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팀을 나갑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메운 것이 후기 키 보이스 멤버인 조영조(기타), 장영(베이스), 박명수 (기타) 등이었습니다. 1969년 9월, 원년 멤버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옥성빈마저 신규 멤버들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면서 키 보이스는 전혀 새로운 그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습니다. 이때 불거진 논쟁이 과연 오리지널 멤버 하나 없는 밴드가 ‘키 보이스’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신규 멤버들과의 갈등으로 팀을 떠난 옥성빈이나 원년 멤버들은 그룹명 키 보이스를 영구보존하기로 하고 ‘사용불가’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룹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당장 활동에 큰 지장을 받게 되는 건 새롭게 물갈이 된 후기 멤버들이었죠. ‘키 보이스’란 그룹명이 가진 상품성은 의외로 뛰어나 당장 그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경우 밤무대 수입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판이었고, 이미 약속돼 있는 음반제작 계약도 파기될 처지였죠. 결국 이 문제는 유야무야되어 후기 멤버들은 키 보이스라는 기존 이름으로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새 멤버 영입 후 심기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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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역량이나 인기가 뛰어났던 원년 멤버들에 비해 후기 멤버들의 장점은 탄탄한 팀워크와 하모니였습니다. 이들 두 ‘키 보이스’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데뷔 앨범 B면의 마지막 트랩에 실린 <정든 배는 떠나간다>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멤버들과의 개인적 인연으로 키 보이스의 데뷔 앨범에 곡을 써주었던 김영광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발표 당시 일본 노래의 표절 의혹이 일었던 곡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보컬 차중락이 혼자 불렀던 이 노래는 1970년 후기 멤버들에 의해 <정든 배>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면서 멋진 중창곡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든 배> 역시 남성 중창의 멋과 하모니를 보여준 이 ‘후기 키 보이스 버전’의 노래입니다.

달그림자에 어리면서 정든 배는 떠나간다
보내는 내 마음이 야속하더라
멀어져가네 사라져가네
쌍고동 울리면서 떠나간다

달그림자에 어리면서 정든 배는 떠나간다
보내는 내 마음이 야속하드냐
멀어져가네 사라져가네
쌍고동 울리면서 떠나간다

멤버 전원이 물갈이 된 후에도 키 보이스는 적지 않은 히트곡을 내며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해마다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해변으로 가요(1970년 11월 발매)>는 2기 키 보이스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히는 국민애창곡이죠. 이 역시 훗날 ‘아스트로 제트’라는 일본 8인조 밴드의 노래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일설에 의하면 서울에서 펼쳐진 ‘아시아그룹사운드 페스티벌 공연’에 참석했던 이 밴드가 공연을 같이 한 키 보이스에게 이 노래를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나는 행복에 묻힐 거에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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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오정소, 백승진, 조기상, 이광일 등을 받아들여 7인조로 거듭난 키 보이스는 이후로도 한국 록밴드의 저력을 보여주며 당당히 한 시대를 풍미한 실력파 밴드였습니다. 해마다 여름 휴가철이면 어김없이 라디오 방송을 타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세월의 흐름에 밀려 시나브로 사라져버린 한국 록그룹의 전설을 떠올리곤 합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