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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시네마] 대만 뉴웨이브 걸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부평초처럼 떠도는 자신을 위로하고 싶을 때

[커피 시네마] 대만 뉴웨이브 걸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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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 양(Edward Yang) 감독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기수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세 살 때인 1949년 부모를 따라 대만 타이베이로 이주해온 외성인 출신의 그는 허유샤오엔, 차이밍량과 함께 대만 영화계를 대표하는 ‘3대 거장’으로 꼽히기도 하지요.
말레이시아 태생의 차이밍량이 대만 예술영화의 지존으로 존경받고, 같은 외성인 출신인 허우샤오셴이 대만 근대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유명했다면 에드워드 양은 대만의 현실을 도시적 기억 속에 일상화시켜 영화적 미학을 완성했다는 찬사를 받는 감독입니다.  

홍콩이나 중국 영화는 오래전부터 전 세계 영화 시장에서 하나의 장르적 특징을 가진 오락물로 어필해 왔습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던 대만 영화는 1980년대 초부터 에드워드 양을 비롯한 젊은 유학파 감독들이 돌아와 흐름을 바꿔놓으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지요. 이들은 주로 1960~1980년대 사이,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가치관의 갈등을 겪으며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현대 대만인의 붕괴된 삶을 즐겨 다뤘습니다.
에드워드 양은 그 중에서도 대만 영화의 존재감을 높인 자기만의 영화 미학을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는 감독입니다. 현대 대만의 도시적 풍경에 집중하면서 모던하고도 서정적인 연출로 유명한 그는 말 그대로 대만 영화에 새로운 물결을 불러온 주역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선두주자 

캘리포니아 명문 사립대학 USC 영화학과를 다니다 중퇴한 그는 컴퓨터공학으로 전공을 바꿔 학교를 졸업한 뒤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영화로 돌아옵니다. 생전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마음을 추동시킨 건 스페인 아마존 원정대의 광기를 그린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문제작 <아귀레 신의 분노>(1972)라고 하죠.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양 감독은 영화가 담을 수 있는 강렬한 주제 의식과 영화를 통해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지 깨닫고 가슴이 떨렸다고 고백합니다.  

컴퓨터 디자이너로 일하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1981년 대만으로 돌아온 양 감독은 운 좋게도 귀국 이듬해 대만 뉴웨이브 운동의 발단이 된 옴니버스영화 <광음적고사(光陰的故事)>의 연출에 참가할 기회를 얻습니다. 당시 대만 영화는 오랜 세월 정부의 엄격한 검열에 짓눌려 창작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었으며 홍콩의 액션영화나 헐리웃 영화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였죠. 하지만 <광음적고사>는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던 대만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기세를 몰아 1983년 장편영화 <해탄적일천(海灘的一天)>, 1985년 <타이베이 스토리>를 내은 양 감독은 일약 대만 영화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게 되었던 거죠.  

이듬해에도 이탈리아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노니의 영화적 표현에 영감을 받은 모더니즘 영화 <공포분자>를 선보이며 영화적 재능을 과시한 감독은 5년간의 침묵 끝에 1991년, 드디어 자신의 대표작이라 불러도 좋을 한 편의 문제작을 선보이게 됩니다. 그 작품이 바로 러닝타임 3시간 7분의 대작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牯嶺街少年殺人事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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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시 전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무려 3시간을 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1부와 2부로 나눠 관객을 만나게 됩니다. 따로 개봉했다기보다는 상영 중간에 10분 정도의 인터미션(영화나 연극 중간에 관객들에게 부여하는 휴식 시간)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의 묘를 더한 것이었죠. 그래도 관객 입장에선 187분짜리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리에서 정주행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긴 상영시간 때문에 1, 2부로 나눠 상영하기도 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와 달리 화려한 볼거리도 없고, 극의 전개도 상대적으로 밋밋했으니 관람 자체가 고역이 될 수도 있으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대만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인들이 전설의 걸작이 탄생했다며 극찬을 보냈습니다. <타이페이 스토리> <공포분자>와 함께 ‘타이베이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1995년 BBC가 뽑은 ‘21세기에 남기고 싶은 영화 100편’에 대만 영화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고 제3세계 영화에 콧대 높은 <뉴욕타임스>가 ‘이 영화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인생의 하루를 바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극찬할 만큼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1960년대 대만 근현대사에 비친 불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하 고령가)>은 1960년 발생했던 대만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범을 소재로 한 실화 기반의 영화입니다. 영화는 샤오쓰(장첸)와 밍(양징이)이라는 남녀 중학생의 처음 만나게 되는 타이페이의 한 중학교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영화는 국어 성적이 좋지 않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교 야간부로 반을 옮기게 된 남자 주인공 샤오쓰의 변화된 생활을 담담히 따라갑니다. 야간부는 공부에 대한 열의는커녕 틈만 나면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자잘한 사고를 치는 문제아들만 가득한 곳이라 개구쟁이인 샤오쓰 본인도 썩 내켜 하지 않는 곳이었죠. 하지만 샤오쓰는 고작 열네 살의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집안의 말썽꾼인 샤오쓰 역시 학교 내 유명한 소년 갱단인 ‘소공원파’와 조금씩 친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폭력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버리게 됩니다.  

영화에는 샤오쓰가 친하게 어울리는 소공원파 외에도 ‘217파’라고 불리는 라이벌 갱단 조직이 등장합니다. 지식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두 집단의 폭력 행위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지만 샤오쓰의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도 불안이 빛어 낸 폭력적 성향이 내재돼 있다는 걸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주인공 밍은 소공원파 리더인 허니(린홍민)의 여자 친구로 우연한 기회에 샤오쓰와 친해지게 되는 소녀입니다. 학교 내 모든 남학생, 심지어 총각 선생님에게까지 구애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밍은 217파와 갈등을 벌이던 허니가 폭력 사건을 저지르고 도망치듯 해군에 입대해 혼자 남겨지자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샤오쓰의 보호를 원하죠. 그리고 샤오쓰는 그런 밍에게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는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이 두 명의 남녀 외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지며 1960년대 불안한 대만 사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겉으론 불량배를 닮아가는 어린 중학생 갱단의 학교생활과 자잘한 일상, 상대 패거리와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다툼의 과정을 따라가고 있지만 감독은 샤오쓰의 아버지(장궈추)를 중심으로 드러나는 가족 문제, 그와 주변인들이 겪는 대만 사회의 시대적 불안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대만으로 건너오기 전 상하이의 지식인 그룹에 속해 있던 아버지는 대만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기약 없는 대만 생활에 지친 그는 대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점점 사라지자 스스로 무너집니다.

체제 유지를 위해 점점 심해지는 국민당 정권의 독재, 그리고 하나둘 변절해가는 주변 친구들을 보며 부평초처럼 떠도는 자신들의 삶에 지쳐가는 외성인들의 심경은 “1949년 대륙에서 건너와 벌써 12년이나 여기서 살았어. 나도 돌아가고 싶지만 이제 쉽지 않아.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해”라는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변화된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던 샤오쓰의 아버지는 급기야 공안당국에 끌려가 심한 취조를 받고 나온 뒤 잠재돼 있던 분노와 폭력을 터뜨리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이처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성인들의 혼란과 자신들에 대한 불평등에 반감이 높아진 내지인, 그리고 국공 내전을 겪지 않은 샤오쓰 세대의 어린아이들은 각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대만 사회가 처해 있는 불안의 실체와 대면하게 됩니다.  

자막을 통해 짧게 설명되지만, 사실 <고령가>는 대만 근현대사를 알지 못하면 영화적 재미나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쫓겨 온 외성인들이 주도권을 잡은 대만은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급격한 성장을 이루지만 사회 내부적으로는 독재와 민주, 외성인과 내성인, 부모세대의 자식세대 간의 갈등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죠.  

영화는 사회 전체가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딘가에 소속될 수밖에 없던 대만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무자비한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을 지켜줄 존재와 연대하는 것뿐입니다. 폭력으로부터 지켜지기 위해 폭력을 용인해야 하는 그 기막힌 아이러니가 이 영화를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샤오쓰와 밍, 그리고 샤오쓰의 아버지 세대가 각자의 방식으로 대만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체제의 폭력을 견뎌내는 모습은 눈물겹기조차 합니다.  

만만찮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고령가>는 이야기에 몰입할수록 지루함을 잊게 합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 진행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르면 오히려 이 방대한 이야기와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4시간으로 압축한 감독의 영화 재능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개봉 26년 만에 국내에서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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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과 희망을 잃고 폭력에 젖어드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고령가>는 영화 외적으로도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은 작품입니다. 영화 시장이 작은 탓에 대만에선 제대로 된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영화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하죠. 제작비가 모자라 촬영을 일시 중단한 적도 있으며 촬영 기간도 110일에 불과했던 영화가 이처럼 영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걸작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당초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정식 개봉이 되지 않아 성질 급한 영화마니아들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홍콩에서 출시된 좋지 않은 화질의 테이프를 통해 관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감독 사후인 2017년 CGV에서 초기 버전보다 50분이 더 추가된 감독판(257분)으로 뒤늦게 정식 개봉됐습니다. 그렇게라도 ‘인생의 하루를 바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 만날 수 있게 된 다행이지만 누적관객수 1,793명이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채 금방 종영된 것은 조금 아쉬운 결과였죠.  

현재 ‘넷플릭스’ 등을 통해 서비스되는 버전은 2015년 이 영화의 팬을 자처한 마틴 스콜세지와 세계영화재단 등의 노력으로 어렵게 복원한 디지털 리마스터링 복원판입니다. 2009년 유족들을 만나 극적으로 35mm 네거티브 필름을 확보해 재단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6년에 걸친 4K 디지털 복원작업을 마친 덕분이었죠.  

살다 보면 괜한 일로 마음이 심란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딘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자신을 위로하고 싶을 때 한번쯤 4시간의 영화여행을 권하고 싶습니다. 국내 개봉 당시 ‘지금 와서 무슨 말을 덧붙이겠나! 이건 틀림없는 걸작이다!’라던 감탄하던 어느 평론가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글 | 김정현

 

대만의 커피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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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와 아열대기후의 경계지역에 있는 대만에서 커피 재배가 처음 시도된 건 1884년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테이트차 회사를 통해 들여온 100그루의 커피나무가 그 시초였는데 현재의 산샤(三峽) 지역에 이식한 아라비카 모종은 대만의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모두 말라 죽고 말았다.  

대만에서 커피나무를 키워보려는 노력은 1900년대 초 대만을 점령한 일본인들에 의해 다시 재개되었다. 이들은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아라비카 모종뿐 아니라 로부스타, 리베리카 등 당시 알려진 커피나무를 종류별로 준비해 대만 곳곳에 이식했는데 1912년 타이동(台東), 1913년 화롄(花蓮), 1916년 위리(玉里)을 시작으로 산업적 규모의 커피재배가 시작되었다.
커피의 품질을 연구 관찰하고 토질이나 기후에 맞는 품종 개발에 꾸준한 투자가 이뤄진 결과 1928년 무렵부터는 대만 곳곳에서 상당량의 원두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에 고무된 일본인들은 1938년부터 1942년 사이 전국에 농장을 증설해 커피 생산량을 늘렸지만,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짧았던 대만 커피의 전성기는 금방 저물고 말았다.  

커피 농사는 지금도 대만 일부 지역에서만 이뤄지고 있으며 재배 면적이 작아 생산량 또한 연간 100여 톤에 그치고 있다. 그마저도 극히 적은 양이 미국, 일본 등의 마니아층에 수출되는 것을 빼면 대부분이 내수용으로 소비되어 국제적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