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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시네마] <워털루>, 세인트헬레나에 잠든 작은 거인의 고집

나폴레옹을 향한 두 천재 감독

[커피 시네마] <워털루>, 세인트헬레나에 잠든 작은 거인의 고집

  세기말의 불안과 밀레니엄의 기대감이 교차하던 지난 2000년 9월, 전 세계 영화팬들의 관심 속에 한 편의 영화가 개봉됩니다. 영화의 제목은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라는 당대 최고의 할리우드 스타가 출연한다는 소식만으로도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이 영화는 그러나 연출을 맡은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1928-1999) 감독이 영화 편집 도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작품 외적으로도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감독의 유작인 데다 생전에 공공연히 ‘내 연출작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냈던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의 흥행 성적 또한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큐브릭 감독의 연출작 중 유일하게 미국 내 적자를 기록한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모호한 데다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몽롱한 전개 방식이 대중들에겐 조금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평론가들의 걱정이 현실화된 것이었죠.  

다행히도 영화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라는 두 슈퍼스타의 티켓 파워에 힘입어 해외에서 1억 달러가 넘은 흥행 수익을 올려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 씨네필의 우상으로 군림하던 큐브릭 감독의 유작으로는 크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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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기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왼쪽사진은 1949년 촬영)의 <아이즈 와이드 셧> 포스터

미완으로 남은 스탠리 큐브릭의 꿈 

1928년생인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20세기 영화 역사상 가장 완벽한 감독’으로 불리는 문제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17세의 나이에 잡지사 사진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취미 삼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 시작했던 그는 1953년 장편영화 <공포와 욕망>으로 본격적인 자신의 영화 이력을 시작합니다. 3년 후 <킬링>을 통해 범상치 않은 재능을 입증한 그는 영화를 통해 완벽한 미학을 추구했고, 실제로 새 작품을 찍을 때마다 새로운 기법과 기술을 선보이는 테크니션으로 특히 영화평론가들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낸 전도유망한 감독이었죠.  

제작 및 주연을 겸한 배우 커크 더글러스의 지나친 간섭에 대한 실망감으로 스스로 자신의 작품연보에서 제외해 달라고 말했던 <스파타커스(1960)>마저도 뛰어난 역사적 통찰과 감상주의, 서정미가 조화된 걸작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라이벌 찰턴 헤스턴에게 영화 <벤허>의 주인공 역을 빼앗기고 복수의 칼을 갈던 커크 더글라스에게 이 영화는 왕의 귀환을 알리는 완벽한 복수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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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파타커스> 포스터
 

하지만 불행히도 <스파타커스>는 큐브릭 자신에겐 잊고 싶은 악몽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던 커크 더글러스는 급한 마음에 젊은 감독 대신 종종 자신이 주도적으로 촬영 현장을 지휘하곤 했죠. 큐브릭은 각본 수정, 최종 편집 작업에서도 배제되었습니다.  

이렇듯 철저히 자본 논리에 예속된 할리우드에 환멸을 느낀 큐브릭은 영화 개봉 후 미국을 떠나 런던 근교로 거처를 옮기고 자신이 직접 기획하고 연출 전권을 쥔 영화만 만드는 소위 ‘은둔형 감독’의 삶을 택하게 됩니다. 영화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통제력, 그리고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그는 자신이 원하는 환경 하에서 오늘날 세상이 칭송하는 큐브릭표 영화들을 발표하며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높여온 거였죠.  

<로리타(1962)>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시계태엽 오렌지(1971)> <샤이닝(1980)> <풀 메탈 자켓(1987)> 등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꼽힙니다. 감독 자신의 신비주의 이미지, 영화에 대한 깊은 사유와 영상미, 관객의 허를 찌르는 전개, 당대 영화기술의 한계를 확장한 그의 독특한 영화 문법은 후대의 영화감독들에게도 절대적 영감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아이즈 와이드 셧> 또한 그가 왜 ‘20세기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칭송받는지를 입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입니다.  

구 소련이 만든 걸작 전쟁영화 <워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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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폴레옹 마니아, 본다르추크 감독의 <워털루> 포스터
 

그런데 이렇듯 신작을 내놓을 때마다 전인미답의 영화적 형식미와 장르영화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격찬을 받던 이 천재감독에게도 이루지 못한 미완의 꿈이 하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그 연장선에 있는 정복전쟁의 주인공,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영화로 담는 일이었죠. 그에게 나폴레옹은 끊임없는 영감과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후 그의 서재에서 발견된 나폴레옹 관련 서적만 해도 1만 8천여 권에 달하고, 나폴레옹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한 시나리오 초고도 다 마련되어 있었다고 하죠.  

큐브릭이 나폴레옹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1968년 개봉과 함께 영화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SF걸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차기작으로,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약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전 유럽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였던 풍운아의 일대기가 운명처럼 천재감독의 가슴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죠. 시나리오와 촬영 장소 헌팅까지 끝낸 감독은 배우 오스카 웨너를 나폴레옹으로, 오드리 헵번을 황후 조제핀 역으로 낙점한 뒤 영화 제작을 준비했지만, 엄청난 예상 제작비에 놀란 MGM이 갑자기 제작, 배급을 포기해버리는 바람에 이 프로젝트는 끝내 미완의 숙제로 남고 말았습니다.  

스튜디오 MGM이 약속을 뒤집고 영화 제작을 백지화하게 된 이유는 1970년 구 소련(러시아) 주도로 만들어 개봉했던 영화 <워털루(Waterloo)>의 흥행 참패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체제 선전을 위해 만들어지던 국책영화와 달리 소련이 주축이 되고 이탈리아, 미국, 영국 등의 서방 자본이 투자된 <워털루>는 순수 제작비만 해도 당시 돈으로 4,000만 달러를 넘는 압도적 스케일의 전쟁영화였습니다. 흥행에서도 큰 기대를 모았던 이 영화는 하지만 다큐멘터리처럼 느린 극 전개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아 나폴레옹 전기영화를 준비하던 MGM 경영진의 간담을 철렁하게 만든 것이었죠.  

참담한 흥행성적에 놀란 MGM은 끝내 이 대규모 전쟁영화 프로젝트를 반려하게 됩니다.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의 요지부동에 감독 또한 어쩔 수 없이 제작 포기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생애 마지막까지 감독 스스로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던 미완의 꿈은 그의 사후에야 《스탠리 큐브릭의 나폴레옹 - 만들어지지 않은 최고의 영화》라는 책으로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파란만장 ‘나폴레옹 황제’의 일대기 

재앙으로 불릴만한 흥행 참패에도 불구하고 영화 <워털루>는 사실 영화 역사적으로는 ‘전쟁영화의 교본’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더욱이 또 한 명의 천재감독이라 할 수 있는 세르게이 본다르추크(Sergei Bondarchuk) 감독의 능수능란한 연출력은 후대의 영화감독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죠.  

우크라이나 태생의 이 배우 겸 감독은 젊은 시절 연극무대를 통해 다져진 탄탄한 연출력으로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이어진 영화 <전쟁과 평화> 4부작을 통해 구 소련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전투장면의 스케일, 컴퓨터그래픽(CG)이 없던 시절임에도 수 만 명의 병사들이 뒤엉켜 벌이는 전투 장면의 박진감은 지금 보아도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듭니다. <전쟁과 평화> 촬영 당시, 연인원 75만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한 적이 있던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만 2천 명의 보병과 2천 명의 코사크 기병을 출연시킬 수 있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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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를 그린 그림(윌리엄 사들러, 1815)


영화는 ‘황제 나폴레옹’의 운명을 바꾼 1815년 6월 18일, 12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 제국군과 20만여 명의 대불 연합군(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이 맞붙은 워털루 전투의 전개 과정을 사실감 넘치게 그리고 있습니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는 등의 고난이도 연기에 현역 서커스 단원들이 동원된 덕분에 마치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생생한 몰입감이 압권이죠.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역사적인 워털루 전투는 대불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나폴레옹 황제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으로 전 유럽을 발밑에 두었던 프랑스 제국군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친 프로이센의 배신, 이해할 수 없는 지휘부의 판단 미스가 이어지며 전투 숙련도가 훨씬 떨어지던 연합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전투에 패배한 나폴레옹은 구사일생 파리로 귀환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던 프랑스 의회의 압력으로 퇴위 당한 뒤 영국왕 조지3세에게 ‘전쟁포로로서의 예우’를 부탁해야 할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조지3세의 입장은 단호했죠. 영국을 비롯한 유럽 내 다른 왕정 국가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앞세운 프랑스 시민혁명을 ‘체제 전복을 불러올 사상적 전염병’으로 여겼으니까요. 결국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 불세출의 영웅은 남대서양의 외딴섬인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에 유폐되어 몇 년 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안식처 ‘세인트헬레나’ 

<워털루>는 1974년 국내에서 <나폴레옹>이란 제목으로 대한극장에서 단관 개봉되어 9만 명 이상의 흥행스코어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명언으로 유명하던 프랑스 전쟁 영웅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평가가 의외로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나폴레옹의 생애를 다룬 소설, 논문, 에세이가 전 세계적으로 60만 권 이상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그처럼 끝없이 회자되는 역사 인물 또한 다시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탠리 큐브릭이나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같은 천재감독의 마음을 격하게 추동시켰던 나폴레옹은 과연 어떤 매력의 존재였을까요?  

전 세계인은 지금도 나폴레옹을 무자비한 정복자가 아니라 혁명의 불길 속에 용감히 뛰어들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쟁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령 코르시카 출신의 시골뜨기 포병장교의 꿈은 백일몽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보게 될 것입니다.  

글 | 김정현

 

세인트헬레나의 커피 산업

커피시네마4_by XEON, wilimedia (CC BY)Saint_Helena_Island_-_panoramio.jpg

세인트헬레나 섬. by XEON, wilimedia (CC BY)


나폴레옹 유배지로 유명한 영국령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는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 서안에서도 직선거리 1,200km나 떨어져 있는 남대서양 한가운데의 3개의 작은 화산섬으로 이뤄져 있다. 섬의 전체 면적이 우리나라의 영종도 크기에 불과하지만 1502년 포르투갈 항해사에 의해 처음 발견된 후 지리적 이점을 살려 유럽과 남아메리카를 오가는 원양선박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되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1815년 10월, 영국왕 조지3세에 의해 이곳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어 1821년 5월 5일 사망할 때까지 롱우드 하우스(Longwood House)라 불리던 작은 집에서 생활했다. 엘바섬의 귀환(1815) 때처럼 프랑스 민중이 다시 그의 삼색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치는 걸 두려워한 영국은 ‘전쟁포로 나폴레옹’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그에게 제공되는 식사 또한 매우 열악했다. 다만 나폴레옹에게도 하루 몇 잔의 커피가 허락되었는데 식사를 마친 나폴레옹이 ‘이집트 상형문자가 그려진 파란색 잔에 커피를 따라 맛을 음미하듯 아주 천천히, 우아하게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커피 종자가 처음 심어진 것은 1733년으로 생산량 자체는 많지 않으나 ‘나폴레옹이 즐겨마시던 커피’로 소문이 나면서 유럽, 특히 프랑스 사교계에서 한동안 고가의 커피로 거래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세인트헬레나 커피는 한해 수확량이 12톤을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부 커피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그 희귀성 때문에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단일 유형의 아라비카 원두를 주로 재배하는 세인트헬레나의 커피 개화 시기는 12~4월, 수확 시기는 10월~2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