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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유치환-이영도의 러브스토리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찻잔 스토리텔링] 유치환-이영도의 러브스토리.

첫 한두 행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래서 아마도 사춘기 시절 모두에게 난데없이 심장이 널뛰는 경험을 선사했을 사랑의 세레나데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청마(靑馬)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시인 유치환(1908~1967)의 <행복>이라는 시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은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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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기혼남과 스물아홉 미망인의 첫 만남

아마도 이 작품은 청마 유치환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사랑받는 연시(聯詩)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청마는 국어 교과서에 꽤 여러 작품들이 실릴 정도로 재능 있고 영향력 높은 시인이었죠. 독자들 중에도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그의 대표작 <깃발>을 통해 ‘노스텔지어’라는, 왠지 북구의 설산 위에 꽂힌 하얀 천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낯선 영어 단어를 알게 된 독자가 없지 않을 겁니다.  

고인이 된지 50여 년이 되어가지만 유치환에 대한 평가는 꽤 엇갈리는 편입니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을 옹호하고 조선인의 징병을 합리화한다는 의심을 받은 시 <전야>와 <북두성> 등의 작품 때문에 친일문학가 명단에 올라있는가 하면, 해방 후 자유당정권 시절에는 학교 교장으로써 부당한 권력에 부역하지 않겠다며 결기를 세우는 바람에 해직당한 일도 있을 만큼 많은 부침을 겪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청마 유치환을 기억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정운 이영도(1916~1976)와의 애절한 러브스토리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죽음이 그를 이승에서 떼어놓을 때까지 청마는 정운을 정말 제 몸 이상으로 열렬히 사모했습니다. 위 시 <행복> 역시 이영도에 대한 애끓는 연모의 마음을 담아 쓴 시라고 알려져 있죠.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청마의 시 대부분은 이영도에게 바치는 사랑의 맹서로 읽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만큼 이영도는 청마의 가슴 밑바닥에 깊이 파묻은 삶의 고갱이였습니다.  

안타까운 건 현실에서의 청마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는 겁니다. 그 시절 이미 그는 처자식까지 거느린 기혼자였습니다.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던 그가 뒤늦은 사랑앓이를 시작하게 됐으니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요?  

청마가 이영도를 처음 만난 건 경남 통영에서입니다. 1908년 거제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을 통영에서 보낸 청마에게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죠. 훗날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청마는 그 무렵 이미 뛰어난 문재(文才)로 주목받던 서른여덟 살의 시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제의 검속대상에 올라 만주에 사는 형 집으로 몸을 피했던 청마는 해방이 되자 부인과 함께 통영으로 내려와 부인은 유치원을 운영하고, 자신은 막 통영여중의 국어교사로 부임하던 무렵이었죠. 

행간마다 절절한 사랑의 연서

청마는 운명처럼 그곳에서 호수처럼 맑고 단아한 미모를 가진 가사과 교사를 동료로 만나게 됩니다. 촉망받는 여류 시조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던 정운 이영도였죠. 이영도는 당시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의지해 살아가던 청상과부였습니다. 스물한 살 때 출가해 미망인이 되긴 했어도 아직 스물아홉 여성의 고운 미모와 문인으로써의 기품을 두루 갖춘 요조숙녀가 바로 청마의 짝사랑 상대였던 겁니다.  

청마는 호수에 비친 사슴의 눈처럼 맑은 눈망울을 가진 이영도를 본 순간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청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문학에 대한 그녀의 넓고 깊은 식견이었습니다. 친정 오빠인 시조시인 이호우의 영향을 받아 이영도는 이미 어린 나이에 시조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젊은 여류 시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녘의 쓸쓸한 항구도시 통영. 그곳에서 문학과 인생을 논할 만큼 학식을 갖춘, 거기다 뛰어난 미모의 신여성을 만난 유치환의 마음은 봄볕 아래 살얼음처럼 녹아내렸습니다. 

애써 감추려했지만 청마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연모의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1947년부터 그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영도에게 사랑의 연서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짝사랑의 상대. 하지만 청마는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와 산문을 써서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그 시절 이영도에게 보낸 청마의 편지에는 애오라지 사랑을 갈구하는 한 사내의 애타는 마음이 눈물처럼 배어 있습니다.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어떤가요? 현실에선 이뤄지기 힘든 그 사랑의 한계 때문에 더 간절하기만 한 청마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나요? 또 청마는 어떤 글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이렇듯 솔직하게 탄식하기도 합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이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청마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이영도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경북 청도 출신의 그녀는 부친이 그곳에서 군수를 지냈고, 어린 시절 집에 개인교사를 두고 공부했을 만큼 엄한 집안 출신의 규수였죠. 아직은 자유연애가 집안사람들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방종으로 인식되던 시기였으니, 가정까지 있는 아홉살 연상의 남자에게 함부로 마음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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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여 통의 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청마는 짝사랑 그녀에게 줄기차게 연서를 써 보냈죠. 그 시절 편지를 부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던 그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이 바로 지금의 통영우체국이라고 합니다. 그 시절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그리운 사람에게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은 보내’는 모습을 마냥 지켜봐야만 했던 청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애틋한 짝사랑을 고백하기 3년, 마침내 이영도도 청마의 갸륵한 마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유부남과 청상과부의 불륜 관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플라토닉’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간신히 연인의 마음을 얻었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청마의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이영도 또한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마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청마에 대한 사랑을 수줍게 표현합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청마는 1967년 귀갓길에 시내버스에 치여 숨을 거둘 때까지 이십 년 동안 무려 이영도에게 2,000통이 넘는 연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청마는 숱한 세월의 격랑을 꿋꿋이 버티며 애끓는 사모의 마음을 간직했던 로맨티스트였던 겁니다. 청마가 보낸 편지는 안타까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 했던 두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습니다. 나중에야 이영도에 대한 남편의 애끓는 사랑을 눈치 챈 부인은 “그토록 목숨 같은 사랑인데 어찌하겠어요”라는 말로 탄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영도에게 보낸 청마의 편지들은 6.25 전쟁 때 일부가 소실되어 500여 통만 남았지만 그 중 일부가 한 문예주간지에 소개되면서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살아생전 두 시인이 나눈 지고지순한 사랑의 연서는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했습니다. 잡지사에는 두 연인의 사랑을 안타까워하는 독자들의 편지가 쇄도했습니다. 얼마 뒤 이영도는 청마의 편지 가운데 200여 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으로 묶어냈죠. 책의 인세 수익 또한 우리나라 시문학 발전을 위해 전액 기부했습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당사자에게 절실하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 역시 정신의 외도라고 손가락질하거나, 무책임한 유부남과 순진한 여선생의 불륜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대체 당사자 아닌 그 누가 함부로 사랑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행복>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 시는 어느 해, 당신이 직접 쓴 손 편지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글 | 이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