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찻잔 스토리텔링
결핍과 충족 사이에서 영혼과 감성을 깨우다

고독을 변주하는 카페,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그대여!

결핍과 충족 사이에서 영혼과 감성을 깨우다.

산적한 일로 수심이 많은 당신, 카페로 가라
그녀에게 바람맞은 당신, 카페로 가라
신발이 낡고 해어진 당신, 카페로 가라
수입이 400 크로네인데 500 크로네를 쓰는 당신, 카페로 가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당신, 카페로 가라 
사람을 경멸하지만 그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당신, 카페로 가라
거실을 덥힐 석탄과 기름이 없는 당신, 카페로 가라
담배 살 돈이 없어도 한 개비 부탁할 웨이터가 있는 당신, 카페로 가라
현관문이 잠겼지만 열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당신, 카페로 가라
새로 맞춘 정장을 자랑하고 싶은 당신, 카페로 가라
외상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당신, 카페로 가라
_ 페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 1859-1919)의 시 <To The Coffee House> 중

비엔나에 있는 ‘카페 센트랄(첸트랄)’ 입구에 들어서면 시인 알텐베르크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다.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카페에서 보냈던 시인은 생전의 바람대로 그곳을 영원한 주소로 갖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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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카페 센트랄에 있는 시인 알텐베르크의 모형

까뮈, 보부아르, 랭보의 카페  

우리는 왜 카페에 갈까. 시 본문 중 몇 가지 이유에 해당할까. 카페는 결핍과 충족 그 사이, 내면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까뮈는 그의 에세이 <삶에의 사랑>에서 팔마의 한 카페를 언급하고 있다.  

“팔마(스페인 동부 발레아레스 주, 지중해 마요르카 만의 남서 해안)에 밤이 오면 삶은 시장 뒤쪽 노랫소리로 떠들썩한 카페들의 거리 쪽으로 밀물처럼 서서히 밀려온다.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골목들을 지나 덧문이 달린 문들 앞에 이를 때면 불빛과 음악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카페들 중 어느 한 곳에서 거의 하룻밤을 새우다시피 해본 일이 있다. (중략) 카페며 신문이 없다면 여행한다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우리를 확실하게 방어해 주는 그런 시간들이다.”
_ 알베르 까뮈. 2000. ≪안과 겉≫. 김화영 옮김. 책세상
 

당시 까뮈는 고독이라는 섬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첫 결혼의 파탄으로 인한 혼란을, 절망 없이는 사랑도 없다는 삶을 향한 맹렬함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멀리 멀어지게 하면서도 동시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시켜 준 일은 없을 거라는 고백으로 팔마의 카페에서 맛본 감동을 표현했다.  
1980년, 사르트르가 75세로 세상을 떴을 때 2만5천 명이 모인 장례식에서 보부아르는 한 송이 장미를 관에 올려놓으며 51년 동안 삶의 동반자이자 지적 동지를 떠나보낸다. 그 후 보봐르는 사르트르와 함께 쉴 새 없이 글을 쓰고, 여러 지성인들과 예술적 교류를 나눴던 카페 플로르에서 사랑과 질투와 우정을 회상하며 고독과 상실을 헤쳐 나간다.  

1873년 11월 1일, 파리의 카페 ‘따부히(Tabourey)’에 나타난 랭보의 고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랭보는 그의 동성 연인 베를렌느와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과 뒤틀린 사랑으로 영혼과 육체가 피폐하고 고갈된 상태였다.
불과 네 달 전인 1873년 7월 10일, 랭보는 브뤼셀에서 베를렌느와 심한 말다툼 끝에 그가 쏜 권총을 맞고 셍쟝 병원에 입원한다. 퇴원 후 랭보는 어머니의 농장이 있는 로슈로 돌아가 불후의 명작을 탈고한다. 혼신의 힘을 다했던 《지옥에서의 계절》을 완성한 후 찾아오는 허탈과 회의와 삶의 암울함을 안고 찾아간 곳이 카페 따부히였다.
랭보는 그 후 절필을 하고 아프리카, 유럽 등지로 유랑을 떠난다. 베를렌느가 종교를 받아들이라는 제안마저 거부한 채 철저하게 고독에 빠져든다. 결국 랭보는 오른쪽 무릎에 격심한 통증으로 입원한 마르세이유의 한 병원에서 1981년 11월 10일 3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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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 각인된 무의식적인 코드’

《데카르트처럼 말하기》라는 책에서 라파이유 박사는 커피, 사랑, 엄마 등 어떤 말이든지 처음 배우는 때가 있는데 그 말을 처음 이해할 때 개인만의 고유한 의미가 각인되며,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정신적 연결을 평생 사용하게 된다고 했다. 박사는 이런 정신적 연결을 ‘뇌에 각인된 무의식적인 코드’라 불렀다. 

나는 커피가 가진 치유의 코드를 파리 15구의 한 병원에서 깨달았다. 그때 나는 쓸개 제거 수술 후유증으로 한 달 넘게 병원신세를 지고 있었다. 침대까지 커피를 날라다 준 사람은 간호사였고, 우유와 설탕이 곁들여 있었다. 복도 끝에서 퍼지기 시작한 커피 향은 수레바퀴 소리와 함께 온몸을 깨우며 아침을 환기시켰다. 쓸개 빠진 여자의 해학과 유머, 상실과 권태까지 찻잔 속에 녹아들어 갔다. 나는 섬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병상에서 이방인으로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과 부대낌을 위무(慰撫)하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나를 짓눌렀던 고독과 맞섰던 것이다.  

그때 내가 마신 커피는 카페오레였다. 카페오레는 1685년 프랑스 의사 아비센나가 환자를 위해 원두커피 추출물인 드립 커피에 우유를 첨가해 제조한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도 자신의 연인인 마담 바랑과 나중에 반려자가 된 마담 테레즈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카페오레를 마셨던 곳이 지상낙원이었다고 《고백록》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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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카페였던 다방, 이상의 꿈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에 관한 기록은 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소개되는데, 마치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인들은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한국인이 최초로 개업한 커피하우스는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이었던 이경손이 종로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였다. 《청색지》에서는 카카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그 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로에 맨 처음 낫든 다방은 구년 전 관훈동 초 삼층벽돌 아 랫층에 이경손씨가 布哇(포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 다.” 

카카듀 뒤를 이어 1928년에는 종로 2가에 ‘비너스’라는 다방이, 1929년에는 YMCA 근처에 ‘멕시코’가, 극작가 유치진이 ‘브라다나스’를 연달아 문을 열었다. 1932년에는 조선호텔 건너편에 조각가 이순석이 ‘낙랑팔러’라는 다방을 개업한다.  

1933년, 천재 시인 이상은 연인인 기생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제비’다방을 열었다. 현재 종각 지하철역 1번 출구 앞, 주상복합 건물 그랑서울 자리이다. 당시 제비 다방은 지성과 멋을 겸비한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집합소였으며 <봄봄>의 김유정,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박태원, 화가 구본웅 등이 단골이었다고 한다.
이상이 직접 설계하고 실내 장식까지 마친 제비 다방은 거리와 접한 면을 유리로 투명하게 했고 내부는 모두 흰색으로 꾸몄다. 현대 커피숍 구조를 엿볼 수 있는 이상의 안목은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와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한 경력으로 볼 때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상은 강한 자의식의 인식으로 시대의 고독을 직시하려 했고 지식인으로 카페라는 열린 공간을 통해 제비가 날갯짓하듯 자유를 추구하려 했다. 그러나 제비 다방은 개업한 지 2년 뒤인 1935년에 문을 닫는다. 금홍이가 현실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던 이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후 이상은 1935년 ‘쓰루’, ‘무기’ 다방 등을 개업했지만 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는다.  

카페는 결핍과 충족 그 사이에서 영혼과 감성을 깨운다. 카페에 가면 칭찬을 들을 수 있고,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 있다. 불투명한 미래와 불안한 관계들과 고독을 대면하여 삶의 긍정적인 코드로 각인하는 기쁨이 있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그대여! 암울하고 높은 현실의 벽을 넘을 용기를 얻었는가.

글 | 오서윤
오서윤 님은 201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2013년 <평화신문>과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현재 계간 <선(選) 수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