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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2차 세계대전, 대서양에서 벌어진 숨바꼭질

‘보급 전쟁’과 커피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당초 개전 3일 안에 끝날 거라는 전망이 무색하게 2023년 9월 현재까지 교착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교전 초기, 승리를 자신하던 러시아가 막상 우크라이나 영내로 진입한 후 속 시원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전방 부대에 대한 원활한 물자공급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죠.  

전투 중인 군인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보급해야 할 세 가지로 식사(Bean), 무기(Bullet), 의료지원(Bandage)을 꼽아 왔습니다. ‘전투는 무기가 하지만, 전쟁은 물자가 한다’는 말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급은 늘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최우선의 요소였습니다. 승리한 전쟁에는 반드시 ‘보급의 승리’가 뒷받침되곤 했죠. 2차 세계대전 때도 보급은 전쟁, 아니 전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서양 수송루트를 봉쇄한 독일 U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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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황 지도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대륙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보급 문제 또한 참전국들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이 되었죠. 그런 와중에 1940년 6월, 프랑스가 함락되고 독일 편에 가담한 추축국 이탈리아가 수에즈 운하를 봉쇄해 버리자 전세는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이 사실상 독일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상태라 유럽 정복이라는 히틀러의 꿈은 금방이라도 현실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영국이었지만 작은 섬나라가 전 유럽과 북아프리카 자원지대를 장악한 독일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영국은 사실 자원 빈국입니다. 해외 식민지 개척과 증기기관 개발로 세계열강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지만 부족한 자원과 석유, 식량 등을 해외 식민지나 수입에 의존해오던 영국의 전쟁 역량은 기대치를 한참 밑돌았습니다.  

독일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런 약점을 파고듭니다. 독일의 전략은 영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해상루트를 봉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 곧 바닥까지 떨어집니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갖고 있던 영국이지만 전쟁 준비에 필요한 자원이나 연료, 식량을 들여올 수 없어 그로기 상태까지 몰리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관망하던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1941년 12월 참전을 결정하고 영국을 지원합니다. 문제는 항공기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물자가 한정돼 있어 부득이 모든 물자를 선박에 실어 대서양을 횡단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미국과 독일은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서양 수송로에서 피 튀기는 격전을 벌입니다.  

가장 큰 위협은 단연 독일 잠수함 U보트였습니다. ‘운터제보트’, 즉 ‘수중 보트’라는 독일어의 영어식(under sea boat) 표기로 알려진 U보트는 1차 세계대전 말기 처음 등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꾸준한 성능 개량을 거쳐 공격 전술함으로 거듭난 U보트는 자체에 10~22발의 어뢰를 장착하고 북대서양과 북해 바다 밑을 휘젓고 다니며 영국으로 접근하는 선박에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평균 7노트(시속 12km) 밖에 되지 않는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바다라는 천혜의 은폐물에 몸을 숨겼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어뢰 공격을 퍼붓고 사라지는 U보트는 연합군 입장에선 악몽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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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U보트

수송선 차출로 미국 내 커피 공급 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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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의 대응책은 ‘호송선단’이었습니다. 여러 척의 선박을 겹겹이 하나의 선단으로 묶어 주위로 구축함을 배치해 선단을 호위하기로 한 것이죠. 적의 공격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으나 손실을 최소화할 수는 있었습니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그레이하운드>는 대서양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의 수송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2월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해상 수송로를 끊어 영국을 고사시키겠다는 독일 U보트의 ‘울프팩 작전’은 단순명쾌했습니다. 늑대 무리가 양 떼를 사냥할 때처럼 먼저 하나로 뭉쳐 있는 선단을 흩어 놓은 뒤 하나하나 개별 사냥하는 것이었죠. 호송선단을 발견한 U보트는 먼저 주변의 잠수함들에 이 사실을 알리고 조용히 추격을 시작합니다. 수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상공에서 따라오던 초계기가 연료 부족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겁니다. 이윽고 항공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블랙 핏 구간에 들어서면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늑대처럼 달려온 U보트들이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인 수송선을 공격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대서양은 시뻘건 화염과 검은 연기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전 초기, 미국은 계속되는 선박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가용한 역량을 총동원했습니다. 민간 선박을 징발하는 것은 물론, 남미를 오가며 물자를 실어오던 수송선까지 대서양 전선에 차출했죠. 사활을 건 보급 전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남미에서 충분히 커피를 수입할 수 없었고, 1942년 4월부터 1943년 4월까지 민간 커피 공급을 줄여 배급제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유럽이나 태평양 전선에 나가 있는 군인들에게 지급되던 인기 보급품 중의 하나가 동결건조 커피(인스턴트커피)였습니다. 싫건 좋건 우선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비해 보급 사정이 한참 열악했던 독일군들은 커피 원두를 조달할 방법이 없어 볶은 도토리를 ‘대용 커피’라는 이름으로 지급했으니 말이지요.  

전쟁의 공포와 향수를 달래주던 커피

기약 없는 전투에 지쳐가던 전장의 군인들도 고향에서 마시던 원두커피 한 잔이 너무나 그리웠을 겁니다. 하지만 보급선 확보가 여의치 않으니 이들에게 제때 맛 좋은 커피를 전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겠죠. 당시 미군 병사들이 즐겨 부르던 군가의 한 대목입니다.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offee's mighty fine. It looks like muddy water and tastes like turpentine(걔들이 군대 커피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흙탕물 같고, 맛은 테레빈 오일 같아요).”
한 잔의 커피, 아니 전쟁 전의 행복한 삶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던 사선 위의 병사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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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미군 병사들. by wikimedia


2차 세계대전은 결국 미국과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습니다. 수많은 물자와 인명을 앗아갔던 대서양에서의 수송 전쟁도 막을 내렸죠. 전후 발행된 전쟁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대서양에서 물자 수송 중 격침된 선박의 수는 2,779척에 달합니다. 전쟁 중 1,250척이 생산됐던 U보트 역시 753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 수상 처칠은 회고록을 통해 “나를 정말 두렵게 만든 단 한 가지는 독일의 U보트였다”고 회상합니다. 대서양 바닷길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양측 병사들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원치 않는 세계 전쟁의 포화에 휩쓸려 꽃다운 생명을 바치고 간 무명의 병사들 앞에 따뜻한 커피 한 잔 건네주고 싶습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