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찻잔 스토리텔링
행운을 가장한 불행일지라도

금요일, 편의점, 로또

[1]

살다 보면 행운으로 포장된 불행에 휘말려 일껏 평온했던 삶이 송두리째 엎어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도 얼마 전 수십 억대에 이르는 선친의 유산을 두고 소송까지 벌인 끝에 남처럼 지내게 된 어느 형제들의 소문을 들었고, 속아서 샀던 맹지가 개발부지에 포함돼 돈방석에 앉나 싶더니 돈의 사용처를 두고 다툼이 생겨 이혼소송을 벌이게 된 어느 부부의 사연을 풍문처럼 접한 적이 있었다.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나간다는 말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돈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많은 분란이 행운을 가장한 불행으로 이어지는 걸 그 역시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돈이 불러올 불행 따위를 겁내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지금보다 더 불행해진다 해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눈 먼 돈다발이 어두침침한 자신의 열세 평 지하 전세방을 찾아와 똑똑, 창문을 두드릴 날이 있을 거란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았다.  
 

찻잔스토리텔링1.jpg

[2]

그는 청계천변 아홉 평짜리 작은 철공소로 출발해 직원들의 헌신 덕분에 큰돈을 번 부자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부자는 오래 전 그의 고용주이기도 했는데 십 년째 제자리인 월급 인상을 건의하는 창립멤버를 그 자리에서 곧바로 해고해버릴 만큼 결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몇 달 후 사장은 마지막 남은 창립멤버인 그에게도 권고사직을 통보해 왔다. 어느새 여덟 명으로 불어난 직원들 월급 때문에 경영상의 어려움이 커졌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회사 형편이 몹시 어려워 당장은 바로 퇴직금을 줄 수가 없네!” 무엇 때문인지 사장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게 십 년 동안 함께 고생한 자신을 끝까지 챙기지 못한 고용주의 자괴감 때문이라고 그는 애써 이해하려 애썼다.  

“돈이 생기면…” 하고 사장이 입을 열었다. “바로 자네 퇴직금부터 보내줄 테니까 얼마간 나한테 말미를 주길 바라네. 그 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나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그럼 대략 언제쯤으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행여 퇴직금 지급을 재촉했다간 돈 없는 고용주가 괜히 더 심각한 자괴감에 빠질까봐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기름이 번들거리는 사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장은 즉답 대신 자신도 정확한 입금 날짜는 약속할 수가 없노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자네를 실망시키게 될까봐 함부로 약속을 안 하는 거야!” 과연 사장은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사장이 다가와 축 처져 있는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십 년 동안 같이 일했으니 잘 알겠지만, 나는 직원들 퇴직금이나 떼먹는 악덕 사장들과는 다른 사람이야! 나만 믿고 좀 기다려봐.” 

[3]

살다 보니 내 돈 한 푼이 남의 돈 천 냥보다 중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일이 많다. 자기 주머니 안에 든 돈이 아니면 억만금이 소용없는 게 현실이었다. 모처럼 공짜표가 생겨 몇 년 만에 아내 생일날 함께 극장구경을 갔던 그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영화 장면에서 함부로 낄낄거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의 모든 걱정은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귀결된다. 돈 얘기만 나오면 그는 언제 어디서든 자동으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남편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건물 네 곳을 돌며 청소 일을 해야 한 달 수입이 200만 원에도 되지 않는 그의 아내도 ‘가오’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용케도 남들과 같은 타이밍에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결혼생활 십년 동안 그는 그 순간만큼 아내의 웃음소리가 슬프게 들린 적이 없었다. 

[4]

석 달 만에야 겨우 통화가 성사된 사장은 3초 이상 길게 이어진 한숨소리로 그간 전화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잖아도 오늘은 내가 꼭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미안하게 됐는데 엊그제까지 꼭 입금해준다던 거래처 사장들이 자금 사정 때문에 다음 달에 주겠다고 미뤄버려서 말이지! 오래 거래해온 입장이라 더 이상 보챌 수도 없으니 힘들더라도 자네가 조금만 더 기다려주길 바라네.” 사장은 돌려 말할 줄을 모르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꺼냈다. “꼭 주신다고 약속하셔서 기다렸는데….” 사장이 더듬거리는 그의 말을 뚝 잘랐다. “이 사람아, 그걸 내가 모르나? 자네 사정이야 나도 잘 알지!” 사장은 몇 마디 말만 듣고도 전 직원의 딱한 처지를 알아차릴 만큼 공감능력이 탁월했다.  

“형편이 그러시면 다만 얼마만이라도 우선….” 몇 달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수중에 돈도 가오도 남은 게 없다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그는 애써 억눌렀다. 지금 그에겐 가오야 어찌됐건 급한 돈부터 받아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장은 일에 바쁜 사람이었다. “글쎄, 내가 다 안다니까! 나도 말이야, 자네 퇴직금 문제만 생각하면 맘이 불편해서 도무지 잠이 안 오는 사람이야. 아무튼 거래처에서 다음 달엔 꼭 넣어준다고 약속했으니 자네도 날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줘야겠어.”  

“그럼 확실한 날짜만이라도…”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떨려 나왔다. 일주일 전 아내가 준 만 원짜리 두 장은 이제 동전 몇 닢만 남아 있었다. 사장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겨 전화를 끊어야 하는 상황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미안하네! 하루 종일 날 찾는 전화가 하도 많아서 말이지!”  

사장은 통화를 마치기 전 자신의 친동생에게만 해주었던 인생의 값진 충고를 그에게도 베풀어 주었다. “뭐든 느긋하게 참고 견딜 줄 아는 사람한테만 좋은 기회가 생기는 거야! 돈 생기면 제일 먼저 자네 돈부터 보내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내가 먼저 전화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찻잔스토리텔링2.jpg

[5]

살아 보니 돈이 제일 필요한 순간은 인생을 역전시킬만한 목돈이 아니라 당장 써야 할 몇 푼의 푼돈이 아쉬울 때란 걸 그는 좀 늦게 알았다. 그는 이럴 때 노동자에게 도움이 될 법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몰랐고, 설령 안다 해도 그게 자신을 위해 어떻게 작동될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에게 법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조언해주지 않았다. 

집주인에게서 전세금 천만 원을 올려달라는 전화를 받은 날, 그는 전 고용주에게 돈 받으러 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 그는 밀린 퇴직금을 받으러 전 고용주를 찾아가 있었다. 당구대처럼 넓은 책상 위에 반들반들 윤이 나는 구둣발을 척, 올리고 앉은 사장은 잔뜩 굳은 얼굴로 부족한 그의 인내심을 탓하고 있었다.  

“엉? 사람이 말이야, 왜 그리 참을성이 없는 거야? 거래처 대금 들어오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보내줄 텐데 그 사이를 못 참고 여기까지 찾아와 생떼를 쓰는 거야? 얼마 전에 우리 가게 이쪽으로 확장 이전했단 얘기는 또 누구한테 들었어? 아무튼 자네 보기보다 꽤 성질이 급한 사람이구만!”
사장의 호통소리에 놀라 눈이 번쩍 떠졌다. 막차를 타고 돌아와 허겁지겁 늦은 저녁을 먹고 있던 아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그를 보며 쯧쯧, 하고 혀를 찼다.

[6]

공장에서 2교대로 일하는 그의 귀가 시간은 요즘 거의 밤 열 시를 넘긴다. 그래도 매주 금요일 늦은 밤, 내 편의점에 들러 로또복권 다섯 장씩을 사갈 때마다 그는 생후 한 달 밖에 안 되는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고 간 미혼모 어머니를 떠올리며 간절한 기도를 잊지 않는다고 했다.
“보육원 선생님들의 보살핌 덕에 밥은 굶지 않았지만 퇴소할 나이가 되어 열일곱 나이에 세상에 혼자 나와 보니 돈이 있어야 구할 수 있는 행복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언감생심 몇 백 억은 바라지도 않고 딱 10억, 그것도 많다면 한 5억? 아니 1억도 괜찮지만 그것조차 욕심이라면 천만 원짜리 하나만이라도 당첨돼 봤으면 좋겠어요. 너무 큰 욕심일까요?”
 

찻잔스토리텔링3_GettyImages-jv11330892.jpg

사장은 뉴질랜드 이민 준비에 너무 바빠 끝내 그에게 퇴직금 보내는 걸 잊고 떠나버렸다. 사장에게 그렇게 취급받은 것처럼 그는 언젠가부터 제일 후순위 대접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럴수록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은 더 맹렬히 불타올랐다.
오늘도 로또복권 다섯 장을 받아드는 그의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행운을 가장한 불행이라도 좋으니, 이 빈약한 현실을 뒤엎어줄 특별한 순간이 언젠가 꼭 자신에게도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럼, 편의점 사장님도 오늘 밤 장사 잘 하시고요!”
마지막 남은 캔 커피 한 모금을 말끔히 비워버린 그가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네고는 비척비척 편의점을 나갔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