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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조선의 차 문화를 꽃피우다

김정희와 초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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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는 차 문화가 급속도로 쇠퇴하던 시기이다. 선승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우리 차 문화는 불교를 국교로 하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조선이 숭유억불이라는 이름으로 유교를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면서 차 문화는 불교문화와 함께 쇠퇴의 길을 걷는다. 불교의 퇴조가 조선 내부의 구조적 요인이었다면 중국의 차가 보급되는 길이 막힌 것은 외부 환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차의 수요가 줄면서 수입량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차 문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차 문화를 중흥시킨 인물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면서 차에 대한 인식과 수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이다. 이들이 차를 매개로 교유하면서 조선의 차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는 전기를 마련한다.

남달리 차를 사랑한 ‘승설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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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와 용인 태평양박물관에 봉안돼 있는 초의스님 진영.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김정희(1786~1856)는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사실인지 확인할 순 없지만 김정희에게는 출생에 관한 에피소드가 하나 전해진다. 이조판서 김노경과 부인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수태기간이 무려 24개월이나 되었다는 말이 있다. 보통 열 달을 채우고 출생하는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24개월이나 있었다는 것은 지금 보면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있다. 반드시 기형으로 태어날 거라고 믿었던 김정희가 바르게 태어나자 집안의 기쁨이 상당했을 것이다. 정희(正喜)라는 이름은 바르게 태어나 기쁘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까지 상당한 명성을 쌓았던 김정희에 대한 칭송이 부풀려지면서 후대에 만들어진 일종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읽으면 될 듯하다.

18세 되던 해인 1814년 김정희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관직에 진출한 것은 늦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조판서인 아버지의 사랑이 대단했다고 한다. 김노경은 어디를 가든지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은 후에 김정희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역할을 한다. 스무 살이 되는 해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김정희는 처음 중국 문물을 접하는 기회를 맞는다. 청나라에서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여러 인물들과 친분을 쌓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때 김정희는 청나라 연경에서 차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된다.

귀국한 김정희는 많은 지인들에게 차를 마시기를 권하면서 양반 사회에 차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조판서는 현재 행정안전부의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이다. 대대로 요직을 지낸 사대부가의 자손인 김정희가 차 문화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녔다는 것은 당대 주류사회에 차 문화가 보급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승설학인(勝雪學人)’이라고 부르며 지인들과 차를 나눠마셨다. 승설은 중국의 차 이름의 하나이다. 그 당시 조선에서 차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자신의 아호를 차 이름으로 할 정도로 김정희는 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인물이었다.

유배 떠난 벗에게 건넨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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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와 용인 태평양박물관에 봉안돼 있는 초의스님 진영.

김정희에게 차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은 그가 제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였다. 김정희와 동갑내기였던 초의선사와의 만남은 조선의 차 문화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장면이다. 초의선사와 김정희가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과 추사의 동생인 김명희의 역할이 컸다. 초의선사는 정약용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고 있었고 김명희와도 친분을 맺고 있어서 둘은 자연스럽게 친분을 나누었을 것이다.

초의선사(1786~1866)는 조선 후기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승려이다. 또한 우리 차 문화를 부흥시킨 인물로 훗날 사람들에게 다성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초의선사는 다도의 맥이 끊긴 조선 후기에 청나라의 차 문화 책인 <다경채요>를 재구성한 <다신전>을 써 차 문화를 보급하려 힘쓴다. 이 책 말미에 초의선사는 “전에는 승가에 조주풍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져 다도를 알고자 하는 이가 많아 췌록한다”라고 썼다. 그가 써 놓은 후기는 이 책의 발간 목적이 차 문화를 보급하려는 데 있음을 뚜렷이 드러낸다. 이후 초의선사는 1837년 우리나라의 차가 우수하다는 것을 기리는 <동다송>을 지어 중국의 차 문화를 추종했던 우리 차 문화에 ‘조선의 차’라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다.

오늘 아침 / 안개비 따라

봄마저 가버리고 / 너를 떠나 보내고

석양 하늘가를 / 쳐다보는데

꽃을 떨군 줄기는 / 앙상하게 남아있고

줄기에서 떨어진 꽃잎은 / 잠이 들었다

-초의선사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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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추사 김정희와 차를 통해 돈독한 우정을 쌓은 초의선사가 수도한 절이다. [저작자] by steve46814, wikipedia (CC BY-SA)

김정희는 이후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이어간다. 집 밖에도 나서지 못하는 정배에 처해진 김정희는 제주도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몹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때 한양에 있는 부인이 음식을 마련해 남편을 뒷바라지한 일화는 유명하다. 먹고 사는 것만이 문제가 된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김정희에게 차를 보내주면서 괴로움을 달랠 수 있게 한 사람이 바로 초의선사이다. 제주도 유배 직후까지 둘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가 50여 통에 이를 정도로 두 사람은 각별한 존재였다.

1840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동아시아에 걸쳐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던 김정희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갈 때 초의선사가 그를 배웅하면서 쓴 시이다. 억울하게 유배를 가야하는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과 각별한 정이 느껴진다. 유학자인 선비 김정희와 불교 승려 초의선사가 자신이 속해 있는 사상적 경계를 서로 허물며 얼마나 깊은 인간적 정을 나누었는지 알 수 있다.

유배 떠난 벗에게 건넨 차

“차를 만드는 시기인 행다(行茶)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과천정과 열수장으로 새로운 차를 보내더니 금년에는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워졌는데도 두륜산에 있는 납자(衲子, 승려)는 소식조차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몸에 병이라도 났단 말인가. 말(馬) 꼬리에 매달아 보낸 것이 도중에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유마송(석가의 제자인 유마가 지었다는 불경)에 열중해 계절 분간도 못하게 되었는가. 만약 더 지체하면 마조(馬祖, 불교에서 천상천모로 받드는 여신. 바다의 수호여신으로 불린다)의 갈(욕설)이나 덕산의 봉(몽둥이)으로 그 몹쓸 게으름을 징계하고 원인을 다스릴 터이니 이쯤에서 그대 깊이깊이 깨닫게나.”

과전청은 추사의 집이고 열수장은 한강변에 있던 다산 정약용의 거처이다. 차가 떨어지면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낼 것을 편지로 재촉했다. 둘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편지의 내용이 다시 보여준다. 최고의 가문에서 국제적 명성을 쌓은 학자 김정희의 언변이 여간 과격하지 않다. 때 맞춰 차를 보내지 않으면 욕설을 하겠다거나 몽둥이로 매찜질을 할 거란 ‘협박’은 둘의 관계뿐 아니라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차를 마시며 유배의 외로움을 털어냈을 것이라는 추측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18세기 조선의 차 문화가 부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두 사람의 인연은 우리 차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여러 글씨를 써서 차를 칭송한 김정희의 행적은 차를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한 획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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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전통 가옥. 추사는 제주 유배생활에서 초의선사가 때때로 챙겨준 차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랬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