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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차향(茶香)의 인연

정약용과 두 선승

“유생이 가야 할 길이 충의의 보국에 있다면 저와 같은 선승이 있어야 할 곳은 세속의 번뇌가 씻겨진 정토(淨土)에 있겠지요. 어른께서는 어찌해서 보국의 길을 뒤로 하시고 이 먼 곳에서 주역을 읽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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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삼십 대 초입에 들어선 백련사 주지가 합장을 하며 선비에게 통성명을 건넸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흥사 대강사를 지닌 혜장선사는 산 아랫마을 주막의 한 노인과 함께 백련사를 찾은 선비에게 이 곳 강진으로 오게 된 연유를 물었다. 부드러운 턱선에 유독 눈빛이 형형한 선비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승려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선비는 들꽃 냄새가 은은히 퍼지는 대웅전 앞마당을 천천히 눈을 들어 둘러보았다. “절집이 아늑한 산의 품에 안겨있어 봄빛이 여유롭게 머물다 가는군요. 좋은 곳에 암자터를 잡으셨습니다. 정배(定配)를 당해 내려온 정약용이라고 합니다.”

축이 빠진 낡은 짚신을 신고 손잡이를 갈대풀로 엮어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는 선비는 합장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른 봄이 풀어내는 맑은 향기에 까치 두어 마리가 흠향(欽香)을 하듯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혜장이 건네는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혜장이 입적할 때까지 6년을 이어가는 인연의 실마리를 처음 그렇게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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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초상화. 작자미상

혜장선사와 ‘보은산방’에서 차담을 나누다

1801년 한겨울의 추위가 뼛속까지 아리던 아침, 정약용은 우여곡절 끝에 참수형을 겨우 면하고 전라남도 강진을 향해 가는 뱃길에 몸을 싣는다.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천주교 포교의 원흉으로 몰린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정배에 처해진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건너가 이후 해양생물학 서적인 <자산어보>를 쓰게 된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을 왔으나 잠자리를 제공할 사람을 찾지 못해 주막집 노파가 내어 준 허름한 방 한 칸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한다. 5년을 그렇게 보낸 정약용은 바깥 출입이 자유로운 상황이 되자 봄날 백련사를 찾았다. 혜장은 이후 정약용을 스승으로 모시고 극진한 보살핌을 다한다. 정약용이 그해 겨울 혜장이 마련해 준 백련사의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며 두 사람은 나이를 넘어선 우정을 나누게 된다. 보은산방은 혜장과 정약용이 주역을 논하며 함께 차를 마시던 곳으로 조선에 차가 다시 등장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된다. 조선시대에 와서 쇠퇴 기미를 보이던 우리의 차 문화는 조선 중엽에 이르면 차 문화가 단절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부침이 심했다. 전해지는 그들의 에피소드는 두 사람이 차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밤이 깊었습니다만 주역의 뜻풀이는 끝이 없으니 시간이 아쉬울 뿐입니다. 어찌됐건 오늘 마신 차는 깊이 인상에 남아 많이 생각날 듯합니다.” 정약용이 혜장에게 돌아가야 할 시간을 아쉬워하며 건네 준 차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다. 유배 생활에 말벗이 되어 줄 뿐 아니라 주역과 차에 대해서도 서로 허심탄회한 동무를 얻었다는 생각에 정약용의 고마움과 아쉬움은 몇 번을 표현하고도 부족했다. “스님과 다시 차를 마실 수 있을까요?” 아쉽게 헤어지고서도 안타까움과 유배 생활의 고독에 자정까지 잠을 못 이루던 정약용의 거처로 누군가 찾아왔다. 혜장이었다. “말씀을 잊을 수 없어 삼경(三更)인데도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겠습니까?”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준 지기(知己)가 되어 뜨겁게 서로를 껴안았다. 정약용은 이때의 심정을 절구로 남겨 그 감흥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 정약용의 한시 중에서

 

정약용이 차를 얼마나 깊이 헤아리고 좋아했는지는 그의 호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의 귤동으로 처소를 옮겼을 때 그 마을 뒷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차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 이름은 그후 산자락에 초당을 짓고 생활을 시작하며 이름붙인 ‘다산초당’의 뜻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은 초당 뒷산의 이름이었던 다산을 아예 그의 아호로 삼았으며 그 후 해배되는 1818년 여름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다산’은 그의 차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아직까지도 그의 여러 아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1811년, 다산과 혜장이 만난 지 6년째 되던 해에 혜장은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열반에 든다. 다산과 만나면서 불가의 도를 깨면서까지 주역과 논어를 읽다가 다른 승려들의 미움을 받았던 혜장이 불쑥 입적을 한 것이다. 그의 세속 나이 마흔. 정약용이 처음 혜장을 만난 것이 마흔이었다. 불혹이라는 마흔 살을 경계로 그들은 조선의 차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만들고 차례로 영겁의 세계로 떠나간 셈이다. 혜장이 입적하던 날, 다산은 쉽게 보낼 수 없는 제자이면서 벗이었던 그를 위해 만시(輓詩)를 남긴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초의선사와의 만남, 조선 차 문화 꽃피우다

정약용이 거처를 옮긴 1809년에 초의선사가 다산을 찾아온다. 초의선사는 다성(茶聖)이라고 불리며 조선시대 차 문화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초의선사는 다산의 아들들과 교분이 두터워 교유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24살이었던 초의선사는 장문의 시를 지어 정약용에게 보낸다.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평소 흠모해오던 선생님의 뜻과 정신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불초한 승가의 일원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받들기를 청합니다. 선생님의 학문이 사람들을 깨울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재가를 청하는 바입니다.”

초의선사와 다산이 함께 교유한 것은 약 9년쯤 되는 기간이다. 초의선사는 다산에게서 시와 경서를 배우며 학문과 정신의 깊이를 여는 길을 놓게 된다. 아쉬운 것은 초의선사에 대한 기록이 다산이 남긴 문헌에서는 많이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차에 대해 남긴 공헌은 상당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초의선사로부터 조선의 다도문화가 이론화를 거쳤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하동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초의다선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조선 후기의 대선사이자 한국 다도의 중흥조인 다성(茶聖) 초의선사는 서기 1786년(정조 10년) 4월 5일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속성은 안동 장씨이고 이름은 의순, 자는 중부이다. 초의는 그의 법호이며 그 밖에 해옹, 해노사, 자우산방, 휴암병선, 자하도인, 우사, 해상야질인, 일지암이라고 하였으며, 현종으로부터 대각등계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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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 전경. 다산초당과는 도보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초의선사는 마흔셋 되던 해에 <다신전(茶神傳)>을 썼고, 쉰둘에는 <동다송(東茶頌)>을 쓰는 등 조선 시대 차 문화의 이론과 실제를 정립한 인물이다. 후에는 추사 김정희와 특별한 교분을 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이들을 처음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인물들이 정약용의 아들들이다. 초의선사가 제주도에 유배가 있는 김정희에게 당대 최고 화가였던 소치 허유를 통해 직접 법제한 차를 보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조선의 차 문화가 혜장선사와 교유한 정약용을 거쳐 후대의 초의선사를 통해 꽃 피우는 이 시기는 우리가 지금 차 문화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818년 정약용의 유배가 풀리는 그 해, 제자들은 스승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다신계(茶信契)’를 만든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남긴 훈도는 오늘의 차 문화를 생각할 때 더 깊이 새겨지는 구절이다. 한 평생 치열한 삶을 살다간 다산에게 차는 인간의 정신을 깊이하고 혼을 맑게 하는 평생의 스승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산이 남긴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준다.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음다흥 음다망 飮茶興 飮酒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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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