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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기행] 비체린 Bicerin

커피, 초콜릿, 우유…3색의 하모니

[음료기행] 비체린 Bice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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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체린은 이태리 북서부에 위치한 피에몬테의 주도(州都)인 토리노의 전통 음료입니다. 강렬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초콜릿, 여기에 부드러운 우유를 넣어 만듭니다. 초콜릿이 가장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에스프레소, 우유 거품이 층을 이룹니다. 진갈색, 연갈색, 흰색의 3색 띠가 잘 어울립니다. 그 자체로 훌륭한 문양입니다. 
완성된 비체린을 섞어 마셔도 좋지만, 3색의 맛을 음미해보고 싶다면 섞지 않고 그대로 마시길 추천합니다. 우유와 에스프레소가 섞이면서 입술과 닿고, 이어 달콤한 초콜릿이 목을 타고 넘어갑니다. 부드럽게 쌉쌀하게 달콤하게…

언제부터 비체린이 등장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17세기부터라는 설도 있고, 1763년 오픈한 알 비체린(Al Bicerin)이라는 카페에서 19세기에 이를 처음 선보인 이후 널리 알려졌다는 설도 있죠. 어찌되었든 비체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초콜릿이고, 여기서 토리노의 또 다른 명물 ‘잔두야(gianduia)’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초콜릿을 토리노에 전한 건 사보이 공국의 엘마누엘레 릴리베르토 공작이었답니다. 그가 1559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카카오를 가져온 거죠. 토리노 중심가 산 카를로 광장의 한 가운데 서있는 게 바로 엘마누엘레 릴리베르토 공작의 기마상입니다. 
잔두야는 초콜릿과 헤이즐넛의 반죽을 뜻합니다. 비싼 카카오의 양을 줄이고 헤이즐넛 반죽을 섞은 거죠. 잔두야가 등장한 것은 1800년 대 초였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내린 대륙봉쇄령 탓에 카카오 가격이 급등하자 궁여지책으로 만든 게 잔두야였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지요. 그 궁함이 오히려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 거죠. 이후 잔두야는 1865년 경 ‘잔두이오토(gianduiotto)’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변신합니다. 

<삼총사>의 뒤마, <춘희>의 뒤마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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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몽테크리스토백작> 등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는 비체린을 극찬했다.

비체린의 유명세는 <삼총사>, <몽테크리스토백작> 등을 쓴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한 마디 덕에 더해졌다고 합니다. 1852년 경 토리노를 방문한 뒤마가 비체린을 마시고 극찬했다고 하죠. 당시 뒤마는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높았던 작가였습니다. 그의 소설은 흥미진진했고, 상당수가 현대에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앞의 두 작품을 포함해 <여왕마고>, <철가면> 등이 영화로 만들어졌어요. 비체린 덕이었는지 몰라도, 이후 뒤마는 이태리로 건너와 1860년부터 4년 동안 이태리 통일운동을 주도한 가리발디를 돕기도 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였지만 뒤마의 만년은 쓸쓸했습니다. 낭비벽, 여성편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당시 프랑스인과 다릅니다. 그는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의 자식이었고, 혼혈인의 정체성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타이티 섬에서, 프랑스 남자 귀족과 아프리카 여자의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게 뒤마의 아버지였습니다. 사생아였죠. 
그의 피를 물려받은 뒤마. 갈색 피부, 곱슬머리의 뒤마는 ‘남과 다른 것’에 대해 분풀이를 하듯 엄청난 양의 소설을 씁니다. 경제적으로도 성공해 작품제목과 같은 ‘몽테크리스토’라는 성을 짓고 살며 자주 파티도 열었지만, 정작 자신은 원고마감에 쫓겨 서재를 못 벋어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씁쓸하네요. 
씁쓸함은 이어집니다. 그도 사생아를 낳았으니까요. 그 아들이 바로 <춘희>로 유명한 뒤마 피스입니다. 그는 어려서 사생아라는 낙인 탓에 또래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랑도 비극적이었죠. 연인이자 창녀였던 마리 뒤프레시가 죽자 그녀와의 사랑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춘희>입니다. 이 작품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해방 이후 외국 오페라로는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것도 바로 이 작품이죠. 
아이러니하게도 혼혈이라는 낙인, 사생아라는 낙인은 고전을 낳게 한 자양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주류에 속하지 못한 변방인으로서의 한계를 소설에서 풀어놓았던 거죠. 그들은 장벽을 넘는 꿈을 꾸며,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나름의 복수를 한 셈입니다. 
유리잔에 담긴 비체린을 바라봅니다. 어찌 보면 3색의 띠가 서로 넘어설 수 없는 경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섞임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비체린의 맛과 미학일 거라 생각합니다.  

비체린의 도시, 토리노 이야기를 해보죠. 토리노는 알프스 산맥 아래쪽에 있습니다. 2006년 동계올림픽이 열려 널리 알려졌지요. 사실 토리노는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점령한 적이 있고, 1861년부터 1865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건물이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입니다. 1889년에 완공되었고, 높이가 167m에 달합니다. 지금은 토리노 영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토리노 동계올림픽의 로고가 이 건물을 차용해서 만들었다는군요. 

 

영화 <애프터 미드나잇>, 부드럽고 씁쓸하고 달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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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를 무대로 한 영화 <애프터 미드나잇> 포스터

이 건물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애프터 미드나잇>입니다. 다비드 페라리오 감독이 2004년 개봉한 이 영화는 3색의 비체린처럼 부드럽고 씁쓸하고 달콤합니다. 아만다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밤늦도록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낮에는 대출 안내 전단을 돌리죠. 성실하게 일을 하는데도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그나마 있는 애인마저도 그녀를 따돌리기 일쑤입니다. 애인과 통화라도 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련만 좀처럼 통화하기 힘듭니다. 
어느 날 일을 끝낼 무렵 아만다는 매장 매니저와 다투고, 그만 그의 다리에 감자튀김 기름을 붓고 도망칩니다. 그녀는 가게 근처 영화박물관 입구에서 마르티노를 마주치고,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런데 아만다는 그에게 화풀이하듯 내뱉습니다. “난 되는 게 없어.” 

영화박물관 야간경비원인 마르티노는 묵묵히 여자의 요구를 다 들어줍니다. 그저 “괜찮다”는 말만 할 뿐. 마르티노는 그녀를 자신의 옥탑방에서 지내게 하죠. 그는 눈 아래 펼쳐진 도시를 가리키며 ‘피보나치 수열(Fibonacci sequence)’을 설명합니다. 피보나치 수열은 앞의 두 숫자의 합이 다음 항의 값이 되는 수열을 말한다. n항과 n+1항의 비율을 1:1.618이며, 이를 황금비율이라고 하죠. 나뭇가지의 수, 줄기에서 잎이 나와 배열되는 방식, 피아노 건반 등 자연현상이나 사물에서 이 수열의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마르티노는 말합니다. “저 수열처럼 세상에는 뭔가 의미가 있다.” 
마르티노는 애지중지하는 구식 카메라로 만든 영화를 아만다에게 보여줍니다. 옛날 무성영화처럼 대사도 없고 음악도 없지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 리얼리즘 영화의 시작이라고 일컫는 <열차의 도착(The Arrival of a Train)> 같은 영화였죠. ‘기다림’이라는 자막이 나오고 아만다가 등장합니다. 그녀를 짝사랑한 마르티노가 몰래 찍은 거죠. 가게에서 일하는 모습,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 등 아만다의 일상이 담겨있습니다.  

아만다는 차 절도범이면서 바람둥이인 애인 엔젤과 마르티노를 사이에 두고 갈등합니다. 그러다 둘 다 포기하지 않기로 하죠. 이건 뭔 시추에이션인가요? 그게 가능할까요? 내레이션이 이어집니다. 
“하나가 행복하려면 다른 하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이것이 감정의 공식이다. 끊임없이 잃고 얻지만 전체의 합은 항상 같다. 계속해서 대상만 바뀔 뿐이다.” 
이것은 피보나치 수열과 다른 의미를 전달합니다. 사람의 감정은 커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과연 피보나치 수열처럼 커지기만 하는 감정이 있을까요. 둘의 감정이 모두 커지는 순간 연인이 되지만, 일정한 양이 채워지고 나면 불균형 상태가 됩니다. 한쪽의 감정은 커지고, 다른 쪽은 작아지고. 밀고 당기기이죠. 

‘밀당’은 피곤한 것이라며 고개를 절래 흔들겠지만, 남녀 관계뿐 아니라 세상 일이 밀당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밀당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 상대방에게 나를 닮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전제되어야 어느 순간 서로의 감정이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전체의 합은 같겠지만 총량은 늘어나 있지 않을까요. 그걸 성숙함이라고 하죠.  
이 영화는 토리노의 전통음료 비체린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비체린의 모양과 오버랩됩니다. 균형을 맞춘 3색 띠의 모양은 아만다, 마르티노, 엔젤 세 사람의 ‘삼각 연예’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 짜증난다고요? 그렇게만 보이나요? 비체린 한 잔 하시며 곰곰이 생각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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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체린의 고장, 토리노의 랜드마크인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