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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다른 상상의 공간, 헤테로토피아

당신의 아지트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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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비언>(2013)은 ‘지구 최후의 날’을 모티프로 한 SF영화입니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연출을 맡아 화려한 비행 액션이 볼만했습니다. 코신스키 감독은 이후 <탑건 : 매버릭>(2022)을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60년 전 외계인의 침공으로 지구는 파괴되고, 대부분의 인류가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으로 이주한 상황을 그립니다. 지구에 홀로 남은 마지막 정찰병인 잭 하퍼(톰 크루즈)는 60년 전 실종된 오디세이호의 생존자인 줄리아(올가 쿠릴랜코)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지구 파괴를 둘러싼 음모를 파헤칩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파괴된 지구에서 잭 하퍼가 유일하게 안식처로 느끼는 오두막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첨단의 문명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주인공이 휴식을 취하는 자연 속의 오두막 한 채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지구가 파괴되기 전의 자연환경을 떠올리게 하고, 영화 전체를 통해 인류의 근원적인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지구 침공 세력들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왜곡 당한 채 살아가던 주인공이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오두막은 상징성이 강한 공간입니다. 과학 문명의 최정점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에는 버릴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짧은 순간이지만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제목 ‘Oblivion’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 즉 망각을 뜻합니다. 물길이 흘러 아무리 큰 바다를 이루더라도 그 시작은 작은 물방울 하나이었듯이, 첨단 문명의 시원(始原)에도 망각할 수 없는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과학 문명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질적이지만 담백하게 표현되는 오두막은 진정한 안식처가 되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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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적 효율을 추구한 근대

‘살아간다’라는 행위에는 시간과 공간의 얽힘과 연속이 필수적으로 전제됩니다. 공간 위에서 시간을 엮어가는 것인지, 시간의 축 위에 공간이 얽혀있는지는 너무 어려운 철학과 물리학의 영역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과정에서 씨줄과 날줄이 된다는 사실이죠. 서양의 근대성은 시간을 지배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서구의 합리성이 그토록 집요하게 밝히려 했던 인과성이야말로 시간의 핵심 개념입니다. 많은 사상가와 과학자들이 시간적 연속성을 바탕으로 인과성에 주목했던 이유이기도 하지요.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제어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확고한 그들의 믿음은 한편으로는 정확히 들어맞았고, 한편으로는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도 가져왔지요.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과학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계몽에서 시작한 서구 근대 철학은 분명 빛나는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반면, 시간을 기반으로 한 합리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사고 체계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를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체제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시간성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 현상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자각이 생기면서 근대라는 진보의 수레바퀴는 잠시 멈춰 서게 되죠. 이른바 현대의 ‘비판 철학’이 등장하게 된 계기는 어찌 보면 시간성에만 주목했던 서구 문명의 불균형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반성이 가져다준 결과물이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습니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 미셀 푸코

효율성을 추구하던 근대는 시간에 대한 탐구와 통제가 더욱 중요했지요.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신속해야 했고, 속도가 필요했으며 고효율의 성과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지배하는 동안 공간은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회는 더욱 복잡해졌으며, 사회의 근간이 되는 다양성과 차별성을 시간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불확실성에 대해서 인과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기 시작했지요.  

공간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이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984)입니다. 푸코는 인간의 삶을 연결하는 ‘관계’에 주목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시간성을 따라 전개되는 삶의 거대한 흐름보다는 공간들이 연결해 주는 그물망 같은 관계의 집합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해의 테두리 안에서 현대인들의 삶이 노정하는 복잡함과 병렬성, 분산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공간을 삶의 ‘배치’라는 관점으로 접근했습니다. 공간을 단순한 지대나 구역이 아니라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의 원동력으로 인식한 것이죠. 그는 개별 공간의 독립성보다는 주변 공간과 맺는 관계인 배치에 의해 현대 사회를 규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거리라는 공간에 도로라는 공간이 놓이고, 정류장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도시가 배치된다고 말합니다. 각각의 공간이 맺는 공간적 관계망을 이해할 때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

푸코가 현대 사회의 공간성에 보인 관심은 어떤 철학자보다도 특별합니다. 나아가 공간에 대한 그의 인식과 천착은 탁월합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eremy Bentham : 1748~1832)이 처음 사용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Panopticon)’의 개념을 현대의 규율과 감시사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했던 인물이 바로 푸코였습니다. 그는 공간적 관계망인 다양한 ‘배치’들 중에서도 유토피아(Utopia)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에 특히 주목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두 공간은 다른 배치들과 연결되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든 배치들과 어긋나는 특성을 지닙니다.  

푸코는 유토피아를 실제로 공간이 없는 배치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공간이라고 규정합니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1516년에 발표한 소설 <유토피아>에 처음 소개된 이 단어는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흔히 ‘이상향’으로 번역됩니다.
누구나 지향하는 공간이지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말 그대로 이상적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푸코는 완벽한 이상적 사회 체제가 정립된 곳이 유토피아이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현실 사회에 완전히 대립하는 사회가 유토피아라고 언급합니다. 달리 말하면 유토피아가 이상적 사회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현실이 지닌 필연적인 결핍으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곳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하는 곳으로도 보았죠.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이상적 공간에 대한 동경과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유토피아가 ‘없는 곳’이면서도 지향성을 표현하는 공간이라면 조지 오웰(George Orwell : 1903~1950)이 소설 <1984>에서 그린 디스토피아(Distopia)는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감정과 희망 등의 인간적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실낙원(失樂園)입니다. 현대 사회의 온갖 부정적 측면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의 집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상향이든 실낙원이든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근원적 성격을 파악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이해한다면 공간성에 대한 관심은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중요한 측면이 됩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모두 공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비현실적 의미를 지니는 곳입니다. 

푸코는 이상향과 실낙원 사이에 실재하는 현실의 공간을 찾아냅니다. 그가 제시한 공간이 바로 헤테로토피아입니다. 헤테로(Hetero)는 서로 다른, 이질적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이질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죠.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모든 문화에 존재하고 실재하는 공간적 배치라고 설명합니다.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와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어디든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유토피아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적 세계를 구현하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다만 푸코는 이 두 관계는 공간의 있고 없음을 따지는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투사되는 상호성을 갖는 관계라고 보았죠.  

푸코가 제시한 헤테로토피아의 핵심 개념은 ‘반(反) 배치’의 의미입니다. 질서정연한 일상에서 구현된 공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한 사회가 구축한 정상적인 공간적 관계에 균열을 일으켜 일상의 인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간이라고 개념화합니다. 규율과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며 저항적 의미를 갖는 곳이 헤테로토피아인 것이죠. 헤테로토피아를 ‘상상력이 공간으로 표현되는 모든 곳’이라고 표현하면 과장일까요. 일상적 공간의 바깥이면서 안이 될 수 있는, 경계이면서 공간인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죠.  

‘비효율적인 곳’의 쓸모

이러한 이의 제기는 두 가지 양상으로 구현됩니다. 첫째, 현실의 환상성을 고발하는, 새로운 환상을 드러내는 공간을 만들어 냄으로써 지금의 현실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죠. 화려한 놀이공원이 가지는 판타지와 환상은 현실에 실재하지만 사실은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몇 시간을 환상적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그 공간을 나오는 순간 신기루는 사라지고 현실은 누추한 일상이 됩니다. 일상에 지치고 피로감을 느낄 때 찾아드는 자그마한 텐트 속이나 마당에 있던 작은 창고와 다락방은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실제 존재하는 곳이죠. 서울 도심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한옥의 오래된 옛집 지붕으로 이어진 카페들은 단순히 복고풍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간의 근원성, 즉 헤테로토피아의 특성을 잘 구현해 내는 것이죠.  

유토피아적 꿈을 꿀 수 있는 곳, 이를테면 흔히 ‘아지트’라고 부르는 공간이 헤테로토피아일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효율성과 질서에서 조금 비껴나 있지만 근원적 공간의 안락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곳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누군가 ‘이 좋고 비싼 공간을 왜 이렇게 놀리고 있지?’라는 의문을 가진다면, 그때의 공간은 자본의 가치와 지배 질서의 논리로 볼 때 ‘돈도 안 되고, 비효율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헤테로토피아적 시각으로 본다면 그 공간이 주는 안락함이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근원적 재미와 평화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헤테로토피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에 대해 성찰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완벽한 질서가 구현된 공간을 만들어 냄으로써 현실의 공간이 얼마나 무질서한 상태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이를 통해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죠.
푸코가 제시한 대표적인 공간이 정원(庭園)입니다. 서울 한 복판에 있는 고궁을 떠올려 보시면 사람들의 왜 그곳을 찾는지 이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적 공간이면서 일상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 바로 헤테로토피아입니다. 푸코는 일상의 모든 공간에 존재하지만 현실의 유토피아로 여겨질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서로 관련성이 없어 보이지만 현실에 균열을 내면서 일상의 공간에 이의를 제기하는 곳들을 묶어 표현한 거죠. 영화 <오블리비언>에 나오는 오두막은 푸코가 제시한 대표적인 정원이지요.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환상을 창출함으로써 과학 문명의 삭막하지만 완전해 보이는 세계가 얼마나 인공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오두막이라는 공간은 자연성을 완전히 드러내며 헤테로토피아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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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얼굴, 실재하거나 하지 않거나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는 반대되는 개념의 공간이 아닙니다. 실제 존재하는 공간이면서 현실에서 결핍되어 느끼지 못한 근원적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곳이라면 헤테로토피아가 될 수 있습니다. 푸코는 거울의 속성을 빌려와 이 두 공간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볼까요. 자, 여기에 전신거울이 하나 있습니다. 슬픈 일을 겪은 영희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며 거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희가 거울을 볼 때 거울은 영희가 없는 곳에서 영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거울 속에는 영희가 있지만 거울 속의 영희는 실재의 영희가 투사된 그림자에 불과하죠. 다시 말해 거울은 영희에게 거울 속의 영희를 바라보게 하는 가시성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바볼 수 있게 해주죠.  

그런데 그 거울 안에는 영희가 실제로 없습니다. 그림자일 뿐이죠. 이런 설정은 거울이 영희에게 잠시나마 유토피아가 되게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거울은 동시에 헤테로토피아가 되기도 합니다. 거울 속의 비실재적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실재하는 ‘영희’가 배치된다는 점에서 거울은 헤테로토피아가 됩니다. 푸코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실재하는 영희와 거울에 비친 영희를 통해 헤테로토피아와 유토피아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가 반영된 장소가 유토피아이면서 유토피아가 실재하는 곳이 헤테로토피아가 됩니다.  

공간에 대한 다른 상상

푸코가 생전에 아이디어로 제시했던 헤테로토피아는 비록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있지만, 그의 통찰은 많은 영감을 주면서 동시에 우리를 반성하게 합니다. 헤테로토피아가 제시하는 비일상적 균열은 현대 사회와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건축이 단순히 도시를 설계하는 공학에 그치지 않고 공간에 대한 잠재의식을 깨우기를 희망하고, 문학과 예술이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대인들의 삶에 공간이라는 개념을 확장하는 데 창조적 동기와 자극을 줍니다.
공간을 자본의 개념으로만 바라보는 인식 속에 머물게 되면, 공간은 평당 얼마짜리 거래의 개념으로만 남겠지요. 또는 기능에 적합한 정도를 따지며 효율성의 영역에 머물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공간을 자본의 가치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비난할 순 없습니다. 다만 공간의 공공성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혁신파크>는 인근 주민들의 ‘정원’으로 휴식과 산책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서울시의 개발 공약에 따라 머지않아 공원은 사라지고 마천루가 들어서는 공간으로 바뀌겠지요. 개발의 이름으로 자본의 유토피아가 성사될 수 있겠지만 헤테로토피아로서의 공간 하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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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
[인문학카페] 다른 상상의 공간, 헤테로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