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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기존의 생각을 ‘생각’하라

세상 곳곳에서 변화를 외칩니다. 근본적인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이 힘든 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네요. “경제 불확실성이 사라지기를 기대하기보다 변화한 경제 환경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체제에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하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다는 뜻일 텐데요. 요즘 어떤 말보다 많이 회자되는 것이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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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변한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용어는 미국의 과학사학자인 토마스 쿤이 1962년 출간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 언급한 말입니다. 이 책에서 쿤은 “현상이나 사물을 이해하는, 독특한 규칙이나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과학사에서 나타난 여러 혁명적 인식의 전환이 있겠지만 저자가 밝힌 대표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은 물리학에서의 사고 전환일겁니다.
뉴턴과학이 과학의 절대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는 시공간은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뉴턴 물리학이 이른바 ‘정상과학’이었습니다. 그러다 몇 가지 과학적 오류가 해결되지 않은 채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은 왜곡될 수 있다는 이론을 통해 해결되지 않던 현상을 증명하면서 일반상대성이론이 정상과학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를 저자는 ‘인식체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고 설명하면서, 모든 것은 변화가능하다는 전제 속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드러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질적, 양적 수준에서 전방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사를 설명하는 책에서 처음 언급된 말이지만 패러다임은 사회의 모든 곳을 설명하는데 필수어휘가 된 셈이지요. 심지어는 사람의 정신이나 습관의 변화를 얘기할 때도 이제 이 단어는 빠지지 않습니다. 식사습관의 패러다임을 바꿔라. 주거공간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라 등 일일이 언급하기에 지면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예전 삼성전자가 사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 내용이 한때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홍보실에서 주최한 공모의 주제는 ‘실패한 경험을 공모합니다’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회사는 ‘실패도 교훈이다. 널리 공유하자’라는 역발상을 공모전을 통해 직원들이 고정관념을 깨려고 했던 셈이죠. 실패를 경영의 주요한 자산으로 인식하고, 그동안 부처별로 쉬쉬하던 실패의 경험담을 공유함으로써 경영 혁신의 밑거름으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실패가 결코 부끄럽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공모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사례로 언급됩니다.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을 과감히 깨뜨린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죠. 

고려와 조선의 극명한 차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현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극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순간이 있습니다. 고려는 알려져 있다시피 불교를 지배체제의 근본 사상으로 한 나라였습니다. 집권층은 불교를 내세워 당대 민중들에게 내세적 세계관을 불어넣으며 귀족중심의 집권체제를 완성해나갔죠. 내세적 세계관이라는 게 달리 말하면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은 다음 삶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의 불편함은 어떻게든 참아내고 덕과 자비를 쌓아 다음 생에서 더 나은 삶을 살 것을 주문하는 거지요. 불교 사상을 지배층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흥미로운 건 조선이 건국하면서 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바꿀까 하는 점인데요. 역성혁명이 성공하고 이성계의 용비어천가가 울려퍼질 때, 정도전은 당대 민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유교사상, 즉 주자학이었습니다. 새로운 권력을 창출한 신진사대부들이 볼 때 이 사상의 가장 큰 매력은 현세적 세계에 ‘올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민중들에게 지금 고생해서 지금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심어주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이 아니었을까요.
고려의 지배 계급이 말한 ‘다음 생에서 잘 살자’라는 정치적 슬로건 보다 ‘열심히 일해 이번 삶에서 잘 살자’가 민중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말입니다. 고려 말의 부패한 지배계층과 계속되는 몽고의 침입 속에서 유교는 민중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매력적인 새로운 왕조의 이념이 됐을 겁니다. 이 정권교체기가 우리 사상사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럽 청교도 정신이 끼진 영향

시선을 유럽으로 돌려보죠. 어쩌면 미국이 탄생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중세를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은 몇 가지 내부 변혁을 거치면서 개신교로 분화가 되는데요. 개신교 삶의 지향을 제시했던 프로테스탄티즘, 즉 청교도 정신은 당대 유럽인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변혁의 기틀을 마련해줍니다. 청교도 정신의 두 기둥, 즉 천직(天職) 개념과 합리적인 영리활동의 추구는 근대 자본주의가 탄생하게 되는 제 1원동력이 되는 거지요. 기존의 가톨릭은 귀족과 봉건영주를 위해 노동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라고만 민중들을 설득하고 억압했었으니까요.  

그러던 유럽의 상황은 청교도의 등장으로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새로운 사상을 가진 시민계급과 빈곤에 시달리던 하층민들은 삶의 돌파구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를 서두릅니다. ‘아메리카 드림’이 시작된 거지요. 열심히 일 한 만큼 돈을 벌 수 있고, 이 돈을 교회(가톨릭)에 내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화할 수 있다는 것. 미국은 그렇게 꿈을 찾아온 여러 민족들이 삶의 패러다임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전환한 경우는 아닐까요. 소수자가 지배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흑인 소수자에서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나 소수 종교인 모르몬교도 출신인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 모두 토마스 쿤의 말을 빌리자면 새롭게 ‘정상과학’이 된 사람들이니까요. 

우리 일상에도 패러다임 전환의 흔적은 뚜렷합니다. 1990년대 유선 전화에 모뎀을 연결해 통신을 시작했던 의사소통의 변화는 그 이전에 비해 획기적이었죠. 편지와 전화가 통신수단의 전부였던 시절에 PC통신은 그야말로 신기원이었습니다. 그러다 이메일이 나오고 인터넷 메신저를 사용하다 현재는 스마트폰이 통신혁명을 이어가고 있지요. 급기야 ‘ChatGPT’로 상징되는 생성형 AI시대에 진입했습니다.  

바뀌지 않는 것과 바꿔야 하는 것

시대가 요구하고 우리 내면의 욕망을 이뤄내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점에서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의 구조가 급속히 바뀔 때, 무엇을 생각하고 준비할 것인가도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니까요. 구조가 바뀌어도 주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떨리던 손으로 꾹꾹 눌러 쓰던 일기와 편지를 이제는 카페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편지를 보내고 메모장에 옮겨놓더라도 ‘나’는 바뀌지 않고 ‘너’도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요.
우리 삶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사회의 변혁은 우리를 한 개인으로 머물러 있지 않게 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순기능만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세 가지 변화는 우리가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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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 가운데 우선 인터넷 혁명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나 접속이 가능한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준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통신혁명을 말해야겠지요. 정착민의 삶이 현대 문명을 이룩했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의미에서 유목민이 되어야합니다. 스마트폰 하나 들고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혁명입니다. 우리의 흔적은 이제 어디서나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죽더라도, 살면서 거쳐 간 모든 웹사이트에는 우리의 흔적이 남아있게 되겠죠. 정보의 자연적 소멸이 불가능하다는, 어쩌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이 기괴한 체험과 인식은 분명 우리에게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확실히 요구합니다. 어떤 이는 융합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통섭이라고 말하는, 이 통합의 시대에 삶의 흔적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제가 들었던 일화 하나를 전합니다. 외국 어느 기업에서 출제한 문제라고 합니다. 유일하게 출제자가 원하는 답을 한 명의 지원자가 적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패러다임의 전환이 별건가요. 발상을 한 번 바꿔보십시오. 잠시 생각하시고 답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Q :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길을 당신 혼자서 운전하고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길거리에서 세 사람을 만납니다. 당신은 과연 누구를 태울까요? 단 당신이 탄 차는 딱 두 명만이 탈 수 있는 차량이라는 조건입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노인 2. 과거 당신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의사 3. 당신이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
 

자, 결정하셨나요. 정답을 적은 지원자의 답안은 이랬답니다.
“제가 만일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차에서 내려 차 키를 의사에게 주고 노인을 병원으로 데려가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를 보호하면서 우리를 구조할 다음 차를 그녀와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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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