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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성장소설로 되돌아본 ‘성장’

항아리에 갇힌 소년과 조숙한 소녀의 세상 대처법

오랜 지인들의 모임에서 뜻밖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십 대들에게 읽힐 만한 청소년소설을 추천해달라는 거였습니다. 딱히 전문가도 아닌 입장이라 시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어느 대학 청소년 추천도서’를 언급했더니 극구 사양하더군요.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도를 기준으로 꼽아 달라는 말이 이어졌죠.
잠시 생각하다 거꾸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청소년소설이라는 것이 청소년을 독자로 쓴 소설을 의미하는지,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을 말하는지 구분해달라고 말이죠. 회원들의 답변이 딱 반으로 갈리더군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는 청소년소설을 넘어 성장소설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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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소설과 성장소설

수요가 늘면 시장은 상품을 공급할 테고, 출판 시장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시장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밑바탕에는 물론 입시 제도가 버티고 있겠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시장 흐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청소년 문학상>만 대략 살펴봐도 성인들의 출판 시장에 비해 결코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창비청소년문학상(창작과비평사),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문학동네), 청소년문학(문학사상사), 사계절청소년문학상(사계절출판사), 블루픽션상(비룡소), 푸른문학상(푸른책들) 등이 대표적입니다. 아울러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학잡지들도 꾸준히 발간되고 있습니다. <푸른작가>(민족문학작가회의), <풋>(문학동네), <청소년문학>(전국국어교사모임 주관), <문학 我>(문학과 경계), <푸른글터>(부산), <쌍띠에르>(광주) 등이 있죠.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하기 이전에 있는, 미성숙 상태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공통부분이 있지만 청소년 소설은 성장소설과 구분됩니다. 성장소설은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을 소설적 시간으로 설정합니다. 주인공이 겪는 내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이 서사의 뼈대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물의 갈등 대부분은 어른들이 이미 구축한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편입할지를 두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각성이 인물을 성장시키는 구성을 가지게 되죠. 청소년소설은 청소년을 위해, 청소년에 대해 쓴 소설입니다. 청소년들의 삶, 경험, 열망,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다루죠. 청소년들이 치중하는 과제뿐만 아니라, 주요 예상 독자로서 청소년이 설정됩니다.
또한 서술 시간의 경우 성장소설이 유년의 경험을 회상하는 어른의 시점에서 제시되는 반면, 청소년 소설은 자신들의 세계를 탐구하는 청소년 작중인물의 관점을 재현한다는 점입니다. 즉 성장소설은 유년을 기억하는 어른으로 성장한 인물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을 다루는 회상 시점인데 반해, 청소년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청소년의 당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죠.  

눈사람에 감춘 두려움,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의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성장소설의 재미와 여운을 함께 보여주는 수작입니다.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등진 작가가 모두 피우지 못한 소설적 저력을 생각하면 그 이후의 작품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쉽기만 합니다. 등단작인 <쥐잡기>부터 성장소설의 성격을 보여준 작가의 작품 목록 중에서 이 소설은 특히 아름답습니다. 문학을 이야기할 상황이 되면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는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갑자기 닥친 한파에 보일러를 수리할 비용을 보내달라는 세입자의 연락이 나에게 옵니다. 수리비를 핑계 삼아 어린 시절 살던 미아리 집을 찾아가는 중 아홉 가구가 모여 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어느 겨울밤, 주인공 ‘나’는 오줌이 마려워 새벽에 변소를 다녀오죠. 어두컴컴한 가운데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무섭기로 유명한 욕쟁이 할머니의 짠지가 들어 있는 항아리를 깨뜨려 버립니다. 혼이 날 것을 두려워 눈사람을 만들어 깨진 항아리를 감추고는 가출을 감행합니다. 하루 종일 바깥을 쏘다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예상과는 달리 어른들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는 당혹감에 울어 버리고 이 세계가 너무 낯설고 당혹스러워 어딘가를 향해 가슴이 터지라고 달립니다.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는 미아리 산동네의 빈집에서 절반쯤 깨진 큼직한 항아리를 보면서 어른이 된 나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지탱해주던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슬픔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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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성장소설의 구성을 교과서적으로 보여줍니다. 흔히 ‘입사식(入社式, Initiation)’으로 부르는, 어른의 세계로 입문하는 어린아이의 성장 스토리가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대다수의 성장소설은 세계의 입문 과정에서 인물이 내면적 갈등을 느끼며 갈등의 이유를 제공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성찰하게 됩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각성은 아이를 성장시키고 자신이 들어서야 할 세상의 한 꺼풀을 스스로 벗겨냄으로써 삶의 비의(秘意)를 눈치 채게 되죠. 지적, 도덕적, 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의 인물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어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하고 혼란을 느끼지만 그 세계로 발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당혹감은 독자 대다수의 경험과 공유되면서 문학적 진실을 지펴 올립니다. ‘결국 이런 게 세상이라니!’이라는 낭패감은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보다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만만치 않은 ‘세계’라는 존재와 한바탕 ‘붙어볼’ 정신적 각성을 낳게 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몇 장면을 인용해보죠.  

나는 깨진 단지를 눈으로 찬찬히 확인하는 순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찌 떨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단지의 임자가 욕쟁이 함경도 할머니임에 틀림없음에랴! 이 베락 맞아 뒈질 놈의 아새낄 봤나, 하는 욕설이 귀에 쟁쟁해지자 등 뒤에서 올라온 뜨뜻한 열기가 목덜미와 정수리께를 휩싸며 치솟아 올라 추운 줄도 몰랐다. … 나는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서둘러 주위의 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마침 찰기가 좋은 눈이어서 손이 한번 닿을 때마다 흙알갱이가 알알이 박힌 눈덩이들이 붙어 올라왔다. 나는 우선 항아리 주변에 눈사람의 아랫부분을 뭉쳐 놓았다. 그리고는 조금 작은 눈덩이를 서둘러 올려놓았다. 그렇게 해서 깨진 단지를 감쪽같이 눈사람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게 일제히 안됐다는 시선을 던지며 몰려들었어야 할 사람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냄비를 들고 왔다 갔다 했고, 문짝에 기대 입을 가리고 웃었으며, 수돗가에 몰려나와 쌀을 일며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수돗가에서 시래기를 다듬다 마주친 엄마도 너 점심 굶고 어디 갔다 왔니, 하는 지청구조차 내리지 않았다. 나는 무척 혼돈스러웠다. 사람들이 나를 더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짜고 그러는 것도 같았다. 나는 얼른 눈사람을 천연덕스럽게 세워두었던 변소통 쪽을 돌아다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눈사람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물론 흉측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어야 할 짠지 단지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감은 사실 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그러므로 나는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프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도 혼내지도 않는 세계가 너무나 괴물스럽고 슬퍼서 싱거운 눈물이라도 흘려야 직성이 풀릴듯했다. 하긴 눈물 서너 방울쯤 짜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난 시래기 줄기가 매달린 처마 밑에 서서 몇 방울 떨구며 소리 없이 울었다. 차라리 그 깨진 단지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혼은 나더라도 나는 혼돈스럽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두 개의 ‘나’로 분리한 조숙한 여자아이, 《새의 선물》

소설가 은희경(1959~ )의 《새의 선물》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조금은 위악적이고 냉소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문학을 구축해온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장편소설입니다. 책이 많이 팔렸다는 것이 꼭 문학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100쇄를 인쇄할 만큼 대중의 많은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소설을 살펴보게 하는 분명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겁니다. 12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의식으로 중무장하고, 조숙하게 세상과 맞서는 주인공 ‘진희’의 성장담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나(진희)’는 여섯 살 때 엄마를 잃고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집니다. 어머니가 없다는 주변의 시선에 진희는 어느 날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분리합니다. 어른들에게는 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내심으로는 주변 어른들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나름대로 파악해갑니다. 삼촌이 친구 허석과 함께 집에 온 이후로 진희는 허석을 좋아하지만 허석은 진희를 어린아이로만 여길 뿐입니다. 주변 어른들의 삶과 섞여들면서 이 세계를 이해해 나가던 진희에게 다양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느 겨울, 재혼한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오고 진희는 할머니와 이모 곁을 떠납니다. 

이 소설은 어른이 된 ‘나(진희)’가 12세 무렵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여자아이의 성장소설입니다. 나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이모, 삼촌, 이웃집 사람들의 삶을 자신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어갑니다. 다른 성장소설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점은 어린 나이에도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자신을 분리해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리된 시각의 설정이 평단과 대중들의 지지를 받은 가장 중요한 소설적 장치일 수 있습니다.  

매력적인 이 ‘꼬마’의 페이소스 가득하면서도 조숙한 발언과 생각들은 경쾌한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보여지는 나’는 어른들 앞에서는 자신의 본심을 감춥니다.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통해서는 독자에게 본심을 드러내죠. 이런 어긋나는 시선의 설정은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현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함께 진짜 ‘나’의 심리가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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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누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엄마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했으며 남에게 그것을 눈치 채이기 싫어서 짐짓 고개를 숙여 버리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진짜의 나 아닌 다른 나를 만들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꾸며 보이고 거짓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일은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위’라는 말을 알게 된 뒤부터 그런 의혹은 사라졌다. 나의 분리법은 위선이 아니라 작위였으며 작위는 위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아는 어른들의 비밀을 털어놓는 데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도, 빚진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과 세계를 바라보는 이야기들은 많이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소설가 주요섭(1902~1972)이 1935년에 발표한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이미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을 만날 수 있죠.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구요.”로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캐릭터가 떠오를 겁니다. 이 소설의 어린아이인 ‘옥희’는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가 애틋하게 ‘썸 타는’ 상황을 옥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른들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지요. ‘옥희’는 이른바 ‘신빙성 없는 화자’의 역할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설적 재미를 선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인물과 소설은 성장소설의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는 데에 그치죠. 반면, 《새의 선물》의 ‘진희’는 스스로 세계를 해석하고, 조롱 섞인 시선으로 세상을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아이의 성찰과 각성을 바탕으로 세계는 이해되고 투쟁의 대상이 됩니다.  

성장하셨나요? 진행 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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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설을 통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성장담을 살펴보면서 성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물리적인 충족만으로도, 시간적인 성숙만으로도 미흡한 게 성장일 겁니다. 경제도 성장이라고 표현하고 과학기술도 성장이라고 말하지만, 문학이 다루는 성장은 조금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문학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인생의 진실을 다룬다는 말은 단순하게 문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어른이라 하더라도 이미 성장했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성장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겠지요.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세계를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문학카페] 성장소설로 되돌아본 ‘성장’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