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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제레미 리프킨의 불편한 진실

잉여인간시대에 마시는 ‘싸구려커피’

바닷가 언덕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저 수평선에서부터 해변까지 지치지 않고 파도가 부르는 노래는 가끔 사람을 서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바닷가 풍경을 담배처럼 물고 앉아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 그러나 이내 파도는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돌아가라고 하얗게 몸을 허물며 해변까지 다가와 사람의 등을 떠미는 듯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바다를 유영하고 있을 고래들의 지느러미가 밀어 가는 삶의 끝은 어디일까.  

고래들은 태어난 바다가 아니라 뭍에 삶의 마지막 자리를 마련합니다. 고래 무덤을 우연히 본 사람의 시선은 그래서 위태롭습니다. 매끈한 몸으로 바다의 속살을 헤집고 나가는 팽팽한 몸짓이 아니라, 하필이면 고래 무덤이라니요. 꿈이 좌절된 실패의 허망함을 보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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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고래들은 뭍으로 떠밀려와 집단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스스로 생명을 내려놓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단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1980년대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읊조리던 이성복 시인의 시선이 아직도 우리들에게 유효한 게 아닐지.  

젊은이들의 삶이 어떤 시대보다도 팍팍하고 고달파 보입니다. 10대까지의 성장기에 경제 발전의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풍족하게 자라난 그들에게 오늘과 내일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을 듯합니다.
고래들 못지않게 탄력 있는 정신으로 세상을 헤집고 다녀야 할 그들에게 현실의 수평선은 넘어가기에 너무 멀고 너무 높아보일지 모릅니다. 짙푸른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던 고래들이 메마른 뭍으로 와서 제 지느러미를 내려놓는 것만큼이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우리도 나머지 99%에 속하지 않을까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켜놓은 TV가 하품을 하듯 화면을 깜빡이며 시선을 잠시 끌어갑니다. 경제평론가로 유명하다는 사람이 나와 세련되고 지적인 용어로 처세술을 전파합니다. 듣다보니 얼마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언급되네요. 인류는 0.1%의 창의적인 사람과 그를 알아보는 재능을 가진 0.9%의 통찰력 있는 사람이 이끌어 온 역사라는 겁니다.  

그 무리에서 배제된 나머지 99%에 관한 ‘밀담’을 친구와 나눴습니다. 밀담이라는 단어로 그 자리를 포장한 건 행여 우리도 99%에 속하지나 않을까, ‘자기검열’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대화가 지루해질 때 위악적으로 그 자리를 자조(自嘲)해보십시오. 시간은 물 흐르듯 가고 대화는 무르익어 취흥을 더할 때도 있습니다.  

극소수의 천재들이 이뤄놓은 성과물을 수동적으로 ‘배급’받아 하루하루 영위하는 99% 나머지 인류를 ‘잉여인간’으로 분류한 미래학자는 제레미 러프킨(Jeremy Rifkin)입니다. 그의 통찰은 정확해 보이지만 씁쓸하고 불순합니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제시하지만, 그 사실이 나의 것일 때 ‘진실’이 불편한 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르죠.  

손창섭의 단편소설, <잉여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잉여인간’이란 용어는 사실주의 문학가인 투르게네프(1818-1883)의 《잉여인간의 일기》란 책이 처음 출간되면서 당대 러시아 사회를 풍미했죠. 투르게네프는 심훈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의 이론적 배경이 된, ‘브나로드 운동’이 묘사된 중편소설 <처녀지>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농민을 계몽하는 과정에서 허위에 찬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인물을 그림으로써 당대 비극적 인물의 전형으로 잉여인간을 제시하고 있지요.  

러시아 혁명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고민하던 인물들이 사회 적응에 실패하는 과정을 투르게네프는 ‘잉여인간’이라는 용어에 담아냅니다. 이 말은 한국문학에 흡수되면서 언어적 팽창을 거듭합니다. 1950년대 전후(戰後) 한국 사회가 처한 암울한 시대 현실을 당대 청년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맞이합니다. 문학작품에서는 그들이 변혁의 의지와 실천성을 상실한 무기력한 ‘놈팽이(룸팬)’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작가 이청준은 그런 인간 유형을 ‘병신과 머저리’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뜨기도 전에 해는 지는가 

최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잉여인간의 모습은 그 성격이 다릅니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으로 언급되는 이십 대의 현실과 심리적 소외감이 그들을 잉여인간으로 재해석하게 한 것이죠. 러시아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외부적 자극에 의해 양산된 이전 세대의 잉여인간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변혁이 가져다준, 자조적 자성(自省)의 결과로 만들어진 계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잉여인간은 사회적 구조의 왜곡으로 인해 빚어진 ‘생산의 잉여, 소비의 잉여’입니다. 비단 이십대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눈을 돌려보면 기성세대에서도 조기 퇴직자나 구직에 실패한 사람들까지 그 의미는 광범위해졌고 심층적입니다.  

2008년 데뷔한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청년 그룹은 동세대의 그늘을 드러냈습니다. <싸꾸려커피> 노래 가사가 낮술에 취해 읊조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잉여적 존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먹장구름처럼 잿빛으로 우리의 귀를 적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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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안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 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_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

싱싱하고 매끄럽게 되살아나기를 

바닷가 언덕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은 끝이 없어 보이지만 어둠이 깃드는 순간, 처음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컴컴한 여백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씨앗이든 어두운 땅에 묻히지 않고서는 싹을 틔울 수 없는 법입니다. 어둠이 새벽을 지나 아침을 열어젖힐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요.  

그때 당신은 고래의 싱싱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고래무덤이 우리를 향해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는 절망과 끝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에 지치고 상처받아 위로받으러 바다에 온 사람에게 그렇게 들리기도 합니다. 당신이 파도의 노래를 들으며 마시는 커피도 더 이상 ‘싸구려 커피’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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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