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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통해 본 커피의 이해(理解)

커피도 계급이 있나요?

“블랙커피는 반드시 강하고 뜨거워야 한다.
강한 커피가 싫다면 블랙커피를 마시지 말라.
그리고 블랙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커피도 마시지 말라.”
_ 앙드레 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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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하던 Y에게

오늘은 어떤 커피를 마시고 있니? 어느 계절이든 늘 따스한 블랙커피를 즐기며 향을 음미하던 모습이 떠오르네. 맞아. 지금, 따스한 블랙커피 마시기에 참 좋은 계절이야. 가을만큼 커피가 어울리는 계절이 있을까. 특히 가을비 내리는 날의 모닝커피가, 기압, 온도 등으로 인해 감각적으로 가장 향기롭고 맛있게 느껴진다는 과학적 전언도 있잖아. 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커피는 내 인생 따뜻한 말 한마디 같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한 작가는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하더라. “커피에 아무리 우유를 부어도 그건 그대로 커피다.” 웬일인지,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다시 보면서 이 말이 떠올랐어. 다양한 계급적 이해에 얽힌 사랑을 그린 이 드라마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있었어. 계급을 커피에 빗대서 보여주더군. 계급별로 다른 추출 방식의 커피를 마시는 거였어. 

안수영(문가영 분), 하상수(유연석), 박미경(금새록), 정종현(정가람). 네 등장인물은 모두 같은 은행 지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처지는 제각각이야. 은행을 드라마 배경으로 삼은 것도 흥미로운 점이야. 은행은 대놓고 표 내지는 않지만, 돈을 기준으로 고객 등급을 나누잖아. 드라마는 이곳에 일하는 직원 역시 계급이 나눠지고 있음을 보여줘.  

그렇다면 이들이 각자 집에서 어떤 커피를 마시는지 잠깐 볼까? 은행 청원 경찰 종현은 믹스 커피를 마셔. 계약직 직원 수영은 드립 커피를 내려서 마시고. 정직원 계장 상수는 캡슐 커피, 정직원 대리이자 부잣집 딸 미경은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이용한 커피를 뽑아. 아, 물론 커피 산지나 품질 등을 따지진 말자고. 그저 커피 추출 방식(기구)의 가격에 느슨하게 기반한 계급 차를 보여준 거지. 계급과 조건의 위치를 커피 마시는 연출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이 흥미로웠어.  

물론 다양한 반문도 가능하겠지. 가령, 수영이 내린 핸드드립이 스페셜티 커피라면? 핸드드립이 아닌 모카포트였다면? 미경의 커피가 가정용이 아닌 업소용 머신을 활용했다면? 커피를 잘 아는 사람은 더욱 구체적으로 파고들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드라마에서 커피 추출 방식을 통한 이런 연출은 흥미롭게 보였어. 

널 처음 만났던 오래 전, 원두커피를 마시는 자체가 아주 작은 사치였던 시절. 백화점 테라스에서 마셨던 원두커피의 향과 따스함이 전부였던 그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크게는 인스턴트커피와 원두커피로 분류되던 그때, 커피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커피라는 ‘아비투스(habi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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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tbc

<사랑의 이해>는 네 등장인물의 엇갈린 연애사를 다뤘어. 각 계급이 품은 삶의 양태에서 사랑의 방정식을 풀면서 오가는 미묘한 감정선이 참 흥미로웠지. 이들의 사랑이 마냥 달달하지는 않아. 사랑도 사실 단맛, 쓴맛, 신맛 등 다채로운 맛을 품고 있잖아. 사랑을 꼭 달게만 포장하진 않아서 매력적이었어. 다양한 커피 맛처럼 쓰디쓴 사랑도 사랑이니까. 사랑과 커피의 공통점이랄까.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 각자의 커피를 맛보고 싶었어. 그리고 다른 커피를 맛보면서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었어. 늘 마시던 커피가 아닌 다른 커피를 마신 뒤 어떤 느낌을 말할까. 사실 계급/계층을 묘사할 때 가장 선명한 기제가 냄새잖아. 그 사람의 공간에서 나는 냄새 혹은 체취는 그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해. 개가 냄새로 사람을 식별한다면, 사람은 냄새로 계급/계층을 구별하지. 냄새가 살인 동기로 작동한 영화 <기생충>이 떠오르네. 작가 조지 오웰도 냄새를 계급 간 차이의 비밀이라고 봤지. 

커피도 한편으로 향(냄새)이 가장 중요하잖아. 우리는 늘 커피 향에 매혹되니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내린 커피는 향도 다르지. 사실 그 사이에서 우열은 없어. 다를 뿐이지. 물론 커피도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를 드러낼 만큼 분화됐다는 생각도 들어. 어떤 커피를 마시고, 어떤 카페를 찾는지 등을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취향을 드러낼 수 있잖아. 특히 지금은 SNS 등을 통해 그런 경향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시대잖아.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지. 계급과 계층에 따른 무의식적 사회화 결과물인 아비투스는 때론 습관보다 강한 힘을 발휘해. 이 드라마는 체화된 형태의 문화자본으로 작동하는 커피를 묘사한 것 같아.

사실 커피의 역사를 보면 때론 커피는 계급을 드러낸 강력한 증거였지. 중세 시대에 커피는 귀족 남성들만 즐길 수 있는 음료였고, 산업화 시대에 공장주는 생산을 쥐어짜고자 노동자에게 (싸구려) 커피를 공급했지. 100원짜리로 어디서든 쉽게 먹을 수 있던 커피의 시대는 경제성장에 따라 막을 내렸어. 원두커피라는 말로 믹스커피와 차별화를 꾀했던 시절도 갔어. 이제는 취향이라는 말로 커피 맛과 향을 구분해. 커피 백가쟁명인 셈이지.  

이해(利害)를 이해(理解)로 바꾸는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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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가 애틋하면서 아렸던 이유가 있어. 통역이 되지도 리콜이 되지도 못하는 사랑 때문이랄까. 우리가 애써 덮었던 불편한 진실이 있었어. 때론 불쾌함도 동반됐지만 적나라해서 더욱 애틋했다고나 할까. 각기 다른 이해(利害) 속에서 서로를 어렴풋이 이해(理解)하게 되는 과정이 좋았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보이지 않는) 선을 긋지. 때론 사소하게 때론 너무 노골적으로. 출신이든 학벌이든 스펙이든. 그래서 선(線) 밖에 있는 사람은 차별에 노출돼 있지. 출발이 다른 데도 공정과 공평으로 포장한 교묘한 차별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 수영과 종현, 때로는 상수가 처한 ‘선 밖’에는 커피라는 잔심부름이 횡행하지.  

하지만 어떤 사랑의 이해(理解)는 이 선에 균열을 가해. 선 밖에서 선 안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던 상수가 망설임을 거듭하면서도 수영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 때, 이해(利害)가 이해(理解)로 바뀔 때, 드립과 캡슐이 교감할 때가 그렇지.
내 멋대로 해석이지만, 수영이 은행을 나와 드로잉 카페를 차린 건, 작은 희망의 불씨가 아니었을까. 커피도 계급이 있지만, 수영의 카페 ‘내일의 행복’에서는 모든 걸 아우른 커피가 있을 것 같았어. 오늘은 선 때문에 힘들어도, 내일은 선이 없어서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커피 말이야. 

그날, 당신과 함께 마셨던 따스한 블랙커피 덕분에 <밤9시의 커피>도 그런 공간을 지향하고 있어. 어떤 ‘NO’도 없는, 선을 긋고 구별하지 않는 공간. 우리에게 커피는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였지. 어쩌면 우리는 ‘커피의 이해(理解)’를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커피가 계속 따스했으면 좋겠어.

글 | 낭만(김이준수)
낭만 님은 미국 아트/옥션 전문 인터넷매체 <옥션데일리>의 한국 콘텐트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현실화하고자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을 썼고, 《그림자아이가 울고 있다》 《청소년 스마트폰 디톡스》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등에서 스토리텔링을 맡았습니다.

 

 

‘밤9시의 커피’는 다정하고 환대가 넘치는 가상의 카페입니다. 불면을 부르는 커피가 아닌, 분주한 일상이지만 늘 깨어있는 존재로 남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상징합니다. ‘음료, 그 이상’인 커피를 매개로 가상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함께 상상하고 공감합니다. <편집자 주>

[밤9시의 커피]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통해 본 커피의 이해(理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