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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카페 2020.07 | Vol.8
월간 카페人  /  제4호  /  모두의 테라스
모두의 테라스
[커피in가요] 펄시스터즈 <커피 한 잔>

세월이 흘러도 ‘내 속을 태우는구려’

어린 시절을 궁벽한 산골마을에서 보낸 내게는 지금도 아련히 떠오르는 세밑 풍경이 하나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저녁이면 동네 어른들 틈에 끼어앉아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MBC 10대 가수 청백전’과 함께 새해 원단을 맞이하던 유년의 한 장면이다. 그런 날은 모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장집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안방에 신주단지처럼 모셔져 있던 TV도 대청마루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창 때의 배호, 차중락, 박재란을 비롯해 유주용, 위키 리, 이상열 등 당대의 인기가수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던 이 연례행사는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사람들에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광화문 앞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는 한 해 동안 가장 인기를 모은 10명의 가수가 출연해 공연을 펼치는 명실상부한 별들의 잔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하이라이트는 새해를 몇 시간 앞두고 드디어 그 해의 ‘가수왕’이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아이돌 가수의 공연에 수만 명이 운집하는 지금의 팬덤(fandom) 문화와는 다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동네사람 모두가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지켜보다 아나운서의 호명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로는 거의 유일한 방송사 주최의 연말 시상식이었고 집계방식이나 공정성 시비가 뭔지도 모르던 순박한 국민들에게 ‘MBC 가수왕’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권위였다.

‘진주’처럼 반짝이던 여대생 자매의 충격적 데뷔

1966년 처음 시작된 이 ‘MBC 10대가수 청백전’의 초대 가수왕은 서울대 출신의 학사가수로 인기를 모은 최희준의 몫이었다. 그 이듬해부터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두 해를 연이어 가수왕에 등극하는데 그녀는 1969년 한 해를 건너뛰어 정상을 재탈환할 만큼 당시에도 자타가 인정하는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1971년부터는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며 가요계를 주름잡던 남진의 독주가 시작된다. 그는 후배가수 하춘화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3년 동안이나 굳건히 정상의 자리를 지켰는데 그가 출연하는 리사이틀(recital)이나 극장쇼에는 항상 수천 명의 구름관중이 몰려올 만큼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런데 최희준, 이미자, 남진, 하춘화 등의 가수가 전성기를 누리던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해보면 1969년의 가수왕은 조금 뜻밖이었다. 마침 그해 8월 정식 개국한 MBC TV에서 처음으로 생중계한 덕분에 어느 해보다 큰 관심을 모았던 가수왕 트로피가 데뷔앨범을 낸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인 ‘펄 시스터즈(Pearl Sisters)’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언니 배인순과 두 살 터울의 동생 배인숙으로 구성된 이 자매 듀오의 가수왕 등극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대 사건이었다.

중앙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배인순과 명지대 1학년인 배인숙은 당시 두 사람 모두 165cm가 넘는 늘씬한 키와 서구적인 몸매로 데뷔와 함께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학 출신의 가수조차 드물던 시절이라 명문대 여대생이란 배경은 커다란 프리미엄이었다. 또한 이미 미8군을 통해 다져진 그녀들의 세련된 무대 매너는 트로트가 득세하던 기성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불러온 한 발의 신호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펄 시스터즈가 데뷔와 동시에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가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던 독특한 창법과 음색, 그리고 미모의 여대생들이 온 몸으로 발산하는 이십대 특유의 생동감이었다. 이전까지 가요팬들은 다소곳한 외모에 애절하고 낭랑한 목소리의 여가수에게 익숙했고 1961년 ‘노란셔츠의 사나이’를 히트시킨 한명숙 정도를 예외로 하면 여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율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펄 시스터즈는 이런 가요계의 불문율에 작심하고 반기라도 든 것처럼 거칠 것 없이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섹시한 율동을 앞세워 데뷔 1년 만에 파죽지세로 최고권위의 자리에 등극했던 것이다. 서양 인형처럼 늘씬한 몸매의 여대생 자매가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진행하던 TBC ‘쇼쇼쇼’에 나와 온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모습은 가부장적인 시골 촌로(村老)뿐 아니라 도시 젊은이들에게도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낯설지만 매력적인 ‘일반 가요’ 전성시대

펄 시스터즈의 성공적인 데뷔는 무엇보다 트로트가 아닌 ‘일반 가요’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에 매우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녀들이 데뷔하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이 부른 ‘서구풍의 가요’는 가요계의 비주류 혹은 젊은 음악인 일부의 실험적인 이벤트에 가까웠다. 당시에도 미8군 출신의 밴드가 간혹 카바레나 살롱 같은 일반 무대에 서는 일은 있었지만 아직은 이들이 꾸준하게 활동할 만한 무대가 빈약했고, 레퍼토리 역시 미8군 무대에서 부르던 팝 뮤직을 우리말로 번안한 곡이 대부분이었다. 1964년 신중현이 이끌던 그룹 애드포(Add 4)가 국내 최초의 록 앨범인 ‘비 속의 여인’을 발표했을 때 영미권의 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들이 ‘우리말로 부르는 시끄러운 서양음악’을 낯설어 했던 데는 그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60년대 중반 이후 음악 감상실이나 음악다방이 유행하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팝 음악처럼 현대적인 리듬을 가진 국내 창작가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이즈음 명동이나 종로 등의 대형 음악감상실에 마련된 공연무대를 통해 소녀팬들의 우상이 된 ‘키 보이스(Key Boys)’ 등 영맨 밴드들의 등장도 가요시장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물결 속에서 시작된 ‘브라운관 시대’는 미모와 지성, 댄스와 가창력을 두루 겸비한 ‘최초의 비디오형 가수’ 펄 시스터즈를 주저 없이 가요계의 차세대 스타로 지목했던 것이다.

당시의 언론 기사에 따르면 펄 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은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정용 음향기기가 막 대중화되던 시기라 이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데뷔 앨범의 강렬한 충격은 비교적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이후 40여 년 동안 펄 시스터즈를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데뷔 앨범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그녀들은 ‘첫사랑’, ‘메아리는 가슴에’ 등의 번안곡과 ‘I Love You', '웃는 얼굴 다정해도’ 등을 연속 히트시키며 가요계의 톱스타로 자리매김한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평균 이상을 웃도는 대박을 터뜨린 덕분에 메이저 음반사인 지구레코드로 전속을 옮길 때는 당시 금액으로 50만원의 계약금을 받은 사실이 한동안 매스컴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의 고급주택 한 채가 10만원 안팎에 거래될 때였으니 그녀들에 대한 주위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다.

50여 년이 지나도 식지 않는 ‘커피 한 잔’의 열기

애초 펄 시스터즈의 가요계 데뷔는 1967년 미8군 무대를 통해서였다. 당시의 한 신문기사에는 미8군에 오디션을 보러간 친구를 응원하러 갔다가 주변의 권유로 우연찮게 무대에 오른 것이 가수 데뷔로까지 이어졌다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실려 있지만 여기서도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스런 일이지만, 실제 펄 시스터즈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베트남전의 발발로 많은 수의 미군들이 빠져나간 탓에 이때쯤에는 기지촌 주변의 경기가 쇠퇴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펄 시스터즈는 여기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게 된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재키’라는 예명으로 미8군 무대를 주름잡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신중현이다. 당시 신중현은 야심차게 시도했던 일반 무대 진출이 실패로 돌아가고, 미8군의 클럽 무대마저 점점 줄어들자 베트남 위문공연단에 참가하기 위해 신변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신중현 스스로는 ‘베트남 가기 전에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가수의 기념음반을 낸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펄 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공전의 빅히트를 기록한다. 연일 밀려드는 주문으로 이 신인 듀오의 앨범은 공장에서 찍어내기 바쁘게 밤낮으로 트럭에 실려 전국의 음반도매상으로 보내졌다. 신중현이 베트남으로 떠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본격적으로 작곡과 프로듀서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도 펄 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을 통해 회복한 자신감 덕분이었다.

당시의 가요계 관행에 따라 펄 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은 기성 가수들과의 스플릿(split)으로 제작되었는데 A면은 펄 시스터즈가 부른 6곡의 창작가요, B면은 신중현이 이끌고 있던 그룹 덩키스(Donkies)의 연주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커피 한 잔’과 ‘떠나야할 그 사람’, ‘님아’ 등 3곡이 말 그대로 1년 내내 동반 히트를 기록했는데 특히 ‘커피 한 잔’은 1964년 애드포의 데뷔앨범에 ‘내 속을 태우는구려’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경우라 작곡가인 신중현에게도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아- 그대여 왜- 안오시나
아- 내 사랑아 오- 기다려요
불덩이 같은 이 가슴 엽차 한 잔을 시켜봐도
보고싶은 그대 얼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아- 그대여 왜- 안오시나
아- 내 사랑아 오- 기다려요
불덩이 같은 이 가슴 엽차 한잔을 시켜봐도
보고싶은 그대 얼굴 내 속을 태우는구려

평단과 대중이 모두 열광한 슈퍼스타

펄 시스터즈가 가수계 정상을 차지한 1969년은 마침 영국의 팝스타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가 첫 내한 공연을 가진 해였다. 그해 10월 시민회관과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공연에서 흥분한 일부 여성들이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 무대 위로 던졌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본토 팝스타의 내한공연은 풍성한 뒷이야기를 남겼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열광이 가라앉은 뒤 많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미 ‘한물간’ 팝스타인 클리프 리차드보다 펄 시스터즈의 음악이 훨씬 세련됐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본토의 팝 음악에 견줄 만큼 현대적인 대중음악이 이미 한국에서 공연되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더해지면서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대표곡인 ‘님아’와 ‘커피 한 잔’ 등의 노래는 멜로디 진행이나 창법이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직설적이고 과감해진 노랫말은 이십대 초반의 싱그러움을 발산하는 그녀들에 의해 한층 자유분방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될 수 있었다. 매스컴 역시 이른바 ‘기사발’과 ‘사진발’을 두루 갖춘 그녀들 주위에 경쟁적으로 몰려들었다. 그 즈음 막 창간된 <선데이 서울>이나 <주간경향> 등의 연예잡지는 거의 매주 펄 시스터즈의 동정기사를 쏟아내기 바빴다.

그러나 쉴 사이 없이 계속되는 방송 활동과 리사이틀, 과도한 언론의 관심은 그녀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게 한다. 1971년 동경가요제 출전을 계기로 진행된 일본 진출 역시 그런 노력의 연장선이었다.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펄 시스터즈는 자신들의 진가를 알아 본 소니레코드의 요청으로 정식 음반계약을 체결하고 NHK 등의 방송 스케줄을 확정하는 등 해외 진출을 현실화하는 듯 했다. 그런데 비자 갱신을 위해 잠시 귀국한 사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펄 시스터즈의 일본 활동은 모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결국 그녀들은 여전히 뜨거운 국내에서의 인기를 뒤로하고 1974년 또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이때도 표면적인 이유는 미국시장 진출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두 사람의 심중에는 이 무렵에도 어느 정도 가요계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좀처럼 데뷔 소식이 들리지 않아 팬들의 궁금증이 증폭되던 1976년 10월, 뭇 남성들의 우상이었던 언니 배인순이 동아그룹 후계자 최원석과의 결혼 소식을 알려오면서 펄 시스터즈의 화려했던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된다. 1979년 잠시 솔로로 전향한 동생 배인숙이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등 몇 곡의 히트넘버를 남겼지만 그녀 역시 몇 년 후 재미동포 의사와 결혼하며 미련 없이 연예계를 은퇴해 버렸다. 재벌가의 안주인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듯했던 배인순의 안타까운 이혼 소식이 10여 년 전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자매는 그렇게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영영 잊혀져가는 듯했다.

그런데 2011년 12월 31일 저녁, 속절없이 저무는 한 해의 마지막을 하릴없이 지켜보던 나는 KBS 개국 50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한 가요 프로그램에서 한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거기에는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온 ‘펄 시스터즈’가 예의 그 뇌쇄적인 몸짓으로 자신들의 히트곡을 열창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수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목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매력적이었다.

어느덧 초로의 여인이 되어 돌아온 그녀들의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불과 3주 동안 준비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대에 선 자매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전성기 때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40여 년 저편의 세월을 회상하는 펄 시스터즈의 컴백 인사를 들으며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진. 김수길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