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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in가요]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 ②

‘미다스의 손’을 가진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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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시스터즈로 대성공을 거둔 1969년부터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금지를 당하게 되는 1974년 사이에 신중현(申重鉉)은 약 190여 곡의 노래를 새로 만들었다. 당시 신중현의 사무실에는 신중현 밑에서 기량을 닦아 데뷔 기회를 잡아보려는 가수 지망생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미8군 쇼단체인 유니버살에 소속돼 있던 신중현은 그 무렵에도 미국 본토의 최신곡을 녹음해 악보를 따고 밴드 멤버들에게 나눠줄 편곡 작업과 연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었다. 

그 와중에 동생 신수현의 소개로 동국대 2학년에 다니는 김추자라는 가수지망생 하나가 찾아왔지만 다른 일로 정신이 없던 신중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건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매일 같이 사무실을 찾아와 목을 빼고 앉아 있는 김추자에게 오디션 기회를 허락해준 건 한 달이나 지난 후였다.

오디션 보러온 재목감 한 눈에 알아봐 

펄 시스터즈의 ‘님아’를 불러보라고 하자 잔뜩 긴장한 그녀는 박자를 놓치고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통기타 반주에 맞춰 몇 곡을 더 불러보게 하자 이내 신중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만큼 매력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트로트풍이 아닌 현대적 리듬 감각이 몸에 배어 있는 밝고 경쾌한 목소리를 찾고 있던 신중현은 그녀에게 당장 내일부터 사무실에 나와 연습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김추자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무실로 달려와 매일 같이 신중현의 지휘 아래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신중현이 가르쳐주는 대로 노래 한 구절씩을 불러가며 한 곡을 마스터 하는 식이었다.

음악에 관한 한 집요하기로 소문난 신중현의 개인 트레이닝을 김추자는 군말 없이 따랐다. 프로듀서 신중현은 당시 자기 휘하의 가수들에게 직접 기타 반주를 해주며 노래 한 소절, 단어 하나의 감정과 감각까지 요구할 만큼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했다. 무대 경험이 전무했던 김추자 역시 신중현의 마음에 들 때까지 비브라토, 터치, 숨쉬기 등의 발성 테크닉을 몇 시간이고 반복 연습해야 했지만 단 한 번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신인이고 기성가수고 이런 연습 방법에 토를 다는 가수는 사실 아무도 없었지만 김추자는 정말 무조건적으로 내 말을 잘 따랐어요. 테이프에 노래를 담아가 집에서도 연습을 해올 만큼 악착같은 데가 있었죠. 한 두곡 연습을 하고 나면 스스로 감을 잡는 이해력도 좋았기 때문에 금방 데뷔를 시킬 수 있었던 거죠.”  김추자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신중현은 본격적으로 그녀를 위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늦기 전에’와 ‘나뭇잎 떨어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곡들이 이때 만들어진 김추자의 데뷔곡들이다. 신중현이 만든 노래는 역시 그가 추구하던 한국적 록으로 사이키델릭 록처럼 현대적인 음악에 한국적인 요소를 섞은 퓨전 음악이었다. 김추자의 데뷔곡인 ‘늦기 전에’도 처음에는 소울 창법으로 시작되지만 후반부에서 우리 전통의 판소리 창법을 접목한 신중현의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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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자

대타로 녹음한 드라마 주제곡으로 스타덤 

하지만 김추자를 통해 한국적 록의 기반을 넓혀보려던 신중현의 시도는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부딪쳐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거의 유일한 일반무대라 할 수 있는 방송가에서 이 낯선 서구풍의 최신 가요를 거의 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여를 허송세월로 보내던 중 뜻밖의 사건으로 돌파구가 마련된다. 1970년 동양방송(TBC)에서 ‘님은 먼 곳에’라는 연속극을 시작하면서 방송 이틀 전 급히 신중현에게 주제곡을 의뢰해왔던 것이다. 밤새워 곡을 만든 신중현은 다음날 오후에 악보를 들고 녹음을 위해 방송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래를 부를 가수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원래 이 연속극의 주제곡은 패티김이 부르기로 돼 있었지만 중간에 제대로 약속이 되지 않아 그날 패티김은 세종로에 있던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이 한창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녹음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담당 연출자의 간청에 못 이겨 그날 저녁 신중현의 사무실 직원들이 총동원되어 서울 전역에서 김추자를 찾느라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밤늦게 방송국으로 끌려온 김추자에게 밤새워 곡을 연습시킨 신중현은 방영날 아침에야 가까스로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드라마나 주제곡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거의 1년 후 정식 LP판에 담겨 발매된 ‘님은 먼 곳에’는 말 그대로 그 순간부터 전국을 강타하는 메가톤급 히트를 기록했다.

완벽한 무명이었던 김추자는 이 노래 한 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밀려드는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김추자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여가수였다. 두성과 비음 등 전통 창법이 금기시하는 테크닉을 구사했던 그녀는 그 결과 가장 반(反)트로트적인 가수로 하루아침에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등극했다. 이 덕분에 펄 시스터즈에 이어 또 한 번 만루 홈런을 터뜨린 프로듀서 신중현의 주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가요계를 뒤흔든 공전의 히트곡 ‘거짓말이야’ 

하지만 훗날 대부분의 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추자 역시 스타가 된 후에는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신중현과 거리를 두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님은 먼 속에’의 히트 이후 김추자는 일언반구 얘기도 없이 7개월 동안이나 신중현의 연락을 피하며 다른 매니저와 활동을 계속했다. 기껏 무명 가수를 발굴해 혹독한 연습을 거쳐 스타로 만들어 놓은 신중현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뒤 레슬링 선수 출신의 새 매니저를 대동하고 나타난 김추자의 간곡한 부탁에 신중현은 야간업소 출연으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해 곡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신중현이 만들어준 곡이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거짓말이야’와 ‘소문났네’ 등 일련의 히트곡들이다. 

김추자는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화끈한 무대매너 만큼이나 데뷔 때부터 많은 화제꺼리를 몰고 다녔다. ‘거짓말이야’를 부를 때의 손동작이 남한의 고정간첩에게 보내는 모종의 신호라는 소문은 그저 작은 해프닝 정도에 불과했다. 방송에 한번 출연하고 나면 권력층으로부터 어김없이 “창법이 저속한데다 무대 매너가 너무 퇴폐적이라 방송으로 내보내기 부적합하다”는 압력이 들어왔다. 인기 상종가를 구가하던 김추자의 가수 활동은 머지않아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파국을 맞고 말았다. 1971년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은 매니저가 그녀를 폭행해 100바늘 이상을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혔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기어이 붕대로 얼굴을 감싼 채 무대에 올랐던 김추자의 일화는 지금도 많은 가요팬들에게 회자되는 희대의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김추자와 신중현의 인연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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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흑인 소울음악에 천부적 재능, 박인수 발굴 그 무렵 신중현의 사무실에는 밴드 연주자들 외에도 데뷔를 기다리는 가수지망생들과 노래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무명 가수들로 북적였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신중현 사단’이라고 불렀다. 전성기였던 1970∼74년 사이 신중현 사단은 무대에 오르는 멤버 외에도 업무를 처리하는 사환과 7∼8명의 보디가드를 포함해 많게는 총원이 80여 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저 신중현 밑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찾아온 무급 봉사자들이었다. 그만큼 신중현은 기타 연주뿐만 아니라 작곡가, 프로듀서로써도 절정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신중현은 사단 소속의 많은 남자 가수들 중에서도 특히 소울(Soul) 음악을 하는 박인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박인수는 이태원의 어느 미군클럽에서 진행된 테스트에서 템프테이션즈의 ‘My Girl’과 오티스 레딩의 ‘Dock Of The Bay’를 거의 완벽한 흑인 소울로 불러 신중현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전쟁고아 출신으로 미국에 입양 갔다 온 친구라서 거의 완벽한 흑인영어를 구사하는 데다 호소력이 좋아서 본토의 흑인들도 울고 갈 정도였어요. 플래터스, 샘 쿡, 레이 찰스 등 흑인 가수의 노래라면 못 하는 게 없었죠. 그날 저녁 바로 박인수를 신촌의 내 사무실로 데려가서 일주일 내내 ‘봄비’만 연습시킨 뒤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의 히트곡을 섞어 음반을 한 장 냈어요 반응이 대단했죠.”

시민회관에서 열린 신중현 사단의 리사이틀 때마다 박인수의 무대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곡의 후렴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절규하는 그의 열창에 공연장이 들썩거렸다. 가는 곳마다 그의 곁에는 눈이라도 마주치길 원하는 여성팬들이 줄을 이었다. 박인수는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더구나 혈육 하나 없는 그는 사생활을 절제하지 못해 스타덤에 오른 뒤에는 공연마저 팽개치고 잠적해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신중현의 그룹 ‘퀘스천스(Questions,)가 해체된 것도 보컬인 박인수가 활동을 소홀히 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결국 박인수는 무절제한 생활 끝에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활동 금지를 당한 후 두 차례나 결혼생활에 실패하는 등 가요계의 뒤안길로 소리도 없이 떠나고 말았다. 

신중현의 시련, 대마초 파동과 활동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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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

박인수가 떠나고 나서 신중현 사단에 새로 합류한 이가 장현이다. 신중현은 대구의 한 호텔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장현을 서울로 불러올려 ‘기다려주오’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시켰다. 신중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나는 너를’, ‘미련’ 등 두 장의 앨범을 자비로 제작해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중현의 자작곡인 ‘석양’과 ‘미련’이란 노래로 벼락스타가 된 장현도 마치 그런 날을 기다려 오기라도 했다는 듯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박인수 때와 달리 신중현이 느낀 실망감과 배신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중현을 만나기 전 이미 완숙한 가창력과 ‘흑인보다 더 깊은 흑인의 영혼을 가지고 있던’ 박인수와 달리 장현의 경우에는 가능성만 믿고 평범한 호텔 직원을 연습시켜 스타로 키워놓은 경우라 상실감의 깊이가 달랐다. 그 시절 신중현은 비로소 쇼 비즈니스의 비정함을 몸서리치게 깨닫고 있었다. 신중현은 이들 외에도 박광수, 윤용균, 이정화, 김정미, 임아영 등의 신인을 발굴해 데뷔시켰지만 음악적 평가에 비해 대중적 지명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74년 12월 가요정화운동과 함께 벌어진 대마초 파동이 터지기 직전, 신중현의 마음은 더 없이 황량했다. 록 음악에 미쳐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들이 사실은 모두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었다. 대마초 사건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지만 구치소 생활 4개월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이듬해 5월 긴급조치 9호와 함께 발효된 ‘대중예술활동 정화방침’에 따라 그의 작품 22곡은 저속한 가사와 불신감 조장, 창법 미숙 등의 황당한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그 역시 일체의 무대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바야흐로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에게 길고 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