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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형석 조경숙 김정현
디자인 이동휘 김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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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카페 2020.10 | Vol.11
월간 카페人  /  제8호  /  모두의 테라스
모두의 테라스
[커피in가요]

전후 한국 대중가요의 요람 미8군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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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왜관의 기지촌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해 70년대 가요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그룹 ‘데블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고고70’의 한 장면.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이후 약 20여 년간 우리나라에는 아주 특이한 대중음악 시장이 형성됩니다. 일명 ‘미8군 무대’라고 부르는 이 별세계는 신중현(기타리스트), 패티김(보컬), 김희갑(기타리스트), 이남이(베이시스트), 김대환(드러머), 조용필(보컬)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중음악계의 거장을 배출한 본산이며 당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영미의 POP 음악이 일상적으로 소비 유통되던 공간이었죠.

트로트와 신민요의 전성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처럼 이질적인 대중음악이 공존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그것은 미군의 6.25전쟁 참전과 1955년 일본 오키나와 있던 미8군 사령부가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형성된 GI(군인)문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8군 무대’는 미군 사령부가 주한 미군 및 군속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마련한 위문공연이었어요. 정전 협정 이후 한반도에 대규모로 주둔하게 된 미군 병사들에게는 향수를 달래고 일상적 유흥의 도구로써 자신들이 듣던 본국의 음악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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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섹스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故이봉조는 미8군 무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주한 미군을 위한 기지촌 클럽 공연 성행

이역만리에 파견된 자국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미국은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앤 마거릿, 냇킹 콜 등 당대의 슈퍼스타가 포함된 미군위문협회(USO) 공연단을 몇 차례 파견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는 전국에 산재한 주한 미군들의 일상적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병사들의 여가 선용과 유흥을 위해서는 한국의 실력 있는 공연자들을 물색하는 수밖에 없었죠. 

전쟁으로 인해 생계가 곤란해진 우리나라 음악인들에게도 미군 부대는 그나마 생계를 의탁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었습니다. 음악인들은 당시 미군기지 주변에 세워진 클럽과 직접 교섭해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초창기에는 개런티로 담배, 양초, 빵, 초콜릿, 통조림, 술 등 주로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물품이 지급되었지만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이들이 받아온 보급품은 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휴전 이후 본격적인 한반도 주둔계획에 따라 동두천, 파주, 문산 등 휴전선 근방은 물론이고 부평, 오산, 송탄, 대전, 대구, 군산, 김제, 왜관, 목포, 진해, 부산 등 후방에도 미군 기지가 들어섭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 기지촌 주변으로 미군들이 일과 후 유흥을 즐기는 ‘클럽(club)’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많은 연예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들었지요. 

미8군 무대에 한국 연예인을 보다 체계적으로 공급 관리하는 일종의 ‘연예기획사’들이 설립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1957년 상공부에 ‘용역불(用役弗) 수입업자’로 지정된 화양흥업을 필두로 유니버설, 20세기, 삼진, 공영 등의 용역업체 창고건물은 거의 매일 밤 미8군 데뷔를 준비하는 밴드들의 연습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50년대 중후반 전국의 미군 클럽 수는 260여 개를 상회할 만큼 나름대로 독자적인 음악 시장을 구축했습니다. 하나의 클럽에 보통 4~5개의 밴드가 고정 출연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미8군을 통해 생계를 이어간 가수, 연주자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최소 수 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치열한 오디션 무대를 거쳐야 설 수 있었던 미8군 무대

미8군 무대에 서기를 희망하는 한국인 연예지망생들의 수가 증가하자 미군들은 이때부터 연예인에 대한 심사, 즉 ‘오디션’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3~6개월마다 미군 음악전문가들 앞에서 펼쳐지는 오디션은 기성과 신인을 막론하고 실력만으로 합격자를 선별했어요. 오디션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성 단체들도 더 이상 공식 클럽에서 공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쇼 단체들은 오디션 준비에 사활을 걸고 전력을 기울여야 했지요.

심사관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최신 레퍼토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각 쇼(Show) 단체의 악단장들은 미군 라디오방송(AFKN)을 통해 본토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노래를 릴 테이프에 녹음해 악보를 채보한 후 며칠 밤을 새워가며 오디션에 대비했습니다. 지난 오디션에서 아무리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라도 가산점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연습량이 적거나 흥행성이 떨어지는 쇼단은 탈락하기 일쑤였습니다. 치열한 오디션의 관문을 통과한 단체에게는 최고 AA부터 C까지 등급이 매겨지고 이에 따라 이들의 개런티가 정해졌습니다. 

당시 미8군 클럽 무대에서 펼쳐진 공연은 단순한 음악공연이 아니라 재즈, 컨트리, 리듬앤블루스, 록큰롤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를 중심으로 가수, 무용, 코미디, 마술 등이 가미된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에 가까웠습니다. 출연진의 규모에 따라 14인 이상의 빅쇼와 8인 이하의 스몰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빅쇼 출연진은 통상 빅밴드라고 불렀는데 기타, 베이스, 드럼, 피아노 외에 트럼펫, 트럼본, 섹소폰 등 관악기가 추가된 10인조 이상의 대형 악단이었습니다. 스몰쇼 역시 7인조 내외의 악단과 가수, 무희 등으로 구성되어 1시간 남짓 다채로운 공연을 펼쳤습니다.

당시 쇼 단체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밴드들은 계약형태에 따라 플로어 밴드, 하우스 밴드, 오픈 밴드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플로어 밴드는 버스나 트럭을 대절해 몇 개월에 걸쳐 전국의 미군 클럽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치는 쇼 단체의 전속 악단이었습니다. 
특정 부대에 딸린 클럽에 전속으로 출현하는 밴드는 하우스 밴드라고 불렸습니다. 하우스 밴드는 심신이 고달픈 ‘전국 투어’를 하지 않는 대신 한 업소에서 장기공연을 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레퍼토리와 쇼맨십, 뛰어난 연주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일반 무대에 나와 명성을 날린 연주자와 가수들 중에는 대개 이 하우스 밴드 출신들인 경우가 많은 건 이 때문입니다. 

이밖에 오디션에서 C등급을 받아 탈락하거나 데뷔를 앞둔 무명 밴드들은 기지촌 주변의 비공인 클럽에서 연주를 했는데, 이들이 오픈 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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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라는 예명으로 유명했던 신중현, 이남이 등도 미8군 무대를 통해 음악인으로 데뷔했다.

1950년대 후반 수출액 보다 많은 외화 벌어들여

1950년대 당시 이들 쇼 단체가 미군으로부터 벌어들이는 한 해 수입은 당시 한국의 연간 수출액을 넘어 120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국가 경제에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 실력 있는 연예인에 대한 대우는 일반 무대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큰 금액이었죠. 

1955년 미8군에 데뷔한 기타리스트 신중현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 3천원이었던 그의 개런티는 3개월 후 7천원으로 인상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다시 2만원으로 인상되었습니다.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진 젊은 기타리스트를 두고 각 쇼단의 스카우트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60년대 초반 버스요금이 8원, 자장면 한 그릇이 25원, 쌀 한가마 가격이 3천원 정도였으니 지금과 단순 비교해도 적지 않은 고소득자였던 셈이죠. 이처럼 연주자를 단지 가수들의 노래에 반주를 넣는 세션 정도로 취급하는 지금과 달리 미8군 무대는 음악인에 대한 처우가 전체적으로 후한 편이었습니다.

각 쇼 단체가 일급 밴드를 보유하려 애를 썼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이 공연을 펼치는 미8군 무대의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쇼 단체들은 전국 각지의 미군 클럽으로 흩어져 음악을 연주했는데 미국인들은 인종, 출신지 등에 따라 선호하는 장르가 달랐어요. 흑인들이 주로 소울을 즐겨듣는데 비해 백인들은 로큰롤에 열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장교들이 출입하는 오피서스(officers) 클럽과 하사관들이 이용하는 NCO 클럽, 사병들이 자주 찾는 EM 클럽에서도 즐겨듣는 음악이 달랐습니다. 

이 때문에 밴드들은 출연하는 클럽의 성격에 따라 연주곡의 레퍼토리를 완전히 바꿔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실력 있는 연주자들일 수록 이런 임기응변에 능했습니다. 즉 미8군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한 가지 스타일의 음악을 잘하기보다 다양한 장르에 정통해야 했으며, 며칠 전 채보한 신곡을 바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가수나 연주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던 거죠. 당시 미8군에서 활동하던 대중음악인들은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당대의 유행 음악들을 거의 미국 본토와 비슷한 수준으로 재현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지원하는 음악 환경 또한 일제 강점기나 해방 후의 일반 무대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군들은 음악인에 대한 존경심이 각별해 쇼 단체가 부대에 도착하면 사병들이 직접 악기를 나르고 공연 시간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생음악을 그저 BG(배경음악) 정도로 홀대하는 한국에 비해 확실히 미8군 무대의 청중과 연주자의 수준은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한국의 대중음악인들은 미국의 팝 음악을 직접 체험하고 재현하면서 음악적 감수성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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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재키’라는 예명으로 유명했던 신중현, 이남이 등도 미8군 무대를 통해 음악인으로 데뷔했다. (우)미국 여가수 ‘패티 페이지’의 노래를 잘 불렀던 패티김은 미8군을 대표하는 가수였다.

미8군 출신, 60년대 이후 가요계의 주류로 부상

미군 클럽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펼쳐지는 공연인 까닭에 사실 이들의 무대를  감상할 수 있는 내국인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중들도 그때는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미8군의 클럽 문화에 왕성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죠. 당시 한 연예잡지에 실린 쇼 단체 탐방기는 미8군 연예인들의 공연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대기 시간이 6시인데 7시 30분경에야 차가 왔다. 소형 화물차로 악기, 의상 등 소도구와 함께 우리도 뒤칸에 실려 8군 영내 공연장소인 <김치클럽>으로 수송되었다. 그곳에 당도하니 클럽의 전속밴드인 하우스밴드가 연주하고 있었다. 오후 9시에 밴드가 퇴장하고 쇼가 시작되었다. 관객은 미국 민간인이며 간혹 한국인도 눈에 띄었다. 다른 때보다 관객이 적다는 귀뜸을 해주는데 클럽의 반밖에 관객이 차지 않았다. ‘Oh What a Beautiful Morning’과 ‘Oklahoma’로 막이 올랐다. 전체 쇼 멤버가 등장하여 노래와 춤과 밴드플레이로 온 무대를 누빈다. 홍두표씨의 사회로 인사가 끝나고 트럼본 솔로로 ‘Come Back Sorento’가 연주되었다. 트럼본이란 악기의 완벽한 구사와 세련된 연주는 물론 트럼본의 스라이드를 발로 움직여 연주하거나 손을 대지 않고 바닥에 슬라이드를 놓고 몸을 굽혀서 조절하여 연주하고 또한 악기를 차례로 분해하면서 폰을 빼거나 마우스피스만으로 연주하는 쇼적인 제스처를 보이기도 한다.”

미8군 무대가 맹위를 떨치면서 한국 가요계에도 일명 팝송이라 불리는 ‘스탠다드 팝’이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게 됩니다. 더욱이 미8군 무대에서 음악적 성취를 이룬 이들이 간혹 일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트로트 일색이던 우리 대중음악계도 비로소 장르적인 다원화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지금에 와서 미8군 출신 연예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트로트와 신민요 계열을 제외하면 당시 활동했던 거의 모든 가수와 연주인들이 한번씩은 미8군을 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죠. 어쩌면 당시 ‘서양음악’을 하는 이들에게는 미8군이 유일한 무대였으며 베니김, 손석우, 김광수, 이봉조, 최상룡, 송민영, 엄토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안정적으로 자신의 음악 인생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미8군 무대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미8군에서 연주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길옥윤, 박춘석, 신중현, 이인성, 이인표, 김희갑 등은 이후 일반 무대에 나와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1960~80년대 한국의 대중가요의 전성기를 이끌게 됩니다. 한명숙, 이금희, 현미, 최희준, 차중락, 패티김, 윤항기 등의 가수들도 60년대 이후 한국 가요계의 분위기를 일신한 주역으로 꼽힙니다. 조영남, 조동진, 이필원, 임창제 등 통기타 문화의 주인공들 역시 이곳 미8군 무대를 거쳐 일반 무대로 진출하는 등 그 시절 미8군 무대는 가히 한국 대중가요의 요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