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내 마음의 카페
[부치지 못한 편지] 불광문고의 추억

서점 가는 길

부치지못한편지1.jpg

그 길이 사라졌습니다.

분명히 사라진 곳은 어떤 공간이지만 저는 길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믿고 있는 바로는, 공간에 대한 기억은 길이라는 매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없어짐으로써, 그곳으로 발걸음을 끌고 갈 일이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의 기억과 즐거움은 길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프리지아가 봄을 알린 것도 그 길이었습니다.

리어카에 몇 단씩 몸을 묶어 노랗게 우리에게 다가온 봄을 알려준 것도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 길 주변을 물들이던 은행나무의 행렬이었습니다. 바람에 이따금씩 이파리들이 떨어지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길 위에서 당신을 만나는 약속을 잡았고, 그 길을 당신과 걸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그 길 위에서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제 기억에서 지워야 할 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나와 걸었고, 당신 혼자서도 걸었던 길. 그리고 언제부터 나 혼자 걸었던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생활 주변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해서 소중함이 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약속을 정하고 만나기도 했었지요. 그곳을 향해 가던 길은 언제나 기대와 설렘이 함께 했습니다.

이제 그 길은 없어졌습니다.

도로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곳으로 향하던 사잇길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주변의 모든 풍경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따뜻한 겨울옷의 앞섶을 채울 때, 지퍼가 갑자기 고장 날 때처럼 그곳만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부터 동네에 소문이 돌고, 정말 플래카드가 붙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그곳이 있던 건물이나 골목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사라졌다고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과 지하로 내려가던 계단들의 모습들, 입구의 독특했던 유리문의 형태는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길과, 그곳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많고 다양한 생각들과 흔적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지요. 책을 사면, 그 책 첫 페이지를 덮고 있는 내지의 흰 여백에 책을 산 날짜와 시간, 장소, 그날 날씨에 대한 간략한 메모를 우리는 해두었지요. 당신과 함께 산 책들을 책꽂이에서 훑어봅니다. 이기적 유전자, 실패의 향연, 희망의 인문학, 영화관 옆 철학카페, 윤동주 시선집, 허삼관 매혈기,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모내기 블루스, 헤르메스의 기둥 등 여러 종류의 기억이 책의 이름이나 표지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하게 떠오릅니다.

그때 당신이 시 한 편을 골라 제가 산 책 앞장에 써 준 기억이 나는지요?

당신이 이 시를 옮기며 말했었지요. 길에 관해서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말이지요. 글씨를 읽으면 그 사람의 음성이 살아납니다. 글자와 글씨가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겠지요. 도로와 길이 다른 이유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길에는 흔적이 있고, 기억의 여백이 남아 있지요. 당신을 만나러 가기 위해, 사라진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그 길을 걸었듯이 기억 속의 글씨를 꺼내 읽습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_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 1902-1963, 터키)

 


부치지못한편지2.jpg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처음 가는 길이 있는가 하면, 늘 다니는 익숙한 길이 있습니다. 갈림길도 있지요. 처음 가는 길은 두려움과 함께 설렘이 있습니다. 익숙한 길에는 편안함과 여러 기억이 함께 합니다. 처음 가는 길 위에서 당신은 설렘을 느낀다고 한 적이 있죠. 어디인지는 알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합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곳을 발걸음이 직접 찾아 나설 때의 들뜸은 기분 좋은 긴장입니다. 생각과 몸이 한곳으로 쏠려 들 때, 길은 그 위에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깁니다. 그 처음의 길이 단순히 새로운 곳을 구경하러 가는 길은 관광이라고도 합니다. 반면 여행은 다른 목적을 가질 때도 있죠. 자기를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서나 다른 이의 이야기를 발걸음을 통해 제 몸에 새겨넣기 위해 낯선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 길의 끝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 어느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을 때, 그 갈림길에서 당신은 제게 말했었죠.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길은 시작되기도 한다고 말입니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늘 읊조렸던 시 한 편이 자꾸 생각납니다.

길이 아닌 곳은 없습니다.

벽도 길이 됩니다. 개미 몇 마리가 담장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이에게는 벽도 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의 일방적인 시선은 항상 고정된 방향성을 가질 뿐이지요. 개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벽을 타는 사람들은 늘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디서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벽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합니다. 거미에게는 허공이 길입니다. 사람들의 길은 거미에게는 가장 어리석은 공간일 것입니다. 어떤 생명체도 만날 수 없는 바닥의 평면은 거미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허공’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사라졌지만, 기억이 있는 한 모든 길은 그곳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곳을 찾는 일은 제게 짧은 여행과 같았습니다.

당신을 만나려고 자주 약속을 하던 그 길 위에 다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제 옆에 없고, 그곳도 얼마 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가끔씩 이파리들이 바람에 쏟아지는 순간에 내는 소리를 따라 불러보곤 합니다. 이제는 그곳의 이름도 당신의 이름과 함께 불러야 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그만큼 많은 추억과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가을에는 낙엽들을 밟는 소리로 기억이 날 것이고, 봄에는 꽃들의 냄새로 다시 살아나겠지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은은히 스며들던, 그 특유의 조명이 불현듯이 떠오를 겁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그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서볼 생각입니다. 그 앞에 가서는 조용히 당신의 이름을 불렀듯이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불러보아야 하겠습니다. 불광문고(1996~2021).

이제 가을이 지나가는 길 위에 영원히 하나의 풍경으로 남습니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