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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미궁(迷宮)과 미로(迷路)

불확실한 삶의 여정에도 출구는 있다

옛날 책들을 좀 버려야겠다. 곰팡이 내가 나고 책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어제의 흔적들. 이제 지하의 삶을 뒤로 하고 높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너는 그렇게 원하던 공간을 얻지 않았는가.

지하 셋방을 탈출한 어제, 비가 내렸다. 이사를 위해 삶의 흔적을 탈탈 털었더니 보따리 세 개가 전부였다. 습기 가득했던 가난한 대학생의 살림살이가 지금은 아침 햇살을 받아 나른한 하품을 하는 것 같다. 그래. 미처 버리지 못했던 책들도 버리자. 너는 지하에서 옥탑방으로 올라 왔다.

공간이 바뀌면 꿈도 바뀌어야 하리. 젊음은 해방구를 찾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공간이 아름다워지기 위해 유일하게 필요한 건 햇살이다. 이 햇살 한 줌을 얼마나 원했던가. 그러나 이사는 했지만 이곳에서의 삶도 그닥 녹록하지는 않으리라. 들어서기는 했지만 끝이 안 보이는 삶. 너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번역되지 않는 여러 단어들에 대해 너는 답해야만 한다. 학비, 아르바이트, 학점, 문학, 문학, 문학….

어디로 가야 할까, 빠져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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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초반의 봄날 아침에 썼던 일기의 일부이다. 들여다보면 출구가 없을 것 같던 시절의 고민이 한 가득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 과연 나의 삶은 나아졌는가. 스무 살 무렵의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할 수 없다는 점이 늘 내 삶을 허하게 만든다. 현재 삶의 좌표를 그려보려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삶은 여전히 출구가 불확실하다는 것 때문이다. 생계는 어찌어찌 해결이 되지만 문학은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하다.
숨은 쉬고 있지만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지는 못 한다. 생활인으로서는 미로에 갇힌 듯하고 문학은 미궁에 있다. 시인이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꼈던 어느 저녁, 사는 게 미궁이라는 생각이 들 때 더 이상 젓가락을 들 수 없었던 라면 면발의 모습이 더도 덜도 아닌 내 모습은 아닐까.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종합해보면 미궁과 미로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미로(迷路)는 길을 잃게 만들어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가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말한다. 미궁(迷宮)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갈림길이 없이 연결되도록 한 구조물이다. 둘 다 유사한 공간의 반복으로 인해 그 공간에 들어선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심리적인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체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두 말의 의미는 다르다. 미로는 여러 갈래의 길이 복잡하게 가지를 쳐 있고, 그 길들 중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반면 미궁은 가지 없는 한 개의 길만을 따라가서 결국 구조물의 중심에 이르게 되지만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 구조를 말한다.

우리의 삶은 미로를 닮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궁이 아닐까 싶다. 가야할 길은 많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고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길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왔던 길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출구가 없어 보이는 어느 선택의 지점에서 좌절해서 주저앉는 삶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라도 끝은 있다. 지혜가 필요하고 성찰이 필요한 것이 그러한 이유이리라.

미노스 왕의 주문으로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도 출구는 있었다.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 공주가 실타래의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 묶어 놓았기 때문에 건네준 실을 붙들고 미궁에 들어간 테세우스가 괴물을 물리친 다음 그 실을 되감으면서 탈출할 수 있었듯이, 우리의 삶에도 우리를 응원해주고 손을 뻗어 삶의 실마리를 풀어줄 존재들이 있지 않겠는가. 문학이 내 삶의 생계를 해결해주지는 못했지만 상상력과 희망이라는 실타래를 던져 준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크노소스 궁전 발굴, 신화가 사실로

‘미노스 왕이 9년 동안 통치하였다’고 그리스의 시인 호머가 기록한 이 한 구절을 믿고 전 재산을 바친 사람이 있다. 에게 해의 남단에 위치한 크레타 섬의 중심인 크노소스를 발굴하겠다고 나선 아서 에번스(Auther Evans : 1851~1941)는 1900년부터 시작한, 무모하기까지 해 보이는 이 도전을 끝내 성공한다. 전설적인 미노스 왕이 다스리던 크노소스 궁전으로 밝혀진 건물이 3천년의 세월을 걷어내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발굴이 된 궁전은 건물 한 가운데에 정원이 있고, 그 정원을 둘러싸고 수많은 방들이 배치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 오래 전에 이렇게 많은 방들이 도대체 왜 필요했을까. 더 궁금한 것은 그 건물의 구조였다. 한없이 좁고 길고 꾸불꾸불하게 이어진 통로와 무수히 많은 계단들은 건물을 미궁으로 만들고 있었다. 길이 길을 만나 또 길이 된다는 것은 방향을 잃게 하고 사람들을 낙담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 건물에 그리스어로 미궁이라는 뜻을 가진 ‘라비린토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공간에 대한 호기심을 매력적인 상상력으로 바꾼 이야기가 있다. 이승우 작가가 쓴 소설 「미궁에 대한 추측」은 우리에게 문학적 상상력이 왜 필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는 신화의 내용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인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자신의 왕권을 보장받은 미노스 왕은 증거물로 바다에서 나오는 황소를 요구한다. 왕권이 계속 보장된다면 그 황소를 제물로 바칠 것을 약속한 왕은 그러나 바다에서 나온 그 황소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만 약속을 어기게 된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에게 저주를 내린다. 바로 그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이다.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왕비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게 해줄 조력자를 찾아간다. 최고의 건축가이자 세공가인 다이달로스는 왕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무로 소의 모형을 만든 후 암소 가죽을 씌워 황소와의 사랑을 나누게 한다. 얼마 후 왕비는 머리는 황소이면서 몸은 사람인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을 낳게 된다. 이 괴물의 이름이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 즉 미노스 왕의 황소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이 골치 아픈 괴물을 미노스 왕은 어떻게 했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다이달로스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왕은 그에게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나올 수 없는 건축물을 요구했다. 미로와 미로로 이어진 건물 안에 이 괴물을 가두려 했다. 미궁 ‘라비린토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아테네를 점령한 미노스 왕은 아테네인들에게 9년마다 소년과 소녀 일곱 명씩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인신 공양으로 바쳐진 소년들 사이에 끼어든다. 신화의 낭만은 여기서 이야기를 하나 더 엮어낸다. 바로 미노스의 왕의 딸인 아리아드네가 용감하고 수려한 외모를 지닌 테세우스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미궁을 설계한 다이달로스를 졸라 탈출 방법을 알아낸 공주의 도움으로 실타래를 가지고 들어간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미궁을 유유히 빠져 나와 공주와 함께 아테네로 돌아간다. 비밀을 누설한 죄로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에 의해 자신이 설계한 미궁에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갇히고 만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만들어 미궁을 벗어나는 이카로스의 이야기는 상상력을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또 한 명의 영웅을 상징한다. 여기까지가 신화의 내용이다. 작가는 여기에 매력적인 이야기를 덧붙여 풍성한 읽을거리를 만들어 낸다.

미궁을 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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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인간들의 욕망과 문화 속에서 싹 트고 성장한다. 그 성장의 거름이 바로 상상력이다. 생각해보라. 상상력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지루하며 비루하겠는가.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만들어 내지만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우리의 상상력은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며 죽음도 생명의 기원으로 되돌려 놓는 힘을 발휘한다.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미궁을 왜 만들었을까. 무슨 일들이 그곳에서 일어났을까.

소설은 이제 신화를 인간의 욕망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댄다. 등장인물은 넷이다. 직업이 각자 다른 건축가, 법률가, 종교학자, 연극배우 이 네 사람이 우연히 한 여관에 묵게 된다고 가정해 보라. 폭설로 길은 끊기고, 발이 묶인 그들은 무료함과 불안감을 잊기 위해 여러 가지 놀이를 해보지만 마땅치 않다. 그러다 각자 알고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기로 한다.

건축가 순서가 되자 그는 에게 해의 눈부신 문명과 미노스의 미궁에 대한 의문을 말한다. 왜 그 오래 전에 미궁이 필요했을까.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에 맞는 추리를 해 나간다. 법률가는 이 미궁은 죄수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감옥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종교학자는 이 공간을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미노타우로스를 괴물이 아니라 그 사회가 숭배했던 신으로 이해했다.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나올 수도 없는 미궁에 사는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이 신에게 느끼는 경외감의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건축가는 미궁이 다이달로스 자신이 최고의 건축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건축물의 일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연극배우의 상상력이다. 그는 파시파에의 연인으로 황소가 아닌 다이달로스를 지목한다. 전쟁을 일삼고 고정관념에 빠진 남편에 식상했던 그녀는 예술가의 정신과 자유분방한 매력을 지닌 다이달로스와 사랑에 빠진다. 밀애를 나눌 장소가 필요했던 다이달로스는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소문을 낸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사는 이곳에 들어올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연극배우는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상상력을 더 밀고 나간다. 그렇다면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물리친 테세우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연극배우는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 공주가 사랑한 사람이 테세우스가 아니라 다이달로스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야기는 비로소 비극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갖춰간다.
어머니와 딸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었던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의 고백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아리아드네는 어머니의 연인을 아버지인 미노스 왕에게 밀고하는 대신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테세우스에게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다이달로스를 죽이면 테세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것이다. 결국 테세우스는 다이달로스를 죽이고 파시파에는 미궁에서 나오기를 거부한 채 연인 곁에서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한다.

희망을 낳는 상상력의 날개

미궁에서 나오듯이 소설에서 나와 주변을 살펴본다. 당장 오늘 해결해야 할 일상의 문제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에게 맡길 수만 있다면, 혹은 다음으로 미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생활인이란 삶의 조건이 여러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런 게 삶인가 보다.

이십대에도 대답하지 못한 여러 단어들이 오늘은 이름만 바뀌어 내 앞에서 답변을 요구하며 기다리고 있다. 명사가 동사로 모습을 바꾼 채 더욱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삶의 단위와 범위는 더 크고 넓어져 어디 숨을 데도 없어 보인다.

이카로스는 어떻게 미궁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밀랍의 날개’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을까. 한 번 더 돌아보고 심호흡이라도 한 번 해보자. 어디 날개가 될 만한 것들이 없을까.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고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