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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소통’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광장과 밀실 사이…공동체가 힘이다

집 구조를 바꿀 일이 있어 방 정리를 새로 했습니다. 오래 된 책을 들춰보다 스무 살 무렵에 찍은 사진을 한 장 찾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위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옛날 사진이라고 해서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 사진은 한동안 저를 책장 앞에 주저앉히고 과거의 한 순간으로 데리고 가더군요. 사진에 있는 여럿 가운데서 당신을 봤습니다. 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민주광장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당신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한때 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던 사람이 당신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저는 지금에 비해 어렸고 무척 예민해 보입니다. 그 무렵 당신이 함께 보낸 편지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한때는 너무 아프게 읽었지만 이젠 담담하게 읽어나갈 수 있더군요. 옅은 푸른 빛깔이 도는 한지로 된 편지지에서 은은하게 퍼지던 향기가 아직도 기억이 날 듯합니다. 그 문장 아래에 당신은 특유의 글씨체로 이렇게 또박또박 적었습니다.

사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다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 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 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읽었던 <광장>에 나오는 주인공 이명준의 말이야.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제3국을 선택했겠지? 그런데 그는 끝내 바다에서 자살하고 말아. 작가는 이념 선택의 한계와 분단 상황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그의 죽음은 이념 갈등 속에서 결국 좌절하고 마는 한 지식인의 비극으로 끝나. 그런데 난 그 결말에 동의할 수 없어. 왜냐하면 제3국으로 가는 바다 위에서 자살을 결행하는 그의 모습에서 난 패배주의를 봤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난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이 너무 싫어. 현실에 맞설 것처럼 기껏 열을 올리고서는 결국엔 양비론으로 돌아서는 게 싫어. 어쩌면 그 모습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의 본 모습이 아닐까싶기도 해. 투쟁가가 되지는 못하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 것처럼 비겁한 게 있을까? 이명준이 보여준 선택은 결국 좌절하는 지식인의 모습이잖아? 그들이 결국 택할 건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된 울타리 안이겠지. 온갖 안락함과 기득권으로 가득한 곳에서 그들은 외칠 거야. 아니 목소리를 깔면서 훈계하듯이 말하겠지. 이념은 허상일 뿐이라고 말이야.

오래 전 기억에서도 빛이 바랬을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기사가 자꾸 머리에 맴돌기 때문입니다. 역사교과서 문제로 세상이 한창 시끄럽습니다. 얼마 전에는 보수진영이라고 주장하는 곳에서 주최한 포럼에서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고 하더군요. 역사 교과서가 문제가 아니라 문학교과서가 진짜 문제라고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문학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이념의 잣대로 나누는 것은 굉장히 편협한 시각입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문학 작품은 이미 문학적 검증이 끝난 것이기도 하지만 예술 고유의 창의성과 자유로움을 사회적 이념의 눈으로 매도하는 일은 분명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술 작품은 일차적으로 독자들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건강한 논의 과정을 통해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성숙한 사회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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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크기가 아닌 소통이 되는 곳이 광장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 우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거론한 작품의 성격에 있습니다. 그들이 좌편향 되었다고 언급한 것에는 신경림 시인의 시 <농무>와 최인훈 작가의 <광장>이 들어 있더군요. 두 작품 모두 이미 문학적으로는 검증이 끝난 작품들입니다. 특히 <광장>은 ‘90년대에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이름을 올렸던 소설입니다. <농무>에 나오는 구절 중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따위야 / 아예 예편네에게나 맡겨 두고’란 구절이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새마을 운동을 통해 잘 살게 된 농촌 환경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1970년대 농촌의 부정적 현실만을 부각했다는 겁니다.

원래 농무는 전통적으로 농사를 통해 생계를 꾸려가던 농촌 사회에서 농사를 지은 후 구성원들이 자축하는 의미에서 행하던 축제의 향연이었습니다. 서양의 축제가 광장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우리 공동체에는 광장 문화가 없었지요. 대신 운동장 가설무대나 학교 앞 소줏집, 장거리 모두가 축제의 공간이 되고, 축제가 끝나면 소중한 삶의 터전으로 다시 자리매김했었죠.

드넓은 광장이 없었어도 우리 농민들은 이웃과 소통하는 공간을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똑같은 공간도 누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겁니다. 소통이 가능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는 순간, 그 공간은 물리적 크기에 관계없이 광장이 되는 것이죠. 반면에 아무리 넓은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소통할 수 없고 억압과 소외가 나타난다면 그 곳은 밀실이 되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 사회는 경제 개발을 목표로 중공업 위주의 산업정책을 펼칩니다. 도시의 팽창이 급격하게 일어나게 되죠. 농촌에서 더 이상의 희망을 보지 못한 젊은이들은 도시로 올라와 대다수가 도시의 공장에 취직하지요. 도시는 더욱 비대해지고 노동력을 잃은 농촌은 공동화空洞化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됩니다. 이 시는 이런 시대적 배경을 살아 있는 농민들의 언어로 인상적으로 표현해 낸 뛰어나 시들 중 한 편입니다. 농촌 문학의 일가를 이루었던 신경림 시인의 시세계에 비취 보더라도 일부 사람들의 이런 주장은 정말 졸렬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영혼을 가둘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최인훈의 <광장>은 한국문학이 이룩한 가장 뛰어난 성과 중의 하나라고 평가가 끝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좌편향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 장면을 문제 삼고 있을 듯한데요. 주인공인 이명준이 포로수용소에서 남과 북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립국을 선택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한이 아니고 중립국을 선택했다는 점이 좌편향돼 있다고 주장하는 거지요. 그러나 이 부분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 과정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중립국인 인도를 향해 가는 중에 자살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게 문학 아닌가요? 이명준의 삶이 사회면에 실리는 실제 사건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억측이 빚은 촌극으로밖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를 위해 잠시 소설 일부를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무의 심정도 잘 알겠소. 오랜 포로 생활에서, 제국주의자들이 간사한 꾀임수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소.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공화국은 동무의 하찮은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동무가 조국과 인민에게 바친 충성을 더 높이 평가하오. 일체의 보복 행위는 없을 것을 약속하오. 동무는·······.” / “중립국.” / 중공 대표가, 날카롭게 무어라 외쳤다. (중략)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나라 내 민족의 한 사람이, 타향 만리 이국 땅에 가겠다고 나서니, 동족으로서 어찌 한마디 참고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에 남한 2천만 동포의 부탁을 받고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 “중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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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제시된 장면은 포로수용소에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대표들이 주인공 이명준을 설득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주인공은 끝내 중립국을 선택합니다. 이 작품의 뛰어난 문학적 성과는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광장’이 공공公共의 공간이라면 ‘밀실’은 개인의 공간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광장과 밀실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해방 후의 혼란기라는 배경을 감안하면 ‘광장’에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부정과 부패, 사기와 모략이 판을 치고 있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 ‘밀실’에 박혀 있습니다. 시대적 현실도 주인공의 선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밀실도 광장으로 만들던 공동체 회복해야

주인공의 눈에 비친 남한과 북한은 모두 불구적인 사회입니다. 바람직한 사회는 광장이 건재하되 밀실이 존중되는 사회입니다. 결국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바라는 사회는 개인과 사회의 조화, 이념과 행복이 공존을 이루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그가 바라는 진정한 사회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어 그가 선택한 중립국으로 가는 도중 삶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관념적이고 폐쇄된 밀실에 너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시민적 광장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죽고 만 것이죠. 이명준은 민족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없이 남북을 양자택일식으로만 인식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 가겠다는 적극적인 창조의 의지가 결여되어 죽음을 맞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무조건 옹호만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거죠. 작품을 공정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 건강한 평가의 전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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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각으로, 어떤 생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밀실과 광장은 달라집니다. 제3세계로 불리는 남미와 아프리카의 많은 독재자들이 그들의 전통적 광장을 소통하는 곳으로 만들지 못하고 몰락해 갔습니다. 반면에 그곳이 설사 밀실이라고 하더라도 소통의 힘이 살아있다면 좁고 음습한 공간이 아니라 트인 광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지점도 바로 그 소통에 있으리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시 <농무>에 나오는 문제의식이 훨씬 더 건강하다고 생각됩니다. 열심히 일해도 희망이 없던 농촌 현실에 대한 자조와 한탄이 시의 후반부에서는 신명나는 춤으로 바뀌어 울분과 한을 풀어버리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문학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이라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이념의 낡은 냄새를 맡을 수는 없을 겁니다. 농민들의 암울한 현실을 신명나는 농무로 표현하는 행위는 오히려 우리 농촌 공동체가 갖추고 있는 건강함과 농민들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있었던 건강한 생명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요. 마을 앞 공터나 소줏집까지도 밀실이 아닌 소통의 광장으로 만들어내던 그 힘이 진정한 우리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논의에 이념의 낡은 이분법은 무의미할 뿐이지요. <광장>의 주인공이 중립국을 상상하는 부분은 주인공이 진정한 자유를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로 한 번 상상해 보시죠.

‘환상의 술에 취해 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서운 것을 너무 빨리 본 탓으로 지쳐빠진 몸이, 자연의 수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쉬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결정한, 중립국행이었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 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병원 문지기라든지, 소방서 감시원이라든지, 극장의 매표원, 그런,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쓰는 일이 적고, 그 대신 똑같은 움직임을 하루 종일 되풀이만 하면 되는 일을 할 테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