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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스스로의 몸을 수단화하는 것에 대하여

씁쓸한 변신 모티브, ‘성형만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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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에서 앱을 이용하다 보면 광고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문이나 방송이 갖추지 못한 속도와 현장감, 쌍방향성 등은 스마트폰의 매력이 틀림없습니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시선을 매점매석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모두들 폰에서 눈을 뗄 줄 모릅니다. 그러니 광고주들이 느끼는 앱의 매력은 상당하겠지요.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이용하는 스마트폰에 유독 성형 광고가 많다는 것은 생각을 잠시 머무르게 하더군요. 광고라는 게 원래 유행을 만들어내는 미끼이자 공갈젖꼭지이기는 하지만 성형수술에 대한 광고가 이렇게 범람하는 이유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몇 해 전 이야기입니다마는 우리 사회가 가지는 성형에 대한 대중 정서적 반응을 볼 수 있는 영화 두 편이 떠오릅니다.

2006년 영화 <미녀는 괴로워>가 관객 670여만 명을 동원하고 종영을 서두를 무렵,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할리우드 영화 <저스트 프렌드(Just friend)>는 저조한 흥행성적을 올린 일이 있습니다. 물론 영화의 완성도가 뛰어났겠지만 <미녀는 괴로워>가 관객 670여만 명을 동원한 것은 당시로서는 한국영화 흥행 순위 8위에 해당할 정도로 대단한 성적이었습니다.

“수술해서 예뻐지면 남자친구가 가방 사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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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녀는 괴로워>가 성형을 통한 변신을 모티브로 했다면 <저스트 프렌드>는 개인적 노력을 통한 변신을 모티브로 했다.

두 영화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우선 소재가 같다는 점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이 성공한다는, 이른바 성공 모티브가 이야기의 기반이 됩니다. 젊은 청년들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버무려 낸 것이 주관객층인 젊은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 역시 비슷합니다.

두 영화는 주인공이 사회적 외모의 극적인 변신을 거쳐 매력적인 인물로 거듭난다는 ‘변신 모티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합니다. 한국 상업 영화인 <미녀는 괴로워>가 뚱뚱한 여성을 내세운 반면 할리우드 영화 <저스트 프렌드>가 소위 ‘얼꽝’ 남성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뿐입니다.

‘변신 모티브’는 동서양에서 오랜 동안 서사문학의 매력적인 제재로 취해진 것입니다. 카뮈의 소설 <변신>이나 한국 고전문학 작품인 <박씨전>, <금방울전> 등이 변신 모티브를 활용한 대표적 서사문학입니다. 특히 <박씨전>은 시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추녀인 박씨가 변신을 통해 미인으로 거듭나 사회적 영웅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씨전>의 21세기 버전으로 봐도 된다는 거지요.

같은 점이 있는 만큼 두 영화의 차이점도 확연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할리우드 영화를 더 이상 거대자본에 종속된 상업영화라고 욕하거나 불온한 시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본으로 만들고 많은 관객들을 끌어들인 우리 영화가 훨씬 더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두 영화만 놓고 보면 그 차이는 분명합니다.

<미녀는 괴로워>는 뚱뚱해서 인정을 받지 못하던 한 여성이 성형수술로 모든 여성들이 바라마지않는 커리어우먼으로 거듭난다는 성공신화를 관객들에게 던졌고 우리 사회는 흥행 대박이라는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할인마트의 일괄구매 즉, 원스톱 쇼핑처럼 온 몸을 성형으로 뒤바꿔놓은 셈이지요.

반면에 <저스트 프렌드>의 주인공은 수년에 걸친 개인적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리매김해 나갑니다. 문제 해결방식에 있어 성형과 노력 중 어느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 판단하는 것은 순수하게 개인의 몫입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성형이라는 인위적인 방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점은 충격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미녀는 괴로워>가 우리 사회에 남긴 메시지는 조금 심각하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나 매체가 주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이미 결론 난 것이지만 성형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생각에는 문제가 없냐는 거지요. 20대 직장여성이 몇 달치 월급을 모아 명품 가방을 사서 40대 여성에게 자랑을 했더니 40대 여성이 “에이, 그 돈으로 수술해서 예뻐지지. 그러면 남자친구가 가방 사줄 텐데”라고 했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성형열풍에 휩싸인 것을 두고 영화적 선택이 개인적 선택으로 옮겨간 것으로 판단한다면 과연 저만의 논리비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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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도구화하는 것은 인간소외의 출발점

포스트모던 시대를 냉철하게 진단한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la societe de consommation, 1970)>에서 현대인들의 소비 욕망을 정확하게 분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이 풍요로운 ‘사물’로 둘러싸인 현대 사회는 생산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가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식을 파괴합니다. 즉, ‘생산은 집단으로 이루어지지만 소비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일거야’라는 인식을 바꿔놓습니다. 사람들은 개성적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성 자체가 유행이 되고 집단성을 띠게 된다는 거지요.

소비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처음에 상류층에 의해 생성된 소비행태는 희소성을 띠며 향유되다 일반화, 보편화의 길을 거쳐 대중에게 파고듭니다. 소비의 주체가 되는 대중은 언제나 상향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겁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유명 연예인이 입고 나온 옷이나 장신구는 그 다음날 시장에 전격적으로 진열됩니다. 옷이 기능만을 지향하는 시대가 아니라 유행이 되고, 신분이 되는 이미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소비의 최종 지점이 ‘몸’이라고 보드리야르는 선언합니다. 몸을 성형하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가꾸고 개인의 몸을 고부가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도구적 세계관은 몸마저 대상화하면서 우리를 경쟁구조의 일부로 인식하게 합니다. 성형열풍이 온 사회를 휩쓸고,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성형쇼핑’을 오는 요즘 세태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난감할 따름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몸을 가꾸는 것은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몸’에 대한 지나친 우리 사회의 호들갑을 인정한다면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이 사회에 의해 소외되는 일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의무론적 윤리설이나 칸트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타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윤리의식의 기본입니다. 다시 말해 타인을 존재 목적으로서의 ‘인격’이 아니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타자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런 기본 윤리가 있어야 할 판에, 스스로의 몸을 신분 상승이나 물질적 권력 관계를 선점하기 위해 수단화한다는 것은 인격적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편리해지기 위해 만든 물질과 문명에 거꾸로 인간이 지배받고 종속되는 일을 인간소외라고 규정한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일어나는 셈이지요.

스스로의 몸을 도구화하는 것은 ‘인간’이 현대사회에서 서서히 상실되어 가는 출발점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글 | 상상공감 <카페人>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