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홀로 밤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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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에 걸어보는 건 어때?’ <쿰바야> 노래로 마무리한 레디고스를 떠나 걷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였다. 내 안의 목소리다. 자, 이건 잘 생각해봐야해. 이제 끝없는 평원이 이어진 메세타 고원 길로 접어들었다. 밤이라고 길을 헤매진 않겠지. 날도 좋으니 별도 달도 뜨겠고 늑대가 나타나지는 않겠지. 스페인의 야생동물이 뭐가 있더라. 차례차례 떠오른 생각의 끝에 기분 좋게 밤길을 걷는 내 모습이 있었다. 좋아, 나 자신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좋아, 그럼 밤에 만나세’

내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

같이 걷던 홍천 어르신의 발에 탈이 났다. 아무래도 며칠 젊은 동행들과 보조를 맞춰 걷느라 조금 무리하신 탓이다. 가기로 한 길의 중간쯤에 있는 사군이라는 마을에 머무르기로 했다. 멋진 수도원 건물에 붙어있는 알베르게다. 안을 보니 깔끔하고 주인도 친절하다. 친구들도 남아서 같이 모시고 오겠다 하니 마음이 놓인다. “잘 돌보시고 천천히 오셔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려, 걷다가 또 보세. 먼저 가요.” “부엔 까미노.”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와 들판을 혼자 걷기 시작하자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 사이를 죽죽 나아가는 재미가 있다. 혼자 걸으면 파란 하늘과 구름, 길이 사라지는 곳과 주위 풍경이 들어온다. 풍경에 지치면 신발 코와 떠오르는 생각이 보인다. 그래, 그랬구나, 미처 못 나눈 내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가 불러낸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더 지치면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아, 저녁 무얼 먹을까, 숙소의 침대가 편할까, 이 두 가지 생각만 남는다. 그래 잘 먹고 잘 자는 게 최고.

밤에 걸으려면 준비가 필요하겠다 싶어 일단 알베르게에 들어가기로 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친구 프랜치스가 소개해준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수도원에서 도네이션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순례자들이 하룻밤 묵고 떠나기 전에 기부금을 낸다. 이런 곳은 특별히 순례자를 축복하는 미사가 있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순례길의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 많다. 도네이션을 ‘공짜’로 읽는 순례자가 많은 게 문제긴 하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스파게티와 와인, 바게뜨와 이름 모를 샐러드로 차린 멋진 저녁을 마치고 몇몇 친구들에게 밤에 걷겠다고 했다. “왜?” “그냥, 그러고 싶어서.” 동양인은 이상한 생각을 하는군, 이라는 눈빛. 재미있겠다는 호기심어린 눈빛. “문제가 하나 있어.” “무슨 문제지?” “여기는 수도원이 운영하는 곳이라 9시면 닫거든? 그리고 나가는 출구 앞에는 호스피탈레라(수녀님)가 늘 있어. 밤에 나가는 건 쉽지 않을걸.” 뭐 내일 아침에 사라졌다고 소동이 벌어지겠나, 여튼 나는 밤에 나갈 테니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설명을 해 달라 부탁했다.

배낭을 챙겨 입구로 나가니 마침 호스피탈레라가 자리를 비웠다. 기부금 통에 돈을 넣고 쇠장식이 박힌 두툼한 나무문을 살짝 밀고 나왔다. 삐걱이는 소리가 났지만 크지 않았다. 뺨에 닿는 밤바람이 시원했다.

마을 어귀를 빠져나올 때 개가 컹컹 짖었다. 심장이 조금 오그라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성당 위로 달이 떠있다. 끝없이 펼쳐진 한 밤의 메세타 평원이다. 오른쪽에 지평선과 수평이 되게 낮게 누운 북두칠성이 보였다. 내가 식별할 수 있는 세 개의 별자리 중 하나다. 국자 끝을 늘이면 북극성, 그 맞은 편 W자의 카시오페이아자리, 그리고 가운데 3연성이 있는 오리온자리 이렇게 세 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자리 중에 알아볼 수 있는 게 겨우 셋이라니.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국자 각도가 좀 이상한 건 여기가 스페인이기 때문이겠지.

길게 누운 북두칠성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뒤로 마을 불빛이 사라지고 아주 멀리서 깜빡이는 작은 불빛만 보였다. 추수를 마친 밀밭의 약간 스산한 내음. 짙은 어둠이 편안했다. 무섭지 않았다. 물론 내가 아저씨라 그랬겠지. <연금술사>에 나오는 양치기 산티아고 같은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듯한 기분, 세상에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은 느낌. 귀가 조금 시리긴 했지만 바람은 상쾌했다. 먼지와 열기가 올라오던 메마른 한낮의 메세타와 달랐다. 어둠에 젖어 기분 좋게 착 가라앉은 길이다. 발을 딛을 때 어둠이 살짝 묻어 올라오는 듯했다.

양치기 산티아고의 기분은 딱 한 시간이었다. 바람이 점점 차가와졌다. 10월 중순이 넘었으니 그럴만하다. 배낭을 열고 파카를 꺼내 덧입고 윈드자켓의 모자를 덮어썼다. 견딜만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더 걸었다. 어디쯤 온 걸까? 변함없이 단조로운 길이었다. 똑같은 간격의 가로수와 돌 벤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기분 좋은 상쾌함은 사라진지 오래다. 헉헉대는 내 숨소리만 귀에 들린다. 얼마나 더 온 걸까? 점점 다리가 무거워졌다. 아, 졸린다. 주변에는 불빛 하나 없다. 안되겠다. 좀 자고 가야겠다. 배낭을 열어 은박깔개를 꺼낸다. 돌 벤치 바닥에 깔고 플리스 원단으로 만든 두터운 잠옷바지를 꺼내서 덧입었다. 다 껴입고 침낭에 들어가서 은박깔개의 한 귀퉁이를 잡아 둘둘 감았다. 바람이 휘이잉 지나간다. 목이 시리다. 손에 쥔 목도리도 둘렀다. 금세 바람 소리가 귀에서 점점 멀어진다.

‘You are my hero’, 나에게도 말해야지

얼마나 잤을까? 새벽 3시다.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였나보다. 잠에서 깨어나면 더 춥다. 서둘러 배낭을 싸서 다시 걷는다. 걸으면 덜 춥다. 내가 왜 한밤의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했던가. 내 안의 나는 아무 말이 없다. 날이 샐 무렵 마을입구가 나왔다. 아, 다시 졸린다. 안되겠어.

두 번째 노숙은 신속하다. 경험치가 올랐다. 스틱 따박이는 소리에 다시 깨어났다. 젊은 독일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지나간다. 참 부지런도 하셔라. 이 새벽에. 순례길도 군단 행진하듯 걷는다. 다시 일어나서 걷지만 내 다리로 걸었는지 다리에 실려 왔는지 모르겠다. 해가 나자 기온도 올라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오기와 호기심이 일었다.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 일찍 문을 연 카페를 만나는 것만큼 반가운 일이 있을까. 작은 소도시인 뮬라스 어귀 카페 문을 열고 배낭을 내려놓으며 외쳤다. “까페 콘 레체 그랑데!” (우유 넣은 커피 큰 잔)

몸을 녹이고 나온 나는 시청 광장 분수대에서 옷을 가볍게 갈아입고 조금 더 걸었다. 까페 콘 레체 그랑데 한 잔의 힘은 6km 정도였다. 뮬라스보다 조금 작은 마을 빌라렌테의 사설 알베르게에 들어갔고 돈을 찾고 장을 봐서 볶음밥을 해먹었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딱 한 시간 세상의 비밀을 본 듯했고 춥고 졸리고 배고팠다. 꼬박 만 하루를 걸은 거리는 60km. 서울에서 북쪽으로 걸었으면 개성을 지나서 7km를 더 갈 수 있다. 꽤 걸었네, 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정도 뒤 한 친구가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거는 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그 날 묵었던 알베르게에 같이 있었고 밤에 걷겠다는 내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을 땐 ‘설마 걸을까’ 했는데 아침에 자리에 없어서 놀랐다고 했다. 내가 나간 뒤에 소동 같은 건 없었고 그 날 알베르게에 묵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고. 이야기 말미에 환한 얼굴로 “You are my hero”라고 말한다. 왠지 쑥스럽지만 진심으로 말하는 얼굴이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줘야지 생각했다.

나중에, 이 길을 생각하니 영어로 노랫말이 떠올랐다. 맞춰서 노래를 짓고 나니 블루스 풍의 노래였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에서 왠 블루스하다 그러려니 했다. 밤에 걸었으니 블루스겠지. 나 자신과 오래 걸었던 길.

Real Purpose 진짜 바라는 건

Our purpose is not to get to Santiago.
Real purpose is being on the way.
Our purpose is not to make so many friends.
Real purpose is to be a true friend of yourself.
Our purpose is not to follow the yellow arrows.
Real purpose is to find it in your life. hey~

내가 바라는 건 산티아고 닿는 게 아냐
진짜 바라는 건 늘 길 위에 있는 것
내가 바라는 건 더 많은 친구가 아냐
진짜 바라는 건 나 자신의 친구가 되는 것
내가 바라는 건 노란 화살표가 아냐
진짜 바라는 건 내 영혼이 가고픈 길, 헤이~

_ <카페의 서재> 제2권 《산티아고 길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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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