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쿰바야, 여기 오소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난생 처음 혼자 떠난 외국여행이었다. 출장이나 일로 가는 것 말고, 우르르 여권 맡기고 단체로 가는 여행이 아닌, 온전히 홀로 가는 첫 여행이었다. 미리 꼼꼼히 준비하고 친구가 많이 도와줬지만, 결국 혼자 비행기 타고 도착해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혼자 해결해야 하는 거였다.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하면 떼제베를 타고 서쪽 해변 도시, 바용으로 간다. 예약해둔 한인민박에서 하루를 보낸 뒤 기차를 타고 프랑스 길의 출발점인 생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순례자 등록을 하고 하룻밤 자면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이다. 뭐라도 하나 삐끗하면 낭패다. 
자, 나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한다. 둘, 현지유심을 사거나 로밍을 안 해서 전화는 못쓴다. 와이파이 터지는 곳에서만 검색이 된다. 셋, 묵직한 연두(내 배낭의 이름이다)가 늘 등에 업혀있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조건이다.

첫 미션은 파리에서 바용의 한인민박으로 가는 일. 다행히 드골공항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을 만났다. 물어물어 예매한 떼제베 표를 찾고 플랫폼을 달려 3분 전에 탑승했다. 안내방송을 놓치지 않으려 초긴장 상태로 있다가 바용(Bayonne) 역에 내리자 캄캄한 밤이었다. 

자, 이제 24시간 사용가능한 티켓을 끊어 버스를 타고 뜻도 모를 이름의 정류장에 내려 민박집을 찾아가야한다. 물론, 와이파이 안 뜬다. 전화 안 된다. 무사히 민박집에 도착한 건 기적에 가까웠다. 미션 클리어.

비아리츠 바다에서 만난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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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리츠 앞바다를 보며 서 있는 성모상

다음 날 민박집 주인장이 늦은 아침을 권하며 생장 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근처의 휴양도시 비아리츠(Biarritz)를 다녀오라 권한다. 유럽 최고의 휴양지라는 말에 혹했다. 하루짜리 버스 티켓이 아깝기도 했다.

비아리츠에서 바다와 닿은 절벽 위에 세워진 성모상을 만났다. 매일 저 넓은 수평선을 보며 성모상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 앞에 암초 같은 작은 섬 한가운데 십자가를 세운 무덤이 있었다. 저 분은 왜 하필 저곳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을까.

첫 미션을 성공해서 많이 대담해진 나는 손짓발짓으로 식당에서 점심도 시켜먹고 신문과 복권을 파는 잡화점에서 랜턴에 넣을 건전지도 샀지만 성모상 해설 간판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무리였다. 바다위에 걸린 좁은 다리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무덤의 십자가를 보던 나는 머리에서 떠오른 가락 하나가 <섬집아기>가 되고 <등대지기>로 변하더니 <쿰바야>로 넘어가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쿰바야 마이 로드’가 릴레이를 하듯 바통을 넘겨받아 달려갔다.

쿰, 바, 야 하면 잔물결 같은 떨림이 있는 존 바에즈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추억을 하나 꺼냈다. 한창 팝송에 열중하던 중학교 때 용돈 모아 샀던 존 바에즈 카세트테이프다. 깃발을 든 말 탄 기사의 로고가 선명한 뱅가드 레코드사의 음반. 목소리는 기억을 하나 더 꺼낸다. 서아프리카에 도착한 미국인 선교사가 흑인들에게 성가를 가르쳤단다. 흑인들이 미국에 도착한 뒤 교회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Come by Here 주여 여기 오소서”라고 한 대목을 알려주자 “Kum ba ya?” 하고 따라하는 흑인들. 결국 발음교정을 포기한 선교사. 
노예로 미국에 끌려온 흑인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이 노래를 불렀다. 존 바에즈를 비롯한 포크가수들이 흑인들의 노래를 듣고 따서 부른 노래가 <쿰바야(Kumbaya)>다. 미국에서 먼 아프리카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노래. 한국의 한 중학생이 듣고 긴 세월 잊어버렸다가 프랑스 해안의 휴양도시 비아리츠에서 다시 떠올린 노래다. 바용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의자에서 흥얼거린다. 누군가 노래를 하네요(Someone singing Lord, Kumbaya). 네, 바로 접니다.

그저, 잘 살고 잘 늙고 잘 묻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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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암초에 있는 누군가의 무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한국의 어르신은 강원도 홍천에서 목장을 하신다 했다. 부인과 손을 꼭 잡고 걸을 만큼 금슬이 좋다. 생각도 넓게 트이고 식물도 잘 아신다. 이건 먹을 수 있는 거라네, 하며 길에서 딴 서양 산딸기를 권했다. 농대를 나와 직접 목장을 하며 선진 기술을 익히기 위해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일했던 경험을 들려주시기도 했다. 무엇이건 허튼 말이 없는 분이었다. 난 자연스레 그 분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국어가 들리거나 단체 순례객을 마주치면 자리를 피하곤 했다.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는 선착순이고 개인으로 신청해야 하며 빈자리가 없으면 다음 도시로 걸어가야 한다. 숙박비가 저렴하고 요리를 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는 인기가 높았다. 그런 공립 알베르게에 단체로 와서 예약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하던 한국인 성도님들을 만난 후 생긴 습관이다. 그런 차에 좋은 어른을 만난 게 반가웠다.

“안 선생은 무얼 하시나?” “곡도 쓰고 이런 저런 기획일도 합니다.” “노래도 하시나?”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합니다.” “그래? 나는 송창식이 그렇게 좋더라구.” “아, 제가 송창식으로 노래를 배웠습니다. 모창도 합니다.” 어른들 앞에서 재롱잔치 하는 아이처럼 좋아라 한 소절 불러댔다. “안 선생 목소리 좋구먼.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들려줘요.” “네~”

홍천 어르신과 같이 걷다 헤어지다를 반복하던 어느 날, 모처럼 같은 숙소에서 묵게 됐다. 마침 기타도 있었다. 저녁을 마치고 휴게실에서 두 분을 위한 공연을 했다. ‘불후의 명곡- 송창식 편, 산티아고 특집’이다. ‘선운사’로 시작된 노래는 ‘상아의 노래’, ‘사랑이야’, ‘푸르른 날’로 이어지다가 ‘고래사냥’에서 마침내 두 분과 합창이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알베르게의 다른 친구들이 제법 모여 듣는다. 아,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큰 소리를 내기엔 밤이 깊었다. 옆방에선 내일도 먼 길을 걸어야 할 친구들이 잠을 청하고 있다. 코드를 하나 잡고 기타를 퉁기다보니 입에서 ‘쿰바야 마이 로드~’ 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노래한다는 2절, 누군가 기도한다는 3절이 이어졌다. 다른 친구들도 나직하게 따라 부른다. 마지막 소절을 반복하고 노래를 마친 뒤 말했다. 굿 나잇, 굿 슬립, 굿 드림. 문법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는 영어로 인사를 했다.

침대로 들어가기 싫은 사람들과 싸고 맛난 스페인 나바라(Navarra) 지방의 와인을 기울였다. 와인과 안주는 모두 홍천 어르신이 이미 다 계산하고 주무시러 들어가신 뒤다. 누군가는 노래하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술을 마신다. ‘주님, 여기 오소서 Come by here 쿰바야.’

문득, 성모상이 수평선을 보며 무얼 기도하는지, 왜 그 앞에 무덤을 만들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저, 잘 살고 잘 늙고 잘 묻히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이 취한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쿰바야 마이 로드’를 부르는 존 바에즈의 목소리도 여전히 부드럽게 귓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기, 오소서. ‘Come by here 쿰바야.’ 

 

_ <카페의 서재> 제2권 《산티아고 길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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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