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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손인수
에디터 오형석 조경숙 김정현
디자인 이동휘 김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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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카페 2020.10 | Vol.11
월간 카페人  /  제10호  /  카페의 서재
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노래를 나눌 뿐, 묻고 답하는 게 부질없네

너에게 정말 소중한 게 뭐지 
모든 걸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건 뭐지 
그걸 알고 있다면 넌 행복한 사람
그걸 모른다는 넌 아주 행복한 사람이야
멈춰야 할까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면 그건 뭐지, 뭐지, 뭐지 
그걸 알고 있다면 넌 행복한 사람
그걸 모른다는 넌 아주 행복한 사람이야

 

_ 안석희 작사·작곡, <문답무용(問答無用)> 

 

산티에고.jpg
산티에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목소리가 맑고 청아해서 천사가 노래하면 저런 목소리겠다 싶었다. 샤워장에서 흘러나왔다. 누굴까 궁금했지만 알 방법은 없다. 목소리 참 곱다 하고 지나쳤다. 
빌라 투에르타는 작은 마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에 만나는 가장 큰 도시이자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순례길의 출발점인 팜플로냐에서 이틀거리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한 갈래만 있는 게 아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목적지만 같고 출발지는 다른 길들이 몇 개나 있다. 흔히 산티아고 순례길로 잘 알려진 ‘프랑스 길’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마을인 생장에서 출발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길을 팜플로냐에서 출발한다. 굳이 국경 넘어 프랑스에서 출발할 이유가 없다. 파리에서 온 친구는 노틀담 대성당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독일 쾰른에서 온 친구는 쾰른 대성당에서.  

길벗과의 노래 배틀

순례자들은 빌라 투에르타를 지나 조금 큰 도시인 에스텔라에서 묵는다. 큰 도시를 달가워하지 않는 나는 빌라 투에르타에서 묵기로 했다. 작은 사설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찾았고 마침 식당에 걸려있는 기타와 잘 꾸며진 안뜰이 맘에 들었고 방도 깔끔한 데다 가격도 적당해서 바로 짐을 풀었다. 

알베르게.jpg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들고 샤워실로 가다 그 목소리를 들은 거다. 샤워를 마치고 빨래도 기분 좋게 널고 식당으로 가니 걸려있던 기타가 없다. 안뜰 쪽에서 소리가 났다. 가보니 금발의 아가씨가 기타를 치면서 허밍으로 노래를 한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다. 다시 들어도 좋다.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좋아서 하는 수준을 넘었다. 잠시 노래를 쉬는 사이에 말을 걸었다. 목소리 참 좋아요. 

 

며칠 사이 늘은 건 영어일까 뻔뻔스러움일까. ‘니나’라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왔고 휴가라 친구와 같이 왔단다. 관광객을 상대로 한 배에서 일하는 데 가수가 되려고 한단다.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노래를 한다고 했다. 어쩐지 좀 달랐어. 나는 한국에서 왔고 송라이터 라고 소개했더니 어느새 기타가 내 손에 넘어왔다. 한곡 부탁한다고 박수를 친다. 마침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을 때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불렀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니나도 영어로 같이 따라 부른다. 우리말과 영어로 동시에 부르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다. 

자, 그럼 이번에는 니나 차례. 노라 존스의 노래였던 것 같다. 나도 잘 아는 노래. 청아한 노라 존스다. 다시 나에게 기타가 돌아왔다. 이번엔 존 레논의 ‘이매진’. 기타는 다시 니나 손에. 내가 모르는 노래다. 블루스가 살짝 섞인 포크 같다. 나중에 물어보니 뉴질랜드의 포크송인데 카페에서 부르는 레퍼토리라고 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주변에 사람들이 꽤 모였다. 순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래를 좋아한다. 아무나 기타를 잡고 꽥꽥 노래를 해도 대환영이다. 남다른 목소리의 가수지망생이 있는 데 안 모일리가 없지. 자, 관객도 꽤 모였고 기타가 다시 왔지만, 이제 외우는 영어노래가 없다. 내가 지은 노래를 한 곡 하겠다고 했다. 아무도 못 알아들을 한국어 노래, 살짝 걱정을 안고 시작한다. 

“너에게 정말 소중한 게 뭐지. 모든 걸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건...” 모두 귀 기울여 들어주고 있다. 마치자 따뜻한 박수가 나온다. 때마침, 알베르게의 호스피탈레로(숙소 봉사자)가 나와서 외친다. 자,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다들 조금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하루 종일 걸어온 순례자에게 저녁밥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잘 들었다는 인사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니 니나와 친구 에린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남았다. 니나와 에린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나도 그렇다. 의도치 않았던 노래 배틀을 멋지게 잘 마쳤지.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다. 

마지막 노래 좋았어요, 라고 니나가 말한다. 노래 제목을 설명할 수가 없다. 제목이 ‘문답무용’인데 묻고 답하는 게 부질없다는 뜻이고, 무협영화에 자주 나오는데, “드디어 만났구나 아버지의 원수”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거짓말, 자 칼을 뽑아라. 문답무용!” 이런 뒤 싸운다는 설명은 내 영어와 뻔뻔스러움이 늘었다 해도 불가능하다. 

겨우 머리를 뒤져 “What is the most precious thing in your life(너에게 가장 소중한 게 뭐지)?”란 문장을 들려줬다. 니나가 끄덕끄덕한다. 아, 이 노래 혹시 맘에 들면 부를래? 니나 목소리에 잘 맞을 것 같아. 혹시, 니나가 쓴 글이 있다면 줄래? 나 요즘 영어노랫말에 곡 붙이는 게 꽤 재밌더라구. 좋다고 한다. 멋진 일이라고 말하는 에린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근데 연락처 주고받는 걸 까먹었다. 하하하. 출발한 지 7일째. 순례길 초반의 에피소드다. 

목적지 산티아고에서 만난 기적

2009_9_3.JPG
종착지 산티에고 전경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은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이라는 마을에서 출발한 날로부터 34일이 지난 뒤다. 800km의 먼 길을 큰 탈 없이 잘 걸었다. 산티아고 광장을 걸어 들어갈 때의 느낌을 말로 설명하는 건 좀 어렵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아름다운 환영 미사도. 

순례길 후반에 친해진 한국인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가고 있었다. 산티아고 뒷골목은 좁고 복잡하다. 비도 슬금슬금 온다. 우비를 뒤집어쓰고 골목길을 걷는 데 누가 부른다. 돌아보니 니나가 서있다. 서로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더니 어서 가잔다. 한 가게로 들어가더니 손으로 에린의 눈을 가리고 데리고 나온다. 에린, 누가 있나 봐봐. 니나가 손을 떼자 에린이 팔짝팔짝 뛰면서 ‘OMG(오마이갓)’을 연발한다. 산티아고 길엔 기적이 흔하다. 그렇지만 27일 동안 서로 다른 곳에서 묵으며 같은 날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같은 시간에 뒷골목 한 길에서 만날 확률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꽤 큰 도시다. 눈물을 닦고 좀 진정이 된 에린과 서로 어떻게 걸었는지 이야기했다. 부르고스는 하루 전에 지나갔지. 아 거기서는 엇갈렸구나. 27일 간 서로 조금씩 어긋나면서 결국 산티아고에서 만났다. 약속 기억해? 그제서야 폰을 꺼내 서로의 메일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노래를 보내지는 않았다. 니나의 글도 오지 않았다.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노라 존스의 노래를 들을 때. 아주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들을 때. 뉴질랜드 이야기를 들을 때. 가끔 문답무용을 부를 때. 작은 알베르게 안뜰과 니나의 목소리. 비가 오는 산티아고 뒷골목에서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과 OMG을 연발하는 에린의 얼굴이 후욱 떠오른다. 어쩌면 니나도 에린도 그렇게 나를 떠올릴지 모른다. 이매진, 바람만이 아는 대답, 한국, 가끔 노라 존스의 노래. 맘이 푸근해진다. 

그래,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고 잠시 스치며 서로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길 위의 노래를. 뭐, 묻고 답할 필요 있을까. 

 

_ <카페의 서재> 제2권 《산티아고 길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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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