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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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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카페 2020.09 | Vol.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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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바다의 별, 진주를 연주한 밤

1999년, 새 천년을 코앞에 둘 즈음 음반 디렉터를 맡았다. 새 노래는 나오지 않고 녹음 날만 다가왔다. 초조했다. 목을 적셔줄 맑고 시원한 샘물이 아니라 맨 밑바닥의 흙탕물, 긁어내다 흐른 피 조금, 이런 노래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맞은편, 코트 깃을 올리고 걸어가는 한 사내의 실루엣이 지나갔다. 고개를 떨군 듯했다. 아직 IMF가 여전한 때였다. 방에 들어와 가방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다 글을 적었다. 진주, 라는 노래가 됐다.

 

가슴이 아파와 상처를 생각해요
깊이 박힌 가시와 그 아픔을 느껴요
숱한 밤 깨어 홀로인 날 많았죠
이 눈물로 감싸면 진주가 되나요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걷는 그대
상처가 있나요 아픔을 느끼나요 나처럼 뒤척이며 눈물로 감싸나요
괜찮아요, 세상은 바다
우린 상처입고 그 아픔으로 진주를 키우죠
누구나 가슴에 영롱한 진주를 키우죠

_ 안석희. 1999. <진주>

‘괜찮아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은 거였네

괜찮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래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석연치 않았다. 급했고 검토할 여유와 시간이 모자랐던 것 같다. 일단 녹음을 마쳤다. 다시 듣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성석제씨 소설집 서문을 읽었다. 그대로 옮겨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류의 동네 장기 같은 훈수라든가, ‘소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답니다’ 같은 딴 나라 딴 세상에서나 통하는 위안, ‘진주는 조개의 아픔 속에서 태어난다’ 같은 전통있는 가짜 사탕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그 뒤로 몇 번 공연에 올렸지만 그리 자주 입에 오르는 노래는 아니었다. 얼마 전 작은 공연을 준비하면서 생각이 났다. 천천히, 천천히 불렀다. 기타 줄을 쓰다듬듯 반주를 했다. 그렇게 부르다보니 알게 됐다. 결국 이 노래는 맨 뒤의 ‘괜찮아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은 거였네. 비록 그게 가짜 사탕일지라도.

노래를 다 부른 뒤 여운이 남아 간단한 후주를 만들어 붙였다. 후주는 맘에 들었다. 산티아고 행을 준비하던 즈음 다시 떠올랐다. 노랫말 없는 연주곡도 하나 준비하면 어떨까? 말이 안 통할 때. 그래, 말 없는 게 좋을 때도 있지. 후주 선율에 다른 선율을 하나 더해서 얼추 곡으로 완성했다. 그럴 듯했다. 친구에게 들려줬다. 어때? 네, 나쁘지는 않군요.

‘알베르게’에서 열린 연주회

산티아고 길을 걷는 순례자가 머무르는 숙소를 ‘알베르게’라고 한다.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남성을 ‘호스피탈레로’라고 부른다. 여성은 ‘호스피탈레라’다. 병원인 호스피탈과 같은 어원이다. 오래 걸어온 순례자들이 이곳저곳 아픈 경우가 많았기에 숙박업소의 주인이 돌보는 이가 되었다. 먼 길을 온 순례자를 맞이해서 한 끼 잘 대접하고 편한 잠자리를 마련해서 다음 날 떠나보내는 게 알베르게의 전통이다.

산티아고 순례자가 머무르는 숙소 ‘알베르게’

아무나 호스피탈레로를 할 수 없다. 산티아고 길을 완주하거나, 적어도 100km를 걸은 사람에게만 자격증을 준다. 산티아고 길은 천년 넘게 순례자들이 만들다시피 한 길이니 이런 환대와 돌봄의 문화가 있다. 지금은 많이 상업화되면서 이 전통이 사라지고 있지만 작은 마을이나 소도시,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는 이런 환대의 문화가 살아있다. 그 날 도착한 알베르게가 바로 그런 드문 곳의 하나였다.

들어가니 방에 침대가 없다. 나무판에 스펀지를 붙이고 가죽 천으로 둘둘 말은 널찍한 긴 판자를 하나씩 준다. 그걸 바닥에 깔고 자는 거다. 당황스럽지만 곧 익숙해진다. 동료 순례자들도 낄낄대면서 판자를 깐다. 붙여놓고 뒹군다. 적어도 2층 침대처럼 자다 굴러 떨어질 염려는 없다.

한 구석에 자리를 만들고 가서 등록한다. 호스피탈레로가 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I’m a songwriter”라고 소개한다. “Can you play guitar?” 물론이지, 칠 수 있다. “O,K, Gooooood~.”

이 짧은 대화가 난 데 없는 공연을 만들었다. 샤워를 하고 저녁밥을 먹기 위해 좀 너른 식당에 모였다. 호스피탈레로가 부른다. 기타를 준다. 식전에 공연을 한 번 해주면 어떠냐고 말한 듯하다. 음, 한다 안한다 말이 통하는 상황이 아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16개국에서 온 친구들이 모였다. 머리 모양과 피부색, 차림새가 다양한 친구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초롱거린다. 기타를 건네받고 나가면서 무슨 노래를 할까 생각했다. 왠지, 먼저 아무 말 없이 연주를 하고 싶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익숙하지 않은 스페니시 기타. 첫 음을 퉁기고 나자 의외로 편안하게 가락이 이어진다. 그래 스페인에도 바다는 있고, 누구나 살다보면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고, 이렇게 산티아고 길에서 몇 억분의 일 확률로 모여들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나도 이 순간에 여기 있게 된 거겠지.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알베르게 안에 있는 작은 예배당

함께 나눠 먹은 빵

연주 중간에 갑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허밍으로 연주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손에 쥔 기타와 우웅 하고 울림이 생겨나 누군가에게 닿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귀 기울여 잘 들어주는 걸 알 수 있다. 연주를 잘하거나 해서 그런 게 아니란 것도. 곡을 마치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This song’s name(?) is, the pearl. Can you imagine that?”

밥 준비 다 됐다, 이제 밥 먹자 할 때까지, 할 수 있는 노래는 대충 다 불렀다. 다행히 레퍼토리가 똑 떨어지기 전에 밥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다행히 모두 편안하게 들은 듯했다. 16개국 서른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한 자리에서 서로 밥을 나누어 먹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은 없었지만 다들 충분히 배불리 먹었다. 나는 한 입 가득 빵을 베어 물고 우물거리다가 속으로 ‘아, 밥 노래 부를 걸’하고 생각했다. 밥상 앞에서 부르는 노래라면 무조건 그거잖아. 농활 때 식탁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

빵을 꿀꺽 삼키고 곧 고개를 저었다. 바다의 별인 ‘진주’를 연주했으니까 오늘은 됐다. 충분해. 미소를 머금은 호스피탈레로가 지나가며 어깨를 툭 친다 “One more bread?” 물론이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오늘 27km를 걸어 여기까지 온 순례자라구.

- <카페의 서재> 제2권 《산티아고 길노래》 중

순례자들이 돌 하나씩 갖다놓아 돌 문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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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