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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에세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오!’

그저 걷다보면

[드로잉 에세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오!’

“그 정도로 사색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고 그 정도로 경험하고 그 정도로 나다워지는 때는 혼자서 걸어서 여행할 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 두 발로 걷는 일은 내 머리에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에 나오는 구절이다.  

걷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얽혀있는 생각들이 풀리는 느낌이 든다. 사유와 걷기는 한 몸이다.
나에게 걷기는 사색이자 치유이고, 수행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의 여유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에서 ‘그저 걷기’는 숨통을 트이게 한다. 특히나 초록빛이 얼마나 다양하고 꽃보다 화려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5월의 숲길 걷기를 사랑한다. 담록으로 우거진 숲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벌써 무장해제 된다. 숲속의 새소리와 나무 흔들리는 소리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사람이 많은 산길에서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팟케스트를 들으며 천천히 걷는 시간도 즐겁다.  

걷기에 대해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가 소설 《좀머 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 글, 장자크 상페 그림)의 ‘좀머 씨’이다. 장자크 상페의 단순하지만 힘 있는 그림체도 마음에 든다. 하는 행동마다 귀여운 개구쟁이 소년이 주인공이지만 언제나 걷기만 하는, 슬픈 사연을 간직한 듯한 미스테리한 좀머 씨에 더 마음이 쓰인다.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걷기만 하는 사람. 오로지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걷기만 한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잊히기 위해 오로지 걷기에만 열중하는 그의 모습에 가슴 아프다.  

소년이 그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그러니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오!’이다. 폭우가 몰아치던 날 주인공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아빠가 좀머 씨에게 같이 타자고 권하자 그가 대뜸 한 말이다. 사소한 친절도 거부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는 그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가끔 나도 좀머 씨처럼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카톡 프로필 사진도 좀머 씨처럼 지팡이를 들고 걸어가는 선비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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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걷기도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트를 들고 카페를 찾는다. 카페에서 주로 드로잉을 하는데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고 뿌듯함 마저 느끼곤 한다. 얼마 전 미술관에서 ‘조선의 병풍전’을 보다가 8폭 병풍 그림 중 아주 작은 크기이지만 지팡이를 짚고 이파리가 돋기 시작한 연두빛 버드나무 아래를 걷고 있는 선비가 눈에 들어왔다. 초봄인 듯한 산길을 등허리 구부정한 선비가 걷는 모습에 왜 그림 마음이 쓰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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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와 선비의 공통점은 아주 작게 묘사됐다는 점이다. 자연의 일부처럼. 이들을 따라 그리며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함께 걸어본다. 이번 주말에도 신발끈 꽉 조이고 나서봐야겠다. 아직 지지 않은 아카시아 향기가 싱그러운 5월의 숲으로.

그림, 글 | 조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