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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에세이]

비밀의 화원, 옥상 스케치

비밀의 화원이 있다. 오후 5시 30분에 문이 열린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찾아가야 비로소 문이 열리는 곳이다. 사무실 옥상에 있는 작은 하늘정원이 나만의 비밀의 화원이다. 화원에 갈 때는 사무실이 있는 13층에서 21층 옥상까지 계단을 이용한다. 간단하게 스케치할 작은 수첩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기대감으로 두근거린다. 오늘은 무슨 꽃이 피었을까. 어제 백합 꽃 몽우리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었는데 오늘은 피었을까.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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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밀집지역의 옥상이란, 명실상부 흡연 장소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계단에서도 담배 냄새가 진동한다. 계단을 오르며 담배 냄새 사이로 희미한 꽃향기를 맡는다. 조금씩 다른 꽃향기는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자동차 붕붕~’ 꽃향기가 나면 어김없이 입가에 맴도는 아이들 어렸을 적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던 꼬마자동차붕붕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오르다 보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만난다. 계단 끝, 자작나무의 수려한 자태가 나타나면 비밀 화원의 문이 열린다.  

개복숭아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정원에 봄이 온다. 하늘메발톱이 꽃순을 밀어 올리고 상사화와 원추리, 동자꽃과 애기범부채, 우산나물 등 야생화들이 줄줄이 꽃을 피운다. 넓지 않은 장소에서 참 아기자기하게도 여러 나무와 꽃들이 자란다. 벤치 위로 드리워진 포도는 머루처럼 알이 작지만 넝쿨만큼은 좋은 그늘이 되어 준다. 여름내 능소화가 벤치 위를 덮고, 인동초꽃도 향기를 내며 오랫동안 피어 담배냄새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나타낸다.  

‘금연’, ‘담배 꽁초 투척 금지’ 등 화재 이후 온갖 경고 문구들이 붙어있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포도 맛 보세요’, ‘백합 향기 맡아보세요’ 등등으로 고쳐 읽는다. 오랫동안 마당이 있는 집에 작은 꽃밭을 가꾸고 싶은 꿈이 있었다. 온갖 과실수와 화초를 심고 가꾸며 하루하루 자라는 식물들을 스케치로 남기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거창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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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옥상에 올라가 꽃을 보고 향기를 맡곤 하다가 아쉬운 마음에 그림으로 남겨보기로 했다. 사진을 보고 그리기보다 직접 현장에서 그리기를 오랫동안 바라왔지만 골목이나 사람들을 그리기에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진을 보고 그리다보니 그림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고 점점 그리지 않게 된다. 현장에서 그리기에 식물이 안성맞춤이다. 

오전부터 하루 종일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흡연자들을 피해 느지막이 비밀의 화원에 올라간다. 6시를 앞둔 퇴근 무렵이라 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손바닥만 한 스케치북을 펴고 며칠 전부터 피기 시작한 백합을 그려나간다. 아무에게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기분 좋다. 비 온 후라 백합의 향기는 더없이 향기롭고 매혹적이다. 코를 벌름거리며 꽃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스케치를 한다. 백합을 한 송이 그리고 난 후 고개를 드니 저쪽에서 누군가 힐끔거린다. 신경이 쓰이지만 애써 무시하고 백합 몇 송이를 더 그린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집중해본다. 한참 후 멈칫거리며 다가온 사람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 옥상 문 닫을 시간입니다.”
헉! 관리인이었구나. 옥상 출입문 닫는 시간을 7시로 알고 있었는데 앞당겨졌나보다. 퇴근시간이 됐는데 그림 그린다고 태평하게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며 얼마나 애가 탔을까.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툭툭 털고 일어난다.  

그날 이후 시간을 조금 앞당겼다. 4~5시 무렵은 졸음과 나른함으로 담배 피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이니 그 시간에 갈 수는 없고 대략 5시 30분쯤 올라가서 산책을 하고 여유가 되면 작은 그림이라도 그리려고 노력한다. 산책을 할 수 있는 자투리 공간이라도 있음에, 짬을 내 간단한 스케치라도 할 수 있는 취미가 있음에 감사하다.
오늘도 꽃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두리번거린다. 그리곤 스케치북을 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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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글 | 조경숙
[드로잉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