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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여행] 인제 자작나무 숲

겨울왕국의 얼음궁전을 꿈꾸며

이곳은 어디인가. 분명 한국인데 외국에 온 것 같은 기분. 새하얀 나무 둥치들이 경이롭게 서 있는 인제의 자작나무 숲. 이 길 끝에 <겨울왕국>의 얼음 궁전이 나올 것 같고, 숲을 벗어나면 <브레이킹 던>의 매력적인 흡혈귀들이 플라잉 야구를 하고 있을 것 같다. 여긴, 핀란드 자작나무 숲이 틀림없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낯선 느낌을 받는 건 늘 경이로운 일이다. 새까만 소나무와 전나무 숲이 대부분인 한국에 이렇게 새하얀 나무숲이 있었다니. 그 아름다움에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쩜 4계절 변하지 않고 이렇게 새하얀 옷을 입고 있다고? 나뭇가지와 나무 둥치 모두 이렇게 예쁜 색이라니. 정말 태생이 다른 나무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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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는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해서 자작나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겨울 나무의 상징처럼 보이는 이 나무는 자신의 몸을 태워 따뜻함을 주다가 ‘자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니 마음이 짠하면서도 따뜻해진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입장한 듯한 기분. 그래서일까. 평소와는 다른 생각이 든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내 기억 속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자작나무 숲의 모습은 영화 <남과 여>에서의 두 남녀였다. 알코올중독의 아내가 있는 남자와 ADHD(주의력 결핍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둔 여자. 두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둘 다 지친 일상에 결핍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에게 가족은 지키기 위한 존재이자 부단히 도망치고 싶기도 한 존재였다. 얇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괜찮은 척 경계를 지키며 살던 두 사람이 핀란드 숲길에서 만났다. 그리고 눈 덮인 자작나무 숲길을 오래도록 걸었다. 하얀 설원에 하얀 옷을 입은 자작나무가 지친 두 사람에게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위로를 보내는 듯 했다. 옳지 않지만, 안타까운 사랑을 한 두 사람. 하얀 자작나무는 그들의 비밀을 말없이 지켜주는 듯했다.

자작나무 숲길을 걸으며 나도 핀란드의 설원을 걷는 듯했다. 이 숲 끝에는 또 어떤 인연과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다음엔 <겨울왕국>의 얼음궁전을 꿈꾸며 눈 덮인 자작나무 숲길로 다시 찾아와야겠다.
 

그림/글. 배은정
배은정 님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취미입니다. 사진보다 그림으로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