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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티파티와 커피파티

시민정치운동의 키워드, 차와 커피

2009년 미국 국회의사당 서쪽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수적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단체 이름을 티파티 운동(TEA Party Movement)이라고 소개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적 성격의 단체들이 오바마가 추진하려던 의료보험 개혁정책을 계기로 집단화한 것이다. 이들은 개인, 작은 정부, 미국 역사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세금은 낼만큼 냈다(Taxed Enough Already : TEA)’라고 쓴 팻말을 흔들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들의 이름이 티파티가 된 배경이다.  

반면 커피파티(Coffee Party)는 티파티와 대척점에 있었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복지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진보적 단체들의 시민운동이었다. 티파티에서 티를 빼고 커피를 넣어 새로운 명칭을 만들었다. 이런 갈등이 결국 세금문제에서 비롯된 것처럼 티파티의 어원이자 미국 독립전쟁의 계기가 된 보스턴 차 사건도 이와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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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티파티 회원들이 ‘이미 세금은 낼만큼 냈다(Taxed Enough Already : TEA)’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by a1mega, flickr (CC BY)

1773년 ‘자유의 아들들’의 거사

1773년 12월 16일 저녁 보스턴 항구는 유난히 조용했다.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인디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항구는 이내 긴장감에 휩싸였다. 얼굴에 석탄가루를 잔뜩 묻혀 누군지 뚜렷이 구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손도끼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단체행동을 하려는 의도라는 것쯤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지도자로 보이는 세 명이 신호를 보내자 150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세 무리로 나누어 정박 중이던 세 척의 배로 일사분란하게 뛰어올랐다. 이들의 정체는 ‘자유의 아들들’로 불린 보스턴 백인 주민들이었다. 세 그룹으로 나누어 50여 명씩 무리를 지어 올드사우스 교회에서부터 출발한 이들은 인디언 모호크족으로 변장해 이번 행동이 불러올지 모르는 징계와 처벌을 면하려 했다.  

중국에서 가져온 차를 하역하기 위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의 선원들은 인디언으로 위장한 백인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선박의 소유주는 영국 동인도회사였다. 배로 뛰어든 사람들의 리더가 화물칸으로 내려가는 갑판의 열쇠를 요구하자 선장은 사태의 심각함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리더 중 한 사람이 미국 건국의 주역 중 하나로 평가받는 새뮤얼 애덤스였다. 그는 일행들을 통솔해 비밀결사의 작전을 무사히 성공시킨다. 그들은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 선원들과 큰 충돌 없이 다음날 하역을 기다리던 무역품을 모두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다.
체념한 선장은 배의 파손을 막기 위해 그들이 중국으로부터 실어왔던 무역품을 포기했다. 그 무역품은 중국 푸젠성 우이산에서 생산된 우이옌(武夷嚴) 차였다. 모두 342상자에 들어 있던 차가 도끼를 든 백인들에 의해 보스턴 겨울바다에 뿌려졌다. 이날 저녁에 벌어진 일이 후에 ‘보스턴 차 사건’으로 알려진 ‘보스턴 티파티(Boston Tea Par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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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차 사건을 그린 그림

돈보다 독립…미국독립전쟁의 도화선

이들이 금전적으로 상당한 가치였던 차를 일부러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두 종류의 차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었다. 하나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 수입하는 차였고,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밀수하는 차였다. 당시 차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금의 커피처럼 대중적 인기를 차가 누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차 수요는 영국 본토를 비롯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늘어났고, 가격은 점차 올라갔다. 때문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밀수 차가 점점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영국 의회는 발 빠르게 차에 관한 세법을 통과시켰다. 영국 동인도회사에 독점권을 부여하며 차에 관한 관세를 실질적으로 없애도록 한 것이다.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동인도회사가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식민지인들과 직거래를 하게 하면 밀수도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다. 얼핏 보기에 이 조례는 관세가 없어지니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이익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제적 실리와 정치적 명분 사이에서 영국 본토인들과 아메리카 식민지인들 사이에 뚜렷한 인식 차이가 있었다. 식민지인들은 경제적 이익도 장기적으로 보면 독점체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값을 올릴 수 있고, 미국 상인들을 파산시킬 거라 여겼다. 이에 당장의 이득보다 정치적 명분인 자치를 선택했다. 보스턴 차 사건이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는 이런 이유에서다. 

이 사건은 미국 각지에서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가정에서는 영국 차 불매 운동을 지지하는 바람이 불었고 여성들은 ‘자유의 딸들’이라는 결사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식민지의 애국파 지식인들은 더욱 대담하게 그들의 주장을 펼쳤으며 영국의 보수파는 더욱 강경한 노선을 걷게 되었다. 

찻잔 속 ‘미국 역사’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불만은 ‘대표가 없으면 과세도 없다’는 슬로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에서 세금이 사라지면서 훨씬 싼 차를 마실 수 있었지만 식민지인들은 원칙을 더 중요시했다. 그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차 조례가 만들어지는 입법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가 있다고 위법성을 제기한 것. 식민지인들은 식민지에서 대표를 선출해 영국 의회에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한 바 없기에 영국 의회의 결정은 위법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아메리카가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식민지인도 영국인과 똑같은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또한 차 조례는 식민지 의회의 오랜 자치 원칙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영국헌법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배경을 보면 보스턴 차 사건은 값나가는 물건을 불법으로 강탈한 범법행위가 아니었다. 자유와 자치를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이었다. 사건을 주도한 이들이 결사체의 이름을 ‘자유의 아들들’이라 부른 배경이다. 

차 한 잔과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이지만 역사적 배경을 들여다보면 재미있고 궁금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역사를 흔든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사람들은 차나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았을까.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