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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세상을 울린 한 가객의 일생

1970년 9월 3일 정오 무렵, 군부대들이 몰려 있는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의 한 다방에 M2카빈 소총을 든 남자 하나가 들이닥쳤다. 곧이어 남자는 다방레지 등 4명의 여자들을 인질로 잡고 다음날까지 만36시간 동안 군경과 대치하며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날 오후에는 창문 틈으로 현장을 염탐하던 범죄수사대 소속의 군인 하나가 남자가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 일까지 발생했다.

군경과 대치하던 그날 오후 남자는 다방 창문을 열고 배호가 부른 ‘돌아가는 삼각지’ 레코드와 ‘담배 한 보루’를 가져다 줄 것을 요구했다. 남자는 다방전축으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란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근처에서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던 작은형이 달려와 전화로 자수를 권유했으나 남자는 끝내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그날 밤 군경이 다방의 전기를 끊어버리자 남자는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어 전기를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전기 공급이 재개되자 그는 이번에도 전축으로 배호의 <누가 울어>, <빗속에 가버린 사람> 등의 노래를 들었고 이따금씩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박추수(당시 27)로 알려진 부산 출신의 범인은 기자들에게 “범행 동기나 이유는 없다. 그냥 사회에 반항할 따름이다”는 말만 채 남긴 채 다음날 저녁 사건 현장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사건의 범인은 하필 배호의 노래를 좋아했을 뿐,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충동적인 범행 직후, 또 죽음을 결심한 뒤 범인은 어떤 이유로 배호의 노래를 들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던 것일까. 애수에 젖은 저음의 목소리와 가슴을 후비는 듯한 배호의 노래는 정말 그가 기댈 수 있는 생의 마지막 위안이었을까.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버린 배호(1942-1971)는 당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당대의 톱스타였다. 1967년 병상에서 부른 <돌아가는 삼각지>의 빅히트로 톱 가수 반열에 오른 뒤 불과 몇 년 사이에 국내 가요사에 불멸의 신화를 남기고 간 요절가수 배호. 이번호에서는 영원한 ‘국민가수’ 배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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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의 아들, ‘드럼 치는’ 가수

배호의 본명은 배만금으로 훗날 배신웅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 배국민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고향은 중국 산둥성이었다. 해방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배호는 1955년 부친이 사망한 후 부산의 모자원(미성년 자녀가 있는 미망인과 그 자녀를 수용하여 보호하던 복지시설)에 내려가 생활할 만큼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결국 그는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1956년 작은 외삼촌 김광빈이 악단장을 맡고 있던 한 음악단체에 들어간 까까머리 소년은 그 후 드럼 주자로 활동하며 미8군 무대와 방송국에서 스타의 꿈을 키우게 된다.

1964년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3세의 나이에 12인조로 구성된 배호 악단을 결성하고,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드럼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국내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드럼 치는 가수’ 배호의 등장은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서 작은 화제가 되었다.

1964년 배호는 <두메산골>, <굿바이> 등의 노래와 영화주제가 등을 수록한 데뷔음반을 내며 본격적으로 솔로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명가수였던 그는 여전히 기차나 버스를 타고 지방을 돌아다니며 허름한 밤무대에서 공연을 벌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마저도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 할 만큼 무명가수 생활은 비참하기만 했다.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당시 점심, 저녁을 굶은 채 무대에 서는 일이 허다했고 싸구려 술과 담배로 허기를 달래는 일이 많았다. 당연히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기약 없는 무명가수 생활로 심신이 지쳐있던 1966년 기어이 배호에게 신장염 진단이 내려진다. 그때 병상에 누워 있던 배호를 찾아온 것이 그의 삼종숙(아버지의 8촌 형제)이기도 한 작곡가 배상태였다. 한때 대구 KBS 전속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배상태는 군악대 시절 음악이론을 배워 그 즈음 작곡에 몰두해 있었는데 어느 비 오는 날, 전차를 타고 삼각지를 지나던 중 창밖의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접하고 노래 한 곡을 만들어둔 터였다. 배상태는 당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남진과 남일해, 금호동 등을 찾아가 노래를 들려줬으나 세련미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뒤 병상에 누워 있던 배호를 찾아온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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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력 짙은 중저음 보이스로 큰 인기

악보를 받아든 배호는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한다. 거동조차 힘들던 배호는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곧 병상 의자에 앉은 채로 녹음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곡이 훗날 불멸의 히트곡으로 불리게 되는 <돌아가는 삼각지>이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 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이하 중략)

노래가 발표된 뒤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앓는 소리 같다”는 일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대구 KBS에서 장장 5개월 동안이나 정상에 오르며 ‘배호 시대’의 개막을 만천하에 알렸다. 여세를 몰아 배호는 역시 병상에서 <누가 울어>, <안개 낀 장춘단 공원>을 취입해 빅 히트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병마에 어느 정도 차도가 있어 배호는 곧 병원에서 퇴원해 TV와 쇼무대를 통해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호의 매력은 기존의 트로트 가수들과 달리 스탠더드 팝 계열의 남자가수들이 가진 중후한 중저음을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절정부에서 구사하는 애절한 고음 또한 호소력이 남달라 그가 출연하는 무대에는 언제나 구름 같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결국 그는 1967년 각 방송사들이 수상하는 가수상을 휩쓸게 된다. 말 그대로 일약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왜 아플 때 노래 하면 인기를 얻는 걸까요?”

당시 그는 현해탄 건너 일본에도 팬들이 생겨났을 만큼 가수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렸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전성기 시절 배호의 한 달 수입은 아파트 10채를 살 수 있는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덕분에 배호는 전체 연예인 중 납세실적 3위에 오를 정도의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평생을 고생스럽게 살아온 어머니에게 2층 양옥집을 선물하면서 배호는 “왜 나는 건강할 때는 인기가 없고, 아플 때 노래를 하면 인기를 얻는 것일까요?” 하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1968년 경향신문에 실린 한 연예기사에는 당시 가요계를 주름잡고 있던 인기가수들의 목소리에 대한 평이 나온다. 기사는 배호의 목소리에 대해 “(요즘) 퇴폐적, 처절형이 잠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처절하다 못해 자살 직전인데, (목소리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 좀 괴이하다”고 적고 있다. 개인마다 호불호가 다르겠지만, 훗날 ‘마성의 중저음’이니 ‘매력적인 보이스’로 상찬되는 배호의 목소리에 대한 평가치고는 수긍하기 힘든 악평 일색인 것이 이채롭다.

그 와중에도 배호는 거칠 것 없는 인기를 구가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지방 밤무대를 전전하던 무명가수는 이제 몸을 돌볼 틈조차 없을 만큼 살인적인 스케줄에 내몰려 있었다. 실질적인 활동기간은 5년 남짓이지만 그는 이 기간 동안 20장의 앨범에 30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을 정도로 몸을 돌보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3년 여의 활동은 결국 그의 건강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건강을 돌보지 못한 배호에게 신부전증이 재발하면서 무대에서 쓰러져 업혀 들어오는 일이 반복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대중들은 더 배호에게 열광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배호는 휠체어에 앉아 무대에 올라야 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1969년 12월 6일자 매일경제신문에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요약해 보면, 그날 서울 시민회관에서 ‘MBC 10대가수상’ 시상식이 있었는데 수상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오른 배호에게 아나운서가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해 팬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날 배호는 복수가 차 퉁퉁 부은 배를 가리기 위해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아나운서가 한사코 코트를 벗을 것을 주문해 배호를 ‘곤경에 몰아넣었다’고 기사는 적고 있다.

기사의 원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방송국은 노래는 안 시키겠다는 사전 약속을 저버리고 노래해주기를 강요, 드디어 배 군으로 하여금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만나면 괴로워>, <당신> 등을 접속곡으로 부르게 했다. 배 군은 부축을 받으며 온 힘을 다해 노래했는데 지친 몸 때문에 발성이 안 되었다. 이 때 (동료가수) 이상렬 군이 울음을 터뜨리고 나머지 대기해 있던 남녀 가수들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 장내는 ‘처참한 광경’으로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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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배호에게는 또 한번 팬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순애보가 있다. 신장염으로 투병하던 당시부터 그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죽기 1년 전, 한 신문의 연예기사에도 투병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배호가 곧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양방, 한방 등 전국의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몸을 회복하려 애썼던 배호에게 그녀는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의 극진한 간호에 힘입어 잠시나마 배호는 자기 힘으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면서 머지않아 자신이 죽게 될 것임을 예감한 배호는 이번엔 한사코 그녀를 자기 곁에서 떠나보내려고 했다. 일설에 의하면 약혼녀를 떼어놓기 위해 일부러 고약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한 이틀 후 배호는 구급차 안에서 서른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일주일 후 그의 유작이 된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이 발매되었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진 배호의 장례식에는 이례적으로 3백여 명이 넘는 팬들이 참석해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가객(歌客)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