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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볶는 마을
[커피에피소드] 인스턴트커피에 대한 단상

전쟁과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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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일상에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집니다. 하물며 실제 전쟁터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전투식량과 함께 언제부터 커피가 병사들에게 보급되었을까.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커피는 말 그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기호음료입니다. 그렇다면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은 어땠을까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하루하루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싸워야 하는 군인들이야 말로 짧은 휴식 때마다 커피 한 모금이 더욱 간절하지 않았을까요?

1775년, 아메리카 식민지 13개주 대표자들은 제2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통해 마침내 식민지 모국 영국과의 일전을 결의합니다. 이를 위해 그해 6월 15일 군대가 창설되고 다음날 조지 워싱턴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독립전쟁에 나설 식민지군 모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당시 대륙회의는 병사들에게 매일 1인당 육류 16온스(약 453g)를 비롯해 콩 6.8온스(192g), 곡물 1.4온스(39g), 밀가루 18온스(510g), 우유 16온스(453㎖), 맥주 1쿼트(946㎖)를 지급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식민지군의 전투식량은 당시 유럽 중산층 가정의 식사보다도 훨씬 나은 편이었죠. 이 때문인지 모병공고가 나가자마자 전국에서 많은 장정들이 식민지군에 몰려들었습니다.
 

미-멕시코 전쟁 때 군인에게 ‘커피 제공’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그 후로도 꾸준히 개선되어 40여 년이 지난 1812년이면 미국군은 매일 20온스(556g)의 고기와 18온스(510g)의 밀가루 외에도 사탕수수 증류주인 럼(Rum)을 지급받게 됩니다.

전쟁터에 나선 병사들에게 술을 지급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해지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술기운을 빌어 더 용맹하게 싸운다는 이유로 음주를 적극 장려한 군대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무튼 이 당시 전투지에서 멀리 떨어진 주둔지의 병사들은 식사 때가 되면 각자에게 지급된 식량을 한데 모아 공동으로 취사를 했다고 하죠. 식사를 마친 뒤 삼삼오오 모여 앉은 병사들은 아마도 독한 럼주를 나눠 마시며 애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했을 겁니다.

1846년∼1848년 사이 텍사스주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미국과 멕시코 간의 영토전쟁 때도 미군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당시로는 최상급이었습니다. 이때 미군의 주둔지 전투식량에 맥주나 럼 같은 술 대신 처음으로 커피가 등장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병사들에게는 육류나 곡류와는 별도로 개인당 0.96온스(27g)의 볶지 않은 원두와 1.92온스(54g)의 설탕이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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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멕시코 전쟁 중 일어난 베라크루즈 전투 장면. 이때 미국 군인들에게 처음으로 커피가 제공되었다.

병사들은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때는 주둔지에서 휴대용 프라이팬에 생두를 볶아 설탕에 타 마시며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와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겠죠. 지휘관 입장에서도 전투력에 지장을 주는 술보다는 차라리 병사들이 선호하는 커피를 마시게 하는 편이 훨씬 나았습니다. 이때부터 커피는 미군의 전투식량에 빠지지 않는 필수품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야전교범에도 ‘커피는 체력과 기력의 근원이다’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죠.

1861년부터 시작된 남북전쟁 때도 이런 전통은 계속됐습니다. 남군에 비해 비교적 식량사정이 좋았던 북군에서는 이 기간 중 100인분 기준 10파운드(4.5kg)의 커피 원두와 8파운드(3.6kg)의 볶은 원두, 12∼15파운드(5.4∼6.8kg)의 설탕을 지급했습니다. 커피는 당시 병사들에게 매우 일상적인 ‘전투식량’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단조롭기 그지없는 병영 식사를 불평한 한 장교의 일기에 ‘아침은 빵, 베이컨, 커피였고 점심은 베이컨, 커피, 빵이었으며 저녁은 커피, 빵, 베이컨이었다’라는 글귀가 등장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남군에 비하면 배부른 자의 푸념이었죠. 대목장을 거느린 다른 주(州)들이 육류 공급을 거부하면서 남군의 식량 사정은 갈수록 더 열악해졌습니다. 전쟁 막바지에 남군은 전투지에서 멀리 떨어진 주둔지 병사들조차 몇 개의 건빵과 ‘구할 수 있는 모든 야채’를 넣고 끓인 한 모금의 스프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늘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전투에 나서야 했던 남군 병사들에게도 커피는 도저히 단념할 수 없는 욕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군들은 은밀히 북군과 물물교환을 통해 커피를 얻어가곤 했습니다. 북군들도 남군의 보급품인 버지니아산 씹는 담배를 좋아했기 때문에 지휘관의 눈을 피해 커피와 담배를 맞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죠.

전투력에 영향을 미친 커피

지금도 그렇지만 전투식량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투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군수품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풍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오래 전부터 자국 병사들의 먹거리에 많은 공을 들여온 나라였죠. 거기다 20세기 초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근대적인 의미의 ‘전투식량’에 더욱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때 미국이 주목한 것이 바로 통조림입니다. 1810년 영국인 피터 듀런트(Peter Durand)가 주석을 이용한 밀봉용기(密封容器)를 개발한 이래 통조림은 음식을 저장하는 데 널리 쓰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통조림 제조기술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20세기 들어 미군의 전투식량은 하나의 패키지 형태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흔히 ‘C 레이션(C Ration)’이라 불리는 미군 전투식량은 두 개의 통조림 깡통과 한 개의 액세서리 팩으로 구성되는데 통조림 하나에는 조리 육류 혹은 육류와 야채가 뒤섞인 주식이 들어 있고, 다른 통조림에는 건빵과 인스턴트커피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규격화된 C 레이션의 보급으로 미군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영양가 높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치열한 교전상황에서도 기대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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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게 보급된 C 레이션(C Ration). 깡통에 인스턴트커피, 비스킷 등이 들어있다.

C 레이션의 내용물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게 커피였습니다. 전쟁터에서도 쉽게 끓일 수 있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Instant coffee) 덕분에 미군은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에서 우수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죠. 그렇다면 이 인스턴트커피를 처음 개발한 것은 누구일까요?

인스턴트커피의 근본적인 개념은 1901년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 가토 사토리(Gato Satori)에 의해 처음 발명되었습니다. 가토에 의해 ‘산타’라고 명명된 이 커피는 커피원두를 볶아 냉각, 분쇄한 후 증기나 열탕을 통과시켜 커피액을 추출해 원심분리기에서 입자를 제거하고 뜨거운 바람으로 건조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마지막 건조과정의 뜨거운 열 때문에 커피의 맛과 향이 사라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커피 농축용액을 가루 형태로 건조시킨 덕분에 뜨거운 물에 잘 녹는 이 새로운 형태의 수용성 커피가 널리 보급되지는 못한 이유를 대략 짐작할 수 있으시겠죠?

2차 세계대전 미군 통해 세계로 퍼진 인스턴트커피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벨기에 출신의 과학자 조지 워싱턴이 1909년 커피포트에서 분출되어 형성된 커피 건조물에서 힌트를 얻어 ‘레드 E커피’라는 브랜드의 인스턴트커피를 시판하게 됩니다. 이후 레드 E커피는 약 30년간 미국 인스턴트시장에서 선물이나 야외활동용으로 제법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무렵은 미국의 커피시장 역시 급성장하고 있을 때였죠. 세계 최대의 커피생산국인 브라질도 이때 미국시장을 겨냥해 우후죽순처럼 커피농장들이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커피농장들이 난립하면서 기어이 공급량이 수요를 초과하는 사태가 초래되고 말았습니다. 커피 시세는 해마다 바닥으로 떨어졌고 커피농장마다 재고 원두의 처리가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1929년 ‘방끄 프랑세즈 에 이딸리엔느 뿌흐 르아메히끄 디 시드(Banque Française et Italienne pour l’Amerique du Sud, French and Italian Bank for South America)라는 긴 이름을 가진 한 은행에서 스위스 네슬레에 브라질의 커피농장마다 가득히 쌓여 있는 원두를 처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커피 개발을 의뢰하게 됩니다. 19세기 초 우유에서 수분을 증발시켜 분말형태로 만든 밀크 파우더(Milk Powder)를 개발한 경험이 있던 네슬레는 커피를 장기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흥미를 느껴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죠.

네슬레사의 연구원인 막스 모겐달러(Max Morgenthaler)는 이때부터 8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마침내 분무건조(Spray Drying) 기법을 이용해 지금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커피를 개발하게 됩니다. 세계 최초로 ‘향을 보존할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가 탄생하게 된 거죠. 1938년 4월 1일, 네슬레사는 스위스에서 ‘네스카페(NESCAFE)’라는 브랜드의 인스턴트커피를 출시해 큰 인기를 모으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는 점점 더 고립되었고 판매량 역시 전년도의 1/10로 격감하고 말았죠, 네슬레사는 전쟁의 포화를 피해 많은 직원들을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지사로 전근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도 않은 사업 기회가 찾아옵니다. 미국에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네스카페가 이를 계기로 미군의 전투식량 품목으로 선정되었던 겁니다. 미국 공장에서 생산된 100만 상자의 네스카페는 군용으로 보급되어 출시 두 달 만에 1년치 판매량을 달성했고, 전쟁 기간 동안 이 새로운 인스턴트커피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미군과 연합군 병사들의 사기를 돋워주는 기호음료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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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군인들(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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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한 잡지에 실린 네스카페 인스턴트커피 광고

한국인의 유별난 ‘다방커피’ 사랑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이 설치되면서 국내에도 인스턴트커피가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후 5년 만에 개전된 1950년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인스턴트커피가 널리 확산된 계기가 되었죠. 수십 만 명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는 전쟁의 와중에도 별다른 도구 없이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는 진귀한 구경거리였습니다. 민간인들 사이에도 언제부턴가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인스턴트커피를 냄비나 주전자에 붓고 설탕을 넣어 끓여 마시는 습관이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죠.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에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커피문화가 정착됩니다. 즉 어느새 한국에서는 인스턴트커피가 ‘커피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죠.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원두를 볶고 갈고 다시 물에 침출시키는 등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원두커피와 달리 인스턴트커피는 한국인들을 위해 개발된 커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뜨거운 물만 부어 바로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는 무엇이든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셈이니까요.

인스턴트커피의 인기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주로 소비되던 다방의 수도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전 서울에 100여 곳 남짓하던 다방은 1959년 800여 곳, 1969년 5,000여 곳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인스턴트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띄워주는 ‘모닝커피’는 70년대 말까지도 한국인들이 가장 고급스럽게 생각하던 다방 커피메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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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인스턴트커피의 인기는 1950~60년대 다방 수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2000년대 이후 원두커피가 널리 보급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식사 후에 인스턴트커피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반세기가 더 지났지만, 한국인들의 인스턴트커피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