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커피 볶는 마을
[커피테이스터] 커피향미를 찾아서 15

커피로 철학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주하고 묻는다. ‘너의 본질’이 무엇이냐? 흔하디 흔한 커피를 두고 철학을 논하는 것을 견강부회라고 탓한다면, 지성의 최고 자리를 넘보는 철학이 겨우 커피를 설명할 수 없어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하겠다. 철학은 ‘내가 알 바 아니야’로 즉,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몽테스키외의 일갈에 용기를 얻어 커피로 철학하는 여정에 나선다.

커피테이스터1 copy.jpg
커피 씨앗에서 잠들어 있던 생명이 움터 나오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커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선 탄생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

본질과 행복의 상관관계

커피가 귀하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커피애호가라면 한결같다. 좋은 커피를 발굴해 높은 값을 치르는 것은 이런 방식을 선순환시킴으로써 커피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소비자들도 스페셜티커피를 가려 마시며 품격 있는 커피 문화를 조성하는데 참여할 수 있다.그런데 과연 커피나무를 정성들여 재배하고 제때 소비지에 공급해서 잘 볶고 추출해 마시면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 우리가 한 잔의 커피로 행복할 수 있냐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며 마시는 행위는 노동에 그칠 뿐이요,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문화를 향유하는 듯하는 것은 허세이다. 이 지점에서 커피는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많은 철학자들이 은유하거나 직유했듯이 철학한다는 것은 만물의 근원을 꿰뚫어 ‘본질(essence)을 사유하는 것’이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이 과정을 통해 행복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므로, 커피의 본질을 안다면 행복은 자연스레 따르는 일이겠다. 소크라테스에게 본질은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따라서 커피란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찾아야 한다. 인간이 사물의 정수를 꿰뚫는 방법은 사유와 감각이다. 오감과 생각을 가지런히 하고 조심스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본질이 감각되거나 사유되기를 기다린다. 코와 혀를 자극하는 커피 고유의 속성이 커피임을 알게 해준다. 꽃 같고, 살구 같으면서도 밀크초콜릿이 감도는 향미가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행복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커피가 지닌 향미가 본질일까?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플라톤

커피테이스터2.png
미켈란젤로가 1509년 그린 <타락과 낙원에서의 추방(The Fall and Expulsion from Paradise)>을 보면 선악과가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 존 밀턴이 17세기 《실락원》을 쓴 뒤에야 선악과는 사과로 묘사됐다. 출처 : 《커피인문학》(인물과사상사)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6세기 말 고대 그리스 사상가)에게 고요해 보이는 한 잔의 커피 속에는 수많은 물질들이 생성하고 소멸되며, 대립하고 투쟁하고 있다. 물질들 간에 고도의 긴장감이 없다면 형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커피 속에는 1000여 종의 화학물질이 들어 있는데, 한 잔의 제한된 공간을 어떤 성분들이 얼마만큼 차지하느냐에 따라 맛의 성격이 달라진다. 만물의 근원을 불로 본 헤라클레이토스의 견해에 따르면, 불로 로스팅해야만 본성이 발휘되는 커피는 공기, 바람, 물, 흙, 영혼으로 변화하는 불의 한 지점일 뿐이다. 여기서 불은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봐도 좋겠다. 커피를 마시면 에너지가 솟구치는 현상은 카페인의 각성효과뿐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불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로부터 100년쯤 지난 기원전 5세기, 파르메니데스는 “감각되는 것에 속지 마라”고 경고했다. 커피 속에서 수많은 물질이 생성하고 소멸하며 대립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감각은 모든 오류의 근원일 뿐이라며 헤라클레이토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면서 불생불멸하는 사물의 본질은 이성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이성만이 진리라고 했다. 향후 2500여 년 서양 철학을 지배할 존재론과 관념론의 토대가 구축된 순간이다. “존재하는 것은 사유할 수 있고, 사유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로 연결된다.

 

커피철학에서 이 대목은 손익계산을 하면 남는 게 있는 쪽이다. 진리를 발견하는데 인간의 감관(sense)은 방해가 될 뿐이라는 플라톤 사상은 커피를 맛보고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하급감각으로 취급 받은 후각, 미각, 촉각에서 출발하는 아름다움은 감각되지 않고 오직 사유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이데아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다는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오래 전 이런 관점이 되레 커피를 문화적으로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고 있다. “한 잔의 커피로 영혼을 달랜다”는 표현은 다분히 플라톤적이다. 향과 맛을 넘어 오감으로 감각되지 않는 ‘사유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을 은유한다. 시간이 2200여 년을 흘러 임마누엘 칸트에 와서 오감은 사유를 만나 감성으로 승화한다. 그는 저서 《인간학》에서 인간의 신체가 물체적인 것에 의해 촉발되는 ‘외감’뿐 아니라 마음에 의해 촉발되는 ‘내감(內感)’을 발견했다. 이것은 곧 상상력이며 사유이다. 감각이 사유를 만나 감성으로 승화한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 감각되는 것과 생각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는 관점은 17세기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도 목격된다. 인간이 각각 독립적인 정신과 물질(신체)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인데, 플라톤의 이원론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진리처럼 보이던 심신이원론도 한 세대 뒤쯤 나타난 스피노자의 도전을 받았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사유(정신)의 측면과 연장(extention; 신체)의 측면을 모두 가진 존재이고, 심신은 서로 동등하면서도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처럼 세기적인 철학자들의 거대한 담론이, 그에 비해 한없이 사소해 보이는 커피로 풀이될 수 있다. 철학은 개별적 진리를 포괄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기 때문이다.

 

커피테이스터3 copy.jpg
커피의 본질은 향미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플라톤은 감각은 본질에 다가가는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커피의 품질을 평가하기 위해 세팅된 커핑(cupping) 테이블

커피의 기원에 스민 본질

커피의 본질을 알기 위해 커피가 인류에게 다가온 시점으로 가보는 건 의미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문제는 탄생의 비밀을 밝힘으로써 풀린다고 봤다. 길가메시(기원전 2600년 수메르 도시국가의 왕) 시대에 커피나무는 지금의 카메룬 지역에서 치자나무의 형태를 하고 자라고 있었다. 동아프리카 지질활동으로 거대한 평지가 생기자 치자나무는 고향을 떠나 에티오피아로 머나먼 여정을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 동물과 곤충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단으로 카페인을 저장할 수 있게 된 나무들이 커피로 진화했을 것이다. 유게니오이데스(Eugenioides)와 로부스타(Robusta)로부터 형질을 받아 지금의 아라비카(Arabica) 종으로 모습을 갖추고 에티오피아 카파(Kaffa)에서 군락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커피가 수천 km의 험한 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나무로서는 드물게도 뿌리에서부터 줄기, 잎, 심지어 꽃술에까지 카페인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덕분이다. 환경적인 위험이 카페인을 만들어 냈고, 끝내 치자나무를 커피나무로 변모시킨 과정은 본질에 관한 사유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구약의 시대에 커피는 모세 5경(Five books of Moses) 중 1경인 창세기에서 모습이 스친다. 기원전 1440년경 모세는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를 묘사한다. 뱀의 유혹에 빠져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이 나무의 열매는 사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존 밀턴의 실수였다. 모세는 선악과라고 했을 뿐인데, 창세기가 쓰인 지 3000년이 지난 1667년 밀턴이 대서사시《실낙원》을 펴내면서 슬쩍 사과로 바꿨다.

커피테이스터4 copy.jpg
하와이 코나의 그린웰 농장에서 자라고 있는 100여년 수령의 커피나무.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커피의 본질은 100년을 자라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무엇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커피테이스터5.png
후추의 고향인 인도에서는 커피나무와 후추덩굴이 어우러져 자란다. 이 때문에 인도커피에서는 후추향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는 아직 없다. 본질적 측면에서 커피의 향미란 다른 나무와 어우러져 자란다고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연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손꼽히는 바티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에서 드러난다. 1510년 이 그림을 완성한 미켈란젤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그릴 수 없었다. 그는 선악과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튜어트 리 앨런은 1999년 펴낸《악마의 잔(The Devil's Cup)》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사과가 아니라 커피 열매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보인 반응이 카페인의 각성효과였다는 주장이다.


고대 그리스 영웅들의 서사시에서 기원전 12세기경에 벌어진 것으로 묘사되는 트로이 전쟁에서도 커피로 추정되는 네펜테(Nepente)가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언어학자 피에트르 델라 발레는 1650년 출간한 중동여행기에서 “트로이에서 살아 돌아온 왕비 헬레나를 축하하기 위해 스파르타인들이 벌인 잔치에서 포도주와 함께 제공된 네펜테는 커피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펜테가 근심과 두려움을 잊게 했으며, 일정 시간 지나면 약기운이 떨어졌다”고 묘사된 부분은 카페인의 반감기와 일치한다고 했다. 커피라는 용어를 만든 영국의 헨리 블런트 경은 1650년경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먹은 블랙수프가 커피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신화의 시대에서 몇몇 커피의 흔적과 목격담이 발견된다.


바야흐로 기원전 6세기. 탈레스의 등장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인간의 태도에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말하자, 그리스 철학이 태동했다. 장차 학문의 도태가 될 ‘인간의 사유’가 시작된 것이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본질을 맹목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생각하는 힘으로 찾아야 한다는 신념이 싹튼 순간이다. 현대과학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탈레스의 견해는 틀렸다. 하지만 그는 인류를 신화에서 탈출케 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생각으로 이끄는 커피의 가치

여기 한 잔의 커피가 있다. 신화에서 벗어나 커피를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일까? 커피철학의 시대에 커피 음용법은 바뀌어야 한다. 맛뿐 아니라 사유를 추구하면서 커피의 본질에 다가가자는 것이다. 커피를 마실 때 달다, 쓰다, 시다는 등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바에 멈추지 말자. 커피 향미가 어떤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지를 인내심을 갖고 그 뿌리를 더듬어가야 한다. 한 잔에 담긴 커피는 내 몸으로 들어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나의 관능이 되고 나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커피의 가치는 ‘나를 생각으로 이끈 것(To make me think)’에 있다.

커피테이스터6 copy.jpg

커피의 우수성은 대체로 커피전문가들의 점수로 표현된다. 일정 점수 이상을 받으면 스페셜티커피의 자격을 얻게 되는데,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커피의 본질을 더 귀중하게 대접하지는 않는다. 커피의 본질은 사람으로 치면 인격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필자가 콜롬비아 최고의 커피를 뽑은 테이스팅 대회에서 채점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글 | 박영순
사진 | 커피비평가협회(CCA, www.ccacoffee.co.kr)
박영순 님은 21년간 신문기자로서 와인, 위스키, 사케, 차, 맥주, 커피 등 식음료를 취재하면서 향미에 몰입했습니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향미 관련한 자격증 30여 종을 비롯해 미국요리대학(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플레이버 마스터를 취득했고, 현재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년《커피인문학》을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