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오늘의 카페
[드로잉 에세이]

커피 잔에 붓을 씻고~

‘앗! 또 커피에 붓을 씻어버렸네!’
커피를 자주 마시다보니 책상에는 늘 커피 잔이 놓여있다. 그림을 그릴 때 스케치를 마치고 수체화용 고체물감을 사용해 색칠하기 때문에 물을 자주 적셔야 한다. 주로 야외나 카페에서 지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집에서 혼자 그릴 때 사용하는 물통이 작고 동그랗다. 무심결에 커피 잔을 물통으로 착각해서 붓을 넣어 씻곤 한다.
순간,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란 시가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난다. 공통점이라곤 씻는다는 것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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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는 것이 물뿐이랴 / 우리가 저와 같아서 /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일이 끝나 저물어 /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 샛강 바닥 썩은 물에 / 달이 뜨는구나 /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중략) 

노동자가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강물에 삽을 씻으며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는 시이다. 어디 한갓 취미로 시작한 초보의 붓 자루가 저 신성한 노동자의 노동에 비할 수가 있겠냐만 그 끄트머리라도 잡고 싶다. 그림을 그리며 인생의 의미를 새기고 조금이라도 내 삶이 풍성해지기를, 조금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내 드로잉에도 그렇게 진정성 있는 삶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담고 싶다. 

가벼운 취미로 삼기보다 조금 더 의미를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드로잉과 더불어 커피를 들겠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짝사랑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짝사랑하지만 상대를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어느 날, 커피와 관련된 물품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문득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두 세 번씩은 사용하는 용품들인데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서둘러 커피를 내리고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나보다.  

커피는 마시기 바로 전에 소량씩 갈아서 사용하기 때문에 전동 그라인더나 핸드밀을 사용한다. 핸드밀이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커피 향을 오래, 깊게 마시고 싶은 날엔 핸드밀로 커피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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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커피 한 잔을 끓일 때마다 60알의 원두를 세어 갈았다고 한다. 커피 한 잔이 60여 가지의 영감을 준다며 한 알 한 알 세어 넣는 베토벤을 상상하자 문득 그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람 수에 맞춰 60알, 120알, 180알을 세는 베토벤, 그런 완벽주의 때문에 완벽한 음악을 작곡했으리라.  

어느 날은 나도 60알을 세어 커피를 내린 적도 있다. 내 입맛엔 조금 연했지만 베토벤과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 나름 행복한 커피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린다. 마음의 여유를 느낀다.
방심하는 순간, 또 커피 잔에 붓을 담궜다.
오호라. 내 그림에서 커피 향이 나겠는 걸~

그림. 글 | 조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