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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모두의 꿈과 환상이 깃든 이야기

동화를 펼치니 꿈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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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네 돌이 갓 지난 딸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늑대가 어떻게 빨간 모자랑 말을 해? 늑대도 말을 해?”

번역본으로 된 외국 동화 《빨간 모자》를 읽어주다 받은 질문입니다. 할머니에게 선물 받은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는 꼬마 소녀에 관한 이야기책을 아무 생각 없이 읽어주다 저는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냥. 옛날이야기는 다 그래. 늑대도 말을 하고, 나무도 말 해. 그냥 동화나 우화는 다 그래.”

대충 넘겨보자는 심산으로 말을 뱉고 봅니다. 근데, 딸아이가 연거푸 물어봅니다.

“우화가 뭔데? 왜 우리집 나무는 말을 못하는데?”

참 난감한 질문입니다. 이럴 땐 애 엄마에게 미루는 게 정답입니다. 애 엄마를 부르니 고소하다는 듯이 저를 이렇게 놀리고 갑니다.

“요즘 호기심 장난 아니야, 잘 생각해서 말 좀 해줘. 난 감당이 안 될 때가 있어.”

이야기의 계몽성에 이끌림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반듯하고 착하게 자라기를 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책을 선물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는 것도 그런 이유이겠지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글도 아직 깨치지 못한 상태인데도 좋은 이야기책이라고 하면 한 권씩 사서 집에 들어가곤 하니까요.

그런데 이제 저도 뭔가 좀 ‘생각’을 해야 할 때가 됐나 봅니다. 딸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은 이상 그냥 대충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요.

부모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르노 베텔하임이 쓴 《옛이야기의 매력》에는 이와 관련한 몇 가지 흥미로운 언급이 눈에 띄는데요. 인간들은 공격적이고 이기적이며 화를 잘 내는 성향이 있다는 전제 아래 베텔하임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폅니다.

부모들은 세상의 많은 악의 근원이 바로 우리들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숨기기를 원한다는 거지요. 그 누구보다도 인간들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들은 설령 진실이 그렇다할지라도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사실을 발설하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에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착하기만 하다고 가르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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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하임은 어른들이 이야기가 가지는 계몽성에 이끌리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베텔하임의 주장은 다음 부분에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린이들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항상 착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 비록 착한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부모가 가르쳐 준 것과는 모순됩니다. 그 결과 어린이는 자신을 괴물처럼 느낄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면 어른들은 왜 이야기책을 읽어주면서 아이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강조할까요. 베텔하임은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그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계몽성에 어른들이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옛이야기의 계몽성은 선악에 대한 직접적인 훈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옛이야기는 특유의 형상화를 통해 악이 우리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요.

하지만 이야기 속에는 선함이 악을 언제나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이런 점이 독자, 특히 어린이로 하여금 ‘선함’이라는 매력적인 길을 걷게 한다고 분석합니다.

‘악은 언제나 실패한다’는 메시지

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악에는 여러 매력적인 요소가 있는데요. 우선 옛이야기에서 악은 힘센 거인이나 용, 마녀의 힘,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사악한 여왕 등으로 상징되고 있으며, 일시적이나마 인간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악은 반드시 징계가 되고 패배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자기 정화와 같은 심적 상태를 느낀다고 합니다. 악한이 벌을 받는 결말 부분에서 어린이가 직접적으로 도덕적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나 옛이야기에서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이들의 악행을 제한적으로 억제할 뿐입니다. 다만 악행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확신을 어린이들에게 전달해줌으로써 훨씬 더 효과적인 악행 억제 수단이 된다는 거지요.

결국 옛이야기는 악한 행위를 하는 인물이 언젠가는 실패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들려줌으로써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악한 인물이 아닌 선한 인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강력한 계몽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거지요. 이러한 분석은 비단 서구의 민담에만 한정되지 않고, 보편성을 띤다는 점에서 전 세계 여러 이야기들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림형제가 신화, 전설, 민담으로 체계화

창작문학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흔히 ‘민중문학’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때 ‘민중’의 의미에는 창작 주체로서 민중과 표현 대상으로서 민속, 그리고 전승 방식으로서 민간전승의 뜻을 모두 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어린 시절에 대부분 읽었을 그림동화의 저자인 그림형제(Jacob Grimm과 Wilhelm Grimm)입니다. 독일의 민간 전승 이야기를 수록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는 세계문학 사상 최초로 학술적인 토대 위에서 채록된 신화집, 전설집, 민담집이죠. 별 구분 없이 전승되던 옛이야기를 신화, 전설, 민담으로 체계화한 것도 역시 그림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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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형제 초상화. 그림형제는 민간전승 이야기를 학술적 토대 위에서 신화, 전설, 민담으로 체계화했다.

우선 신화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신과 영웅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성한 이야기입니다. 대체로 신화에는 한 민족의 공동체적 유산이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대표적인 신화인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구성 요소를 들여다보면 한민족의 뿌리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강림했다는 것은 당시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임을 강력히 환기합니다. 또한 환웅과 웅녀의 결합은 이주족과 선주족(先住族)의 결합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곰과 범 가운데 곰만이 인간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곰 숭배 부족이 범 숭배 부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죠. 이처럼 포괄적인 증거물을 통해 종교적 숭고함을 갖춘 것이 신화입니다.

전설은 ‘역사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이와 연관된 특정 집단의 체험과 전통이 담겨 있죠. 주인공은 비범한 인간이거나 악령일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가진 전설은 진실한 이야기라는 점을 부각합니다. 결말 또한 운명론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1980년대 드라마 중 한 여름을 서늘한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설의 고향>의 끝 부분 멘트를 기억하시는지요. 구미호 이야기로 사람들의 간담을 얼어붙게 한 뒤, ‘지금도 경상북도 ○○군에 가면 죽어 돌로 변한 사람의 모습을 한 바위가 남아있습니다’라고 하던 그 이야기가 바로 전설인거죠. 구체적 증거물을 확보함으로써 진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전설은 비범한 인물의 좌절과 비극적 종말을 보여줍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인식시키고 인간의 자만심을 경고함으로써 계몽적 특성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끝으로 민담은 전설과 달리 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인간과 세계와의 투쟁에서 인간이 승리하는 구도를 제시하죠. 미천한 인물의 성공담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민중의 욕구와 희망을 대변해주죠. 그래서 신데렐라 이야기가 유럽의 민담으로 처음 등장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민담은 민족의 범위를 초월해 전 세계적으로 전승됩니다. 유럽인의 신분 상승 욕망이 아시아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죠. 자연스럽게 이런 민담류의 이야기는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와 같은 서술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민화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구분을 두지 않고 초월자의 도움으로 주인공이 성공하는 결말을 제시해 낙천적인 세계관을 재현해 냅니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의 모태

옛이야기는 전승되면서 다양하게 변이되고 다음 세대의 예술 창작에 마르지 않는 영감을 제공해 줍니다. 같은 이야기도 내륙에서 전승되면 바다와 관련된 구성 요소가 빠지고 육지의 특징들이 이야기에 담깁니다. 바다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반대의 현상들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 저의 질문입니다. 옛이야기를 단순히 아이들이나 읽는 단순하고 유치한 픽션쯤으로 여길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옛이야기는 어린이나 어른들의 환상과 꿈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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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은 동화나 우화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영국의 전업주부였던 한 여성이 북유럽의 신화를 바탕으로 온갖 환상적인 이야기를 펼쳤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동화나 우화가 아이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사례입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 덕분에 영화로 만들어진 《반지의 제왕》은 그 문학적 모태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비단 서양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중국의 신화집인 《산해경》의 몇몇 캐릭터만 빌려 와도 엄청남 괴수이야기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이제 아이들에게 읽어주거나 선물해주는 동화책의 제목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그 속에 인류의 보편적인 꿈과 환상이 깃들어있을 테니까요.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