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아틀리에
[식물과 친구하기] 히어리

춘사월, ‘히어리’ 꽃 잔치에 취해볼거나

도시는 말할 나위도 없고 농촌과 산간 지역 등 전국 어느 곳에서나 외국인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눈빛이 다른 외국인 아내, 외국인 며느리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들은 이제 이방인이 아닌 어엿한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어차피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운 ‘단일민족’이라는 용어는 고분 속에나 묻어두어야 마땅하게 되었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용어 자체도 머지않아 용도폐기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대한민국 구성원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다인종화 돼 가고 있는데 우리 땅에 존재하는 식물의 세계는 어떠할까? 그곳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입 곡물이나 종자에 묻어오고, 사람에 묻어오고, 새들이 옮긴 수많은 이국 식물들이 우리 산하 곳곳에 뿌리내려 토착화한 지 오래다. 게다가 품종개량이니 육종이니 하며 동종 또는 이종 식물을 뒤섞어 만든 교배종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따라서 ‘토종’이라는 것은 찾아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순수성에도 의미를 둘 수 없게 되었다. 차제에 혈통의 순수성만을 따져서 ‘토종’을 정의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후나 토양, 생태환경적 여건에 적응하여 다른 식물과 공생하는 식물군 모두를 아우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토종식물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귀한 토종 식물 한 종을 새 친구로 소개할까 한다. 이름 첫 글자 자모음의 구성 때문에 모든 식물도감의 맨 끄트머리로 밀려나 있는 ‘히어리’이다.

토종식물…화장품 원료로 유용하게 사용

식물과친구하기.jpg

히어리는 조록나무과의 낙엽 관목으로 우리나라 특산 식물이다. 학명은 ‘Corylopsis coreana’.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학명에 버젓이 한국산(coreana)임이 명시된 몇 안 되는 토종이다. 원산지는 우리나라면서도 여러 나라에 분포돼 있는 식물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만 자란다는 이야기다. 지리산을 비롯한 남부와 중부 지역의 산기슭에서 서식한다.

여느 관목처럼 줄기가 무성하지는 않으나 1∼2m 높이까지 자라며 잔가지가 많이 갈라져 있다. 꽃이 진 뒤 돋는 잎은 줄기에 어긋나기로 달리며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나있다. 관목치고는 상당히 큰 편인 잎은 심장 모양이면서 원형에 가깝다.

꽃은 4월에 피며 황록색의 꽃송이가 가지마다 촘촘히 달린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면 종 모양의 작고 노란 꽃송이들이 화려한 군무를 펼친다. 열매는 가을에 익어 검은 종자를 터뜨린다. 히어리는 목재로는 가치가 없지만, 화장품의 원료로 유용하게 쓰인다고 한다.

히어리 추출물은 피부 산화현상 억제, 피부 잔주름 개선효과와 미백효과, 자외선에 의한 피부손상 완화 효과가 있어 모 화장품 회사에서 이를 개발해 기능성 화장료로 이용한다고 알려졌다. 전남 순천 송광사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송광납판화’로도 불린다.

꼭 고향동네가 아니어도 언젠가 번잡하지 않은 곳에다 자그만 터를 닦고 살겠다는 꿈을 키운 지 오래다. 친환경농법을 배워 가족들이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짓고, 좋아하는 식물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소망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앞마당에 히어리 한 그루를 심을 생각이다.

4월이면 히어리가 피워내는 황록색 꽃을 완상하며 봄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글. 정충화
정충화 님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식물해설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눈에 척척 식물, 나무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2008년 계간 《작가들》 신인 추천으로 등단해 시집 《누군가의 배후》(2013), 《봄 봐라, 봄》(2020), 시화집 《환몽(공저)》, 산문집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2019)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