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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카페 2020.10 | Vol.11
월간 카페人  /  제2호  /  모두의 테라스
모두의 테라스
[커피in가요] 노고지리 <찻잔>

그대, 아직도 청춘의 온기를 기억하는가

모두의 테라스_01

돌이켜보면 1979년 한국 가요계는 디스코(Disco)를 앞세운 댄스가요 열풍이 연착륙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그 해 ‘제3 한강교’와 ‘새벽비’의 동반히트로 생애 두 번째 MBC 10대가수왕을 차지한 혜은이를 필두로 윤시내, 이은하 같은 젊은 여가수들이 이른바 ‘펑키(Funky)한 댄스음악’으로 가요계의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기존의 한국가요와는 다른 코드 전개, 기성 가수들에게서 보지 못한 독특한 창법과 빠르고 단순화된 리듬은 10.26사태로 인한 흉흉한 정국 속에서도 그 한해 가요계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새로운 서구 댄스음악의 유입으로 전국이 들썩이던 그해 11월 10일, 이런 가요계의 흐름을 거스르기라도 하듯 외려 잔잔한 록발라드풍의 음반 한 장이 별다른 홍보도 없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훗날 국민가요로까지 격상되는 ‘찻잔’이 수록된 노고지리 2집 앨범 <노고지리>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듯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듯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그립고 설레고 헛헛한 풍경

모두의 테라스_02

단조로운 기타 솔로로 인트로되는 ‘찻잔’은 사실 제작사에서 큰 히트를 기대하던 곡은 아니었다.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밀었던, 강한 하드록 넘버의 ‘조용한 방’이나 ‘그대 창가로 와요’에 비하면 템포가 처지는데다 연주 자체만 놓고 보아도 동시대의 A급 세션(Session)과 달리 돋보일 만한 기교가 생략된 탓에 밴드 음악으로는 조금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찻잔’의 빅히트는 쌍둥이형제(형 한철수, 동생 한철호)의 탁한 비음과 가사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정서와의 절묘한 어울림에 있다. 어느 날 시내의 한 다방 창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쓸쓸한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찻잔’의 노랫말은 듣는 이에게 그립고 설레는, 하지만 뭔가 아쉽고 헛헛하기 마련인 청춘과 연애의 한 풍경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또한 기타와 드럼 위주의 단촐한 사운드는 ‘찻잔’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연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 그 어색하고 지루한 풍경과 시간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같은 음반에 실린 또 다른 록발라드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과 ‘안개’ 등에서도 보이는 일관된 정서이다.

사실 노고지리의 성공 스토리는 데뷔와 함께 스타덤에 오른 여타의 슈퍼 밴드와는 다른 것이었다. 안양예고 밴드활동을 거쳐 1979년 2월 데뷔 앨범을 발표하며 가요계를 노크한 노고지리는 ‘찻잔’으로 인기를 얻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음악적 성취나 인지도는 거의 전무했다. 1집 수록곡인 ‘성주풀이, ‘새타령’, ‘진도아리랑’ 등은 한국 전통민요를 록음악으로 재해석한 야심찬 시도였지만 대중들은 아직 그렇게 생경한 크로스오버 음악에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강력한 하드록과 부드러운 록발라드를 앞세운 노고지리의 출현은 ‘제2의 산울림’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강렬하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햇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고 했던가. 2집 이후 노고지리의 음악은 산울림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노력인 동시에, 그 아우라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산울림 아류’의 슬픈 후일담을 듣는 듯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럼 대중은 왜 그들로부터 그룹 <산울림>의 감성을 떠올렸던 것일까?

산울림의 김창완이 프로듀싱

노고지리의 ‘찻잔’을 언급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서라벌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된 이 2집 음반의 실제 제작사가 ‘대성음반’이라는 군소 프로덕션이라는 점이다. 대성음반은 당대의 메이저음반제작사인 서라벌레코드에서 독립한 이흥주 PD가 설립한 신생 제작사로 이른바 ‘메이저에서는 불러주지 않는’ 젊고 재능있는 신인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훗날 <꾸러기>나 <동물원>처럼 ‘마이너’한 감성을 갖고 있는 뮤지션들이 대성음반을 통해 데뷔하게 된 것도 이런 음악적 지향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노고지리 2집을 기획, 프로듀싱한 이가 바로 그룹 산울림의 김창완(!)이었다.

프로듀서 김창완은 음반제작에 앞서 리드기타와 드럼으로 구성된 기존의 2인조에 젊은 베이시스트 홍성삼을 영입해 3인조 밴드로 재구성했다. 묵직한 저음의 베이스가 가세한 노고지리의 사운드는 더욱 풍성해졌고, 나중에 김창완이 “나름대로 암팡졌다”고 표현했던 쌍둥이 형제의 연주 실력도 제법 완숙기에 도달해 있었다.

여담이지만 ‘찻잔’의 작곡가인 김창완 역시 1986년 산울림 6집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직접 부른 이 노래를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는데, 노고지리가 부른 ‘찻잔’이 원래 Em(이마이너) 코드로 시작되는 데 반해 김창완 자신은 이보다 저음역인 Am(에이마이너)로 새롭게 편곡해 불렀다. 말하자면 원작자가 자신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셈인데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두 가지 버전의 ‘찻잔’을 비교 감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모두의 테라스_04

‘산울림’의 잔향, 불멸의 ‘오리지널’

2집 음반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노고지리는 1980년 서둘러 3집 앨범을 발표하는데 이때는 A, B 트랙의 거의 전부가 두 형제의 자작곡 위주로 채워지고 제작사 역시 ‘현대음향’으로 바뀐 뒤였다. 물론 이것은 산울림의 음악적 색채를 벗어보려는 의도라기보다 제작사와 가수들 사이의 관계가 다소 느슨했던 당시 가요계의 계약관행 때문이었다. ‘전속’되지 않은 가수들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제작사를 통해 새 음반을 낼 수 있었고, 심지어 후속 앨범에 전작의 히트곡을 재수록하는 일도 드물지 않을 때라 노고지리 최초의 자작곡 넘버인 3집 역시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산울림의 그림자를 벗어나게 됐던 것이다.

2집의 후광이 채 가시지 않았던 때라 대성음반 시절보다 강렬하고 세련된 록 사운드가 뒷받침된 3집 앨범 역시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수록곡 중 하나인 하드록 넘버 ‘광대’는 MBC의 <영11>과 KBS의 <젊음의 행진>을 통해 거의 매주 들을 수 있던 당대의 인기가요 중 하나였는데 대다수 7080세대가 노고지리를 <송골매>와 함께 80년대 초반을 상징하는 밴드로 기억하는 것도 이때의 왕성한 TV 활동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찻잔’에 열광하던 수많은 대중들이 이제 더는 ‘산울림 같지 않은’ 노고지리를 어쩐지 불안한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일 것이다.

3집 이후 노고지리는 밴드로써 자기만의 독자적인 음악 노선을 강화해가지만 아쉽게도 이들에게 ‘찻잔’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불멸의 ‘오리지널’이었다. 어쩌면 ‘찻잔’은 너무 짙은 산울림의 잔향이었고,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후발 밴드에게 숙명처럼 남겨진 성공 뒤의 후유증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갈수록 사운드가 풍성해지던 당시의 트렌드를 좇아 한철호가 드럼 대신 기타를 맡아 트윈기타 체제로 변화를 모색한 4집 앨범에 대한 대중의 미지근한 반응이 그 한 예일 것이다. 그들의 야심찬 음악적 변신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장된 이 비운의 앨범은 찻잔만큼이나 빠르게 식어버린 팬심을 확인시킨 채, 조금씩 중앙무대로부터 멀어지게 될 그들의 앞날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였다

4집의 실패를 계기로 데뷔 당시와 같은 2인 듀오로 팀을 재정비한 노고지리는 이후 1985년까지 3장의 후속 음반을 통해 ‘어두운 밤에’, ‘달래줘’, ‘그 소녀’ 등의 슬로우락 넘버를 발표하지만 이 역시 기대만큼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1985년 록 그룹 <들국화>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달라져버린 대중들의 기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산울림적 감성’에 조차 예전만큼 뜨거운 지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자의반타의반 긴 휴지기를 가진 노고지리는 1992년 컴필레이션 음반인 8집을 발표하며 의욕적으로 재기를 모색한다. 하지만 신곡 ‘안된다니까’처럼 당시 가요계의 흐름을 좇은 빠른 비트의 밴드음악으로는 두 번 다시 과거와 같은 영광을 회복할 수 없었다. 어느덧 가요계는 탄탄한 연주력과 창작력을 갖춘 7080밴드 대신 비주얼이나 퍼포먼스가 뛰어난 가수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을 앞두고 있던 90년대 초입이었다.

잠겨 있던 추억의 한 자락을 들추며

그로부터도 벌써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노고지리는 ‘찻잔’으로 구가했던 화려한 전성기를 뒤로 하고 시나브로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3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도록 질긴 생명력을 증명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느 누군가는 세월의 저편에 잠겨 있던 추억의 한 자락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12년 현재, 이 쌍둥이 형제는 경기도 김포에서 라이브카페 <노고지리>를 운영하며 아직도 연주와 노래를 계속하고 있다.

글 | 김정현
나머지 이야기
  • 형제의 부모는 출산 당일까지도 뱃속에 있는 아이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이를 낳은 산모가 계속 복통을 호소하자 당황한 산파가 허겁지겁 의사를 부르러 간 사이에 산모 혼자서 둘째를 낳았다. 첫 아이를 낳은 지 30분 후.
  • 충북 음성이 고향인 쌍둥이형제는 당시로는 보기 드문 조기유학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형제만 따로 서울에 올라와 하숙을 시작했는데 부모님이 서울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국내 최초의 쌍둥이 배우로 키워보려는” 생각에서였다고.
  • 쌍둥이 동생 한철호는 형에게 짝이 생길 때까지 8년 동안 자신의 결혼식을 미룬 끝에 결국 부모님의 바람대로 형제 합동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 해 자신의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
  • 노고지리는 ‘종달새’의 순우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