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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창조의 산실, 커피하우스의 역사

유럽근대화, 미국독립혁명과 커피

1686년 문을 연 프랑스 최초의 커피하우스, 카페 프로코프(Cafe Le Procope) <사진출처 : DIMSFIKAS(CC BY-SA)>

과학저술가 스티브 존슨(Steve Johnson)은 지난 2013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전략포럼 2013’에서 창조와 혁신을 위해서는 생각의 틀을 버려야 하고, ‘하나의 아이디어는 네트워크를 통해 재창조된다’며 도시가 가진 역동성을 창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속에서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은 그들의 아이디어를 꽃피우는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도시가 가진 역동성에 창조적 아이디어가 결합할 때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

그 핵심에 위치한 것이 바로 ‘커피하우스’다. 스티브 존슨은 커피하우스(카페)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플랫폼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유럽 근대화와 미국 독립과정에서 커피하우스가 한 역할을 살펴보면 그의 말에 끄덕이게 된다.

서구의 근대역사, 여기서 시작되다

커피하우스가 서구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왜 창조적 아이디어가 그곳에서 번성했는지 수긍이 간다. 중세의 보수적인 가톨릭교회는 이슬람 문화에서 시작한 커피가 유럽에 유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교도의 상징물이 전통 교리에 발을 내딛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교황에게 커피를 금지시킬 것을 탄원하는 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있어났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트 8세는 커피를 금지시키기는커녕 커피의 향과 맛에 반해 오히려 커피에 세례를 내린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 일반 기독교인들까지 공공연히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1645년경부터 커피하우스는 대중들의 커피 수요를 본격적으로 촉진시켰다.

17세기 영국 커피하우스 모습

17세기 중반(1645년에서 1650년 사이)에 커피하우스가 처음 이탈리아에 문을 열었다. 이후 런던에만 2000여개에 달하는 커피하우스가 생겨난다. 1652년 런던에 첫 커피하우스가 상점에 불을 켰을 때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했다. 심지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대학보다 더 많을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 이는 당시 커피하우스가 지식인들에게 어떤 장소였는지 알려주는 에피소드중의 하나다. 그리고 증권거래소나 보험조합이 그 당시 커피하우스에서 처음 태동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커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시장의 주도권을 움켜쥔 나라는 당시 무역강국이었던 네덜란드였다. 활발하게 동인도사업을 벌이던 네덜란드는 인도에서 커피농장을 인수해 직접 경영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많은 유럽 제국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커피사업에 투자를 했다.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중심으로 플랜테이션을 조성한 것도 네덜란드였다.

이후 이 나라는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커피를 공급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커피의 맛을 본 후 왕실 전용 커피를 수입할 정도였다. 네덜란드의 커피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사교장 겸 지식인의 토론장이었던 다른 커피하우스들이 대거 문을 엶으로써 드디어 유럽에 커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커피하우스에서 미국 독립을 논하다

계몽주의의 열풍이 휩쓸던 17세기 후반에 파리 ‘카페 프로코프’에 지식인들이 모여 들었다. 정부와 교회 등의 기존 권력을 비판하던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유럽의 지성들은 1740년대 그들의 아지트로 ‘카페 드 라 레장스’로 무대를 옮긴다. 이곳을 출입하던 사람 중에서 훗날 미국 독립을 이끈 주역 중의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도 있었다. 이 커피하우스는 1844년 8월 마르크스가 엥겔스를 만나 유물론적 역사관을 설파하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한편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들었던 영국의 옥스퍼드나 런던에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자 계몽주의가 본격적으로 불꽃을 피운다.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커피하우스에는 철학자, 문인, 정치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이상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억압적이었던 기독교 교권에 반대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 공화주의의 정치적 이념을 그들은 키워왔을 것이다. 공화주의는 커피하우스에서 처음 물꼬를 트면서 역사의 변화 조짐이 생기기 시작한 셈이다. 깨질 것 같지 않던 기독교의 억압과, 신분질서 위에서 연명하던 봉건주의에 드디어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흐름에 위협을 느낀 영국 정부는 커피하우스가 정치 토론의 장소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커피금지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이때 커피하우스에 드나들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피뢰침을 발견한 과학자에서 정치인으로 변모해가며 미국 독립의 주역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100달러 지폐의 모델이 된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마스 제퍼슨. 미국 독립의 주역으로서 각각 미국 100달러, 2달러 지폐의 모델이 되었다.

그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 중 한 명이었고,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의 연설문을 떠올리면 커피하우스의 분위기가 짐작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제퍼슨은 철학자이면서 법률가였고, 건축가이자 미국의 3대 대통령이었다. 제퍼슨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존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비롯해 무엇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외쳤다.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취임 연설을 했던, 2달러 지페의 모델인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은 그의 공화주의 정신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내가 한 직업을 모두 쓰되 대통령이었다는 말만은 부디 쓰지 말라.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편, 벤저민 프랭클린은 청교도적 근면함과 합리주의적 미국식 사고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면서도 100달러 화폐의 모델이 된 것만으로도 그가 미국 독립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전을 자유와 거래하는 자는 안전도 자유도 가질 권리가 없다”며 자유를 강조했던 프랭클린은 처음에는 과학자로 명성을 쌓았다. 천둥 번개가 치는 속에서도 연을 날려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피뢰침을 만들었듯이 그는 미국 독립의 험난한 여정에서 어떤 것도 굴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의 공화주의 가치를 만들어 낸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다.

프랭클린은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귀족 출신이 아닌 낮은 신분이었으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른 나이부터 인쇄공장에 다니며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정치가로 변신한 이후 그는 미국 독립에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된 후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을 성립시켜 프랑스의 재정 원조를 획득해 냈다. 이 일은 독립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또한 그는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영국의 관리들과 논쟁을 벌여 13개의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초안을 잡은 ‘미국독립선언문’은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도 평가받는다.

사회적 소통 공간…아이디어는 재창조된다

미국독립선언문 서명 장면(존 트럼불 그림)

커피하우스는 자유와 평등, 창조적 진보가 처음 우리 인류에게 다가오도록 문을 열어준 공간인 셈이다. 그 유명한 촛불의 비유가 등장했던 토마스 제펴슨의 명연설은 이런 내용을 확인시켜준다. 커피는 가장 개인적인 음료이면서도 공간을 창출할 때 사회적 의미를 획득해나간다. 커피 향에 스며든 것은 사람들의 미각만이 아니라 자유와 진보를 추구했던 당대인들의 정신이었다. 그들의 이상과 열정은 이러했다.

“아이디어는 각 개인이 혼자만 소유하고 있는 한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누설되면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소유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받는 사람은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디어 전체를 소유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그 아이디어를 그보다 덜 소유할 수 없다는 것도 아이디어의 독특한 특징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서 어떤 아이디어를 받는 사람은 내 아이디어를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고서도 스스로 그것을 배워갈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내 초에서 불을 붙여 가는 사람이 내 초의 불빛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고서도 자신의 초에 불을 밝힐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 상호간의 도덕적 교화와 인간의 조건 개선을 위해 아이디어는 서로 자유롭게 전 지구로 퍼져가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에 의해서 특별히 그리고 호의적으로 형성된 듯하다.”

- 토마스 제퍼슨 연설 발췌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