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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도자기 히스토리

중국도자기, 한반도를 거쳐 일본의 국보가 되다

차를 담는 도자기는 마시는 사람의 품격을 마지막으로 우려낸다. 자기에 담긴 차의 향기는 계절을 머금기도 하고 찻물이 쏟아내는 바람을 내뿜기도 한다. 대량생산된 플라스틱 컵이 간편할 수는 있지만 절제되고 담백한 차 한 잔의 기품을 담을 수는 없다.

흙에서 시작된 하나의 우주. 도자기를 만드는 이들만이 알아차린 세계의 신비가 그릇으로 태어나고 그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품는다. 도자기야말로 한 줌의 흙이 완성한 또 하나의 인간이 아니겠는가. 가을의 마지막 바람이 조락(凋落)의 서러움을 내려놓는 곳. 모든 호흡을 정중동의 흐름 속에 숨죽였다 단 한 번 폭포처럼 쏟아버리고 극한의 뜨거움을 이겨낸 자리에 차의 향기가 맴돈다.

마음을 품고, 차를 우려내는 그릇

차의 역사만큼이나 도자기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진행된 동서양의 교류에서도 도자기는 잘 깨지는 성격만큼이나 소중하게 다뤄진다. 주로 비단을 중심으로 했던 동서 교역에서 도자기가 주요 품목으로 등장한 것은 8세기를 지나면서부터다. 말과 낙타를 통해 육로로 쉽게 나를 수 있었던 비단과 달리 도자기는 몇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잘 깨지기 쉽고 비단보다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이는 물류비용의 증가를 가져왔고 교역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8세기에 들어서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전은 마침 쇠퇴해가던 비단 무역을 대체해 도자기를 주요 교역 품목으로 등장하게 한다. 도자기가 중국이 세계 교역의 중심이 되는데 단단히 한몫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후 중국산 도자기는 서양에서 폭발적인 인기 상품으로 자리매김해간다. 그러다 16세기 말에는 유럽이 도자기를 자체 생산하게 된다. 아울러 유럽은 중국에 도자기의 주문제작을 병행한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는 도자기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관련한 서양의 복식과 생활상 등이 그려진다. 이 변화는 중국에 서양 문명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후 18세기에 들어서자 차를 즐겨마시던 영국에서 중국산 도자기를 자체 생산하는 도자기 공장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본차이나’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 산업혁명의 한 축으로 ‘자본주의적’ 도자기가 공장에서 생산되게 된 셈이다. 이때를 전후해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는 서양사회에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해상무역이 꽃 피면서 동북아시아의 도자기 교류 역사도 본격화됐다.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였던 중국은 한국, 일본, 타이,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 도자기에 관해 영향을 끼쳤다. 가장 먼저 흙으로 그릇을 빚었던 중국은 서양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지대한 역할을 한다.

고려시대에 독자적인 청자와 상감기법을 완성한 한반도의 도자기는 조선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자기의 전성시대를 열게 했다. ‘다도문화의 나라’인 일본의 국보 26호가 조선의 막사발이라는 사실은 동북아시아 도자기 교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이다.

동북아 도자기 교류, 중국에서 한반도 거쳐 일본으로

2011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신안 용천청자 전시회. 용천청자는 중국 오대, 북송부터 청대까지 저장성 남부 룽취안(용천) 일대에서 생산된 청자를 말한다.

중국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도자기가 발달한 나라이다. 중국 도자기의 기원은 은나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의 토기를 만들었다. 유약을 발라 지금 도자기의 초기 형태를 이룬 것은 한나라 때 들어서라고 전해진다. 한나라에서 도자기라는 용어를 비로소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와 당, 송을 거치며 중국의 도자기 문화는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맞는다.

당나라(7-10세기 초)는 알려져 있다시피 화려한 귀족문화가 자리 잡은 시기이다. 이때 중국 각지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많이 생겼다. 당나라 도자기의 쌍벽을 이룬 것은 청자와 백자였다. 이 시기의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은 당삼채(唐三彩)로 불린 것이다. 장안과 낙양에서 주로 출토된 이 도자기는 초록, 갈색, 백색의 세 가지 유약을 입힌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 이 도자기는 당나라 귀족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송대(10세기-13세기)는 중국 도자기가 최고 기술을 선보인 시기였다. 남송의 관요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지난해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몇 백억 원에 경매가 이루어지는 등 중국 도자기 문화의 절정으로 일컬어진다.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중국 도자기는 원나라(13-14세기)에 이르러 도자기에 채색을 하기 시작하면서 색감에서도 더욱 화려해진다. 명나라(14-17세기)는 궁궐에 가마를 만들어 채색과 무늬를 넣어 만든 오채(五彩)도자기를 생산했다. 이때 중앙정부의 지원 아래 정교한 제작 기술이 발전을 거듭한다. 그러나 청나라(17-20세기) 말기, 서구 열강과의 혼란한 시기에 도자기는 국운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중국의 도자기가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삼국시대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특히 통일신라 이후에 장보고가 해상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중국의 도자기가 한반도 서남해 일대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으로 인정하는 학설을 고려하면 송과 원나라를 거치면서 형성된 도자기 기술이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도자기가 한반도 서남해 지방에서 부흥하다 일본 열도로 옮겨간 셈이다. 특히 한반도의 도자기 기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에 본격적으로 상륙하게 된다.

한반도 독자 기술…청자의 상감기법, 분청사기와 백자

일본인 학자들 중에서 임진왜란(1592)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당대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 도자기 생산 능력이 미약했다. 일본으로서는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감히 넘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기장이 없던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의 고급 도자기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여담이지만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을 일본에서는 도공이라 부른다. 한국 도자기의 주류는 백자로 보기 때문에 도공이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문헌에 나와 있는 대로 사기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사기장을 통해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로 고급 도자기 생산국이 된다. 조선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데 국력이 집중되는 시기에 일본은 도자기 기술을 흡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한 세기쯤 지난 17세기가 되면서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는 ‘도자기의 나라’로 거듭난다.

한편 전쟁의 포화 속에서 조선의 도자기 가마는 전국적으로 급속히 파괴되고 흔적을 잃게 된다. 사기장과 가마를 잃어버린 조선의 도자기는 전쟁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광해군 때 궁중 연례에 사용할 청화백자항아리를 구하지 못해 전국에 걸쳐 찾았다는 일화는 당시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전한다.

전쟁을 계기로 고려청자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조선의 도자기는 백자 중심으로 재편된다. 전란의 피해가 국가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불러온 것이다. 요즘에도 경제가 어려워지면 여성들의 옷차림이 짧아진다는 등의 변화가 생긴다는 연구 결과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전쟁 이후 고려청자의 화려함과 미적 취향이 그나마 남아있던 분청사기의 생산은 중단된다. 대신 실용적이고 견고한 백자가 집중적으로 생산된다. 한마디로 전쟁이 도자기의 유행을 바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백자인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가 빠지면 개밥그릇으로 쓴다’는 옛말이 있는 조선의 막사발 하나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백자 사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당대 일본 권력자들의 손을 거치며 일본 최고의 다기(茶器)로 평가받는다.

이 막사발을 일본인들은 ‘이도다완’으로 부르며 일본의 최고 문화재로 기리고 있다. 경북 문경의 한 마을에서 가져온 찻잔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식 한자어인 ‘이도다완’은 한중일 사이에 있었던 도자기 교류사에서 정점을 찍는 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의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였던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된 데에는 조선 백자와 사기장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외심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에서 발아한 도자기가 한국에서 봉우리를 한껏 키우더니 일본에서 꽃을 피운 셈이라고 빗댈 수 있다.

마침 마시던 찻잔을 뒤집어봤다. 아이러니란 이런 건가. ‘Made in China’라고 찍혀 있다. ‘그래. 찻잔은 처음 중국에서 왔었지!’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