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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차마고도(茶馬古道) 이야기

공주가 걸어간 그 길에 찻잎이 뿌려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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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둔황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세인들의 관심이 중국 서북부 티베트에 집중된 적이 있습니다. 둔황에서 쏟아져 나온 많은 양의 고문서들은 동아시아의 찬란한 과거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인류 문명의 보고’라 불릴 만큼 고고학적 가치가 높았습니다.

문서의 상당수는 토번(현 티베트)의 것이었고, 여기에는 전성기의 토번이 얼마나 강성한 세력과 화려한 문물을 자랑했는지를 일러주는 여러 기록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당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잡고 있던 7, 8세기의 당시 정세를 고려할 때, 토번을 중심으로 기술된 고문서들은 이 나라가 동아시아의 변방이 아니라 당나라에 맞설 만큼 상당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그 후 불교를 둘러싼 지배계층의 대립과 왕위계승 문제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될 때까지 토번은 상당 기간 이 일대에서 세력을 떨쳤습니다. 우리 고전소설 속에서도 토번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작자미상의 전쟁영웅소설인 <유충렬전>에는 토번이 조선에 침략해오는 가상의 상황이 나옵니다. 이외에도 몇몇 소설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토번의 영향력이 실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부터 당나라 장안까지, 차마고도를 완성한 송찬캠포

7세기 초 토번의 32대 왕에 오른 송찬캠포(松贊干布)는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의 여러 부락을 통일한 후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고 토번국의 중흥기를 이끈 인물입니다. 7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동아시아는 당나라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할 때였습니다. 당나라 건국 초기만 해도 동아시아 서남쪽 한 부락의 왕에 불과했던 송찬캠포는 자신의 집권기에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으로 토번을 당나라와 맞설 수 있는 어엿한 ‘왕국’으로 성장시킵니다. 경제 발전에 주력했던 그는 인도와 교류해 지금의 티베트 문자를 만드는 한편, 불교를 받아들여 불경을 번역하는 등 문자보급에 심혈을 기울여 문화국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차(茶) 문화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볼 때도 송찬캠포의 통치력은 빛을 발합니다. 지금의 차마고도(茶馬古道)가 있기까지 송찬캠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죠. 차마고도는 차 문화가 성장하는 시기에 무역의 ‘인프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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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인 차마고도를 통해 고대 티베트의 말(馬)과 중국의 차(茶)가 서로 교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차마고도가 실크로드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티베트부터 당나라 장안을 잇는 차마고도를 개척한 송찬캠포는 동아시아 교역의 역사에서 맨 윗자리를 차지해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입니다.

차마고도는 중국 서남부에서부터 티베트를 넘어 네팔과 인도로 이어지는 육상 무역로입니다. 천 여년 전 티베트의 불교가 이 길을 통해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도 유명하죠. 한나라 이전부터 이 길을 통해 물물교역이 시작됐고 중국의 당·송 시대를 거치면서 무역루트로써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차마고도는 길이가 무려 5,000km에 이르며 평균 해발고도가 4,000m 이상인 높고 험준한 산맥을 뚫고 형성된 길입니다. 몇 해 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에 이 위험천만한 교역로의 모습이 소개되면서 새삼 동서양 문화교류의 지난했던 역사가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차마고도는 눈 덮힌 고지대의 설산과 란찬강, 진사강, 누강이 수천 km의 아찔한 협곡을 만들어내면서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룹니다. 세 강이 만들어 내는 ‘삼강병류협곡’은 지난 2003년 유네스코로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는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지금도 여전히 이 길이 교역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에 들어와 주변에 많은 육로가 개척됐지만 아직도 ‘마방’이라는 상인조직이 수십 마리의 말과 함께 이 길을 통해 물자를 실어 나른다고 합니다. 차마고도라는 장구한 역사의 길 위로 21세기의 문명을 뒤로한 고대의 삶이 아직도 말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흥분과 놀라움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합니다.

문성공주, 티베트에 차를 들여오다

송찬캠포는 634년부터 두 번이나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족끼리의 혼인을 요청했으나 승낙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한창 국력을 과시하던 송찬캠포는 대군을 이끌고 험준한 차마고도를 지나 당나라 영토인 지금의 사천성 지역을 침략합니다. 그의 요구사항은 단 하나, 당나라의 공주를 자신에게 시집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노한 당 태종은 토번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합니다.

영토 확장이 목적이 아니었던 송찬캠포는 당나라에 철수를 요구하며 싸움을 피하려 하지만 이윽고 벌어진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맙니다. 송찬캠포는 사신 녹동찬을 보내 당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다시 한 번 공주와 혼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토번이 당나라를 침입한 이유는 자신들의 국력을 과시함으로써 토번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 것뿐이었습니다. 즉 왕족 간의 결혼을 통해 당나라와 화친을 추진함으로써 토번을 더욱 발전시키려던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던 겁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송찬캠포에게 시집온 인물이 당나라의 문성공주입니다. 차 교역의 역사에서 문성공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당나라에서 토번으로 시집갈 때 혼수품 속에 차를 가져간 것이 바로 문성공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차마고도를 거쳐 당나라의 차를 토번에 전해준 이후 토번, 즉 후대의 티베트인들은 하루 몇 잔씩 차를 끓여 마시는 습관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문성공주가 차마고도를 넘어 시집가던 일에 관해서도 여러 전설이 전해집니다. 특히 차마고도 주변에 있는 강과 지명에 얽힌 몇몇 전설들은 지금까지도 티베트인들에게 차가 전해지던 당시의 일을 생생히 전하고 있습니다. 당 태종이 문성공주를 송찬캠포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는 과정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시 송찬캠포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녹동찬이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당 태종 이세민의 승낙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녹동찬이 국혼을 청하기 위해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갔을 때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문성공주와의 혼인을 청하러 온 사신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 태종은 혼인을 청하러 온 사신들에게 5개의 문제를 내면서 ‘정답을 맞히는 사신의 나라에 결혼과 화친을 허락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삐뚤삐뚤한 구멍이 아홉 개나 뚫려 있는 명주(明珠)에 실을 꿰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녹동찬은 꾀를 내어 먼저 개미허리에 실을 매어 구멍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개미가 차례로 명주의 구멍을 지나가자 실도 따라서 들어갔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어미말 백 필과 망아지 백 필을 함께 풀어두고 망아지들의 어미가 어떤 말인지를 판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혜로운 녹동찬은 하루 정도 어미 말과 망아지를 떨어져 있게 한 다음, 망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굶겼다고 합니다. 다음날 다시 그들을 함께 놓아두자 배가 고픈 망아지들은 각각 자기의 어미에게로 달려가 젖을 빨았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문제는 2,500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 중에서 문성공주를 찾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녹동찬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그녀들 중에서 몸가짐이 가장 우아하고 단정한 공주를 단번에 식별해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문성공주의 혼처는 토번의 왕, 송찬캠포로 결정되었습니다.

티베트의 국력을 살찌운 결혼

하지만 당사자인 문성공주는 이 소식을 접하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토번왕과 결혼하여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나라 입장에선 바람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이 하나 없고 풍속도 전혀 다른 이민족의 나라로 멀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겠지요.

그 마음을 헤아린 당 태종은 문성공주를 위해 많은 혼수품을 마련해 줍니다. 혼수품에는 각종 화려한 가구, 그릇, 패물, 비단을 비롯해 당나라의 역사, 문학, 기술서적 및 의약품 등이 포함됐습니다. 그리고 25명의 시녀와 악대, 많은 장인들을 함께 딸려 보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를 위해 화려한 동불상을 챙겨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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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차를 즐겨 마시던 문성공주는 이때 당나라의 차를 혼수품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정치적 이유에서 시작한 정략결혼이었지만 이것은 티베트인들이 즐겨 마시는 수유차가 티베트 땅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권력 상층부로 유입된 새로운 차 문화는 이내 토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또한 공주가 토번의 중심지인 라싸에 도착한 이후부터 토번의 문화는 중요한 변화를 겪기 시작합니다. 공주와 함께 토번에 온 한족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토번족은 금을 가공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방직, 건축, 도자기 제조, 제지 등의 기술을 신속하게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전해진 당나라의 선진기술과 문화가 토번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음은 물론입니다. 한 사람의 결혼이 일국의 문화와 국력을 살찌우는 중요한 계기가 된 셈입니다.

차 한 잔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동서양의 차 문화 교류를 살펴보면 역사의 변화를 이끈 사건 속에는 흔히 한 잔의 차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식과 문화는 역사의 변화와 함께 한다고 하지요. 차 한 잔으로 세상의 변화를 읽는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