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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차 한 잔의 역사, 역사 속의 차 한 잔

홍차

'하멜 표류기'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멜은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 선원의 이름입니다.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웅장한 돛을 띄우던 해상 제국 네덜란드의 바다를 한 번 상상해 보시죠. 강력한 해상 제국을 꿈꾸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선(商船) <스페르웨르>호는 오랜 여정 끝에 타이완을 거쳐 동북아시아의 해상으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목적지를 잃고 조선의 끝자락인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은 낯선 동양의 14년 표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내용을 책으로 남깁니다.

하멜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그 당시가 17세기 중엽이라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가 본격화하던 시절에 네덜란드의 장삿배가 일본을 향해 뱃길을 열었던 것은 ‘교역’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교역을 통해 물자가 교류되고, 교류된 물자는 역사의 흐름으로 들어와 사람들의 문화를 바꾸고 인식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기존의 지배질서 중심의 역사적 서술체계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물건이나 사소하게 여겨졌던 대상들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패권 중심에 묻혀버린 민중들의 삶을 복원하려 합니다. 이른바 ‘미시사’라고 하는 이 흐름은, 예를 들어 커피의 전파 과정을 통해 세계사를 이해하려 한다거나 유럽인들의 기본 먹거리인 빵을 통해 서양 문명의 흐름을 들여다보려는 것이죠.

유럽인인 하멜이 조선 땅을 밟았던 그 무렵, 즉 17세기 유럽 대륙에서는 차에 관한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죠. 시간을 돌려 제국주의의 도도한 물결을 주도했던 영국으로 한 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홍차를 커피보다 더 많이 마시는 대표적인 ‘차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영국에 처음 차가 등장한 것은 1657년의 ‘Thomas Garraway’의 커피숍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듬해에는 런던의 정기간행물인 <Mercurious Politicus>에 차 광고가 실리기도 합니다.

1706년 문을 열어 영국 홍차 역사와 함께 해온 ‘트와이닝(TWINGS)’의 설립자 토마스 트와이닝.

영국 왕비 캐더린이 들여온 차 문화

본격적으로 영국에 차 문화의 씨를 뿌린 사람은 포르투갈 출신의 왕비 캐더린(Catherine of Braganza)입니다. 그녀는 1660년 왕정복고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의 왕비입니다. 그녀가 1662년 영국으로 시집올 때 런던 궁정에 처음으로 차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아직 홍차가 등장하기 이전이므로 당시 영국인들은 녹차나 오룡차에 설탕이나 우유를 넣어서 마셨다고 하네요.

그녀가 시집올 때 지참금으로 홍차와 관련이 깊은 두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도의 식민지 영토이고, 하나는 대량의 설탕입니다. 동양에서 온 귀한 차에다가 또 하나의 귀한 음식인 설탕을 함께 마시는 행위는 영국 귀족들이 다소 사치스러운 홍차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 셈입니다. 이것이 ‘대영제국 홍차(the empire tea)’라고 불리는 용어의 형성 기원이 됩니다. 당시에는 설탕이 너무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설탕 대신 꿀을 넣어 먹었던 것이 지금도 홍차에 꿀을 타서 먹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1665년경에 영국이 수입한 설탕은 88톤에 불과했지만 차를 많이 마시게 되면서 설탕 소비량이 급증해 17세기 말에는 1만 톤이 넘게 됩니다. 당시 유럽의 차 가격은 파운드당 1실링 미만이었으나 영국 정부가 파운드당 5실링의 수입세를 부과하자 밀수가 성행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차가 인기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문헌에는 정식으로 수입 절차를 받고 통관된 차보다 밀수된 차가 훨씬 많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1708년에는 영국의 차 수입과 관련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국의 두 동인도회사가 합병되어 대형 동인도회사가 생기게 됩니다. 이 회사를 통해 영국은 본격적으로 중국 차를 수송하였으며 배당금은 8~10%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 신대륙이 차 소비지로 등장합니다. 신대륙의 차에 비싼 세금을 물리는 법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동인도회사가 매년 1천만 파운드의 차를 영국에 수입한 것이 1768년의 일입니다. 이 무렵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두 전쟁이 일어납니다. 차로 인해 전쟁이 두 번이나 일어난 것을 보면 역사라는 것이 패권을 쟁취하거나 영토를 더 확장하기 위한 국가적 행위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시사라는 것이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학문적 시각보다는 한 시대 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민중들의 구체적 삶의 현장이 두꺼운 책에 실려 있던 역사적 사건을 보편적인 삶의 모습으로 바꿔놓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역사든 권력이든 모두 우리들의 일상이고 흔적일 테니까요.

보스톤 차 사건, 미국 독립의 단초

신대륙 사람들은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차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영국이 어려운 자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신대륙으로 가는 차에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신대륙 사람들이 차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결국 차 상자를 바다에 집어 던지는 일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지요. 이것인 1773년에 일어난 ‘보스톤 차 사건’입니다. 신대륙 사람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급기야는 미국의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지금의 미국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라니, 알고 보면 우리가 마시는 차 한 잔이 그냥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기야 프랑스 혁명이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던 와중에 혁명의 횃불이 처음 타올랐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후 미국인은 차 대신 커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신대륙의 미국인들은 근면 성실한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어서 이윤을 추구하는 데에는 상당한 수완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차를 실어 나르는 고속범선(tea clipper)을 처음 만들어 차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은 미국인이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중국 남부에서 대량의 차가 유럽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인도양을 지나고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하여 런던으로 오는 기나긴 길은 1년 내지 1년 반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오랜 항해 중에 차는 상품 가치를 잃을 정도로 변질됐으며 해마다 런던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이른바 ‘신상’ 첫 차는 경매에서 특별히 비싸게 팔렸습니다. 그리하여 범선은 점차 개량되어 선체는 늘씬하게 되고 바람을 최대한 받기 위해 돛대와 돛이 매우 커졌습니다. 이를 클리퍼(clipper)라 불렀고, 범선의 완성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1년 이상 걸리던 길이 약 100일로 단축되는 혁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19세기 중순에는 미국과 영국의 범선들이 중국 복건성에서 런던으로 차를 싣고 가는 경쟁이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중국을 출발하여 인도양을 지나 남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고 대서양을 올라가서 런던으로 들어온 후에는 예인선에 이끌려 템스 강을 올라오는 어마어마한 여정입니다. 특히 이 여정의 목적지인 선착장에 누가 먼저 찻짐을 던지는가는 경쟁의 최대 승부처였다고 합니다. 이 경쟁은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기나긴 항해였지만 흔히 몇 분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곤 했다고 합니다. 양주 상표로도 나오는 유명한 범선인 커티삭(Cutty Sark)도 처음에는 차 무역에 동원된 고속 범선이었습니다. 1870년대에 증기선이 나올 때까지 이 화려한 범선들은 바다에서 가장 빠른 배였습니다.

홍차
(좌)트와이닝 최초의 파리 지사 매장 (우)트와이닝 최초의 상업광고

아편전쟁의 그늘, 영국 홍차의 탄생

중국과 차 무역을 하는데 있어서 언어가 큰 장애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영국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다른 언어로 인해 생기는 소통의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차 대금으로 해마다 엄청난 돈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영국은 생각 끝에 인도에서 아편을 싸게 재배해서 중국에 몰래 팔아 차 무역으로 인해 빚어진 재정 적자를 메웠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아편을 금지했고 영국은 아편을 팔기 위해서 ‘아편전쟁’ (1840)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870년경까지 차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수입하였습니다. 양도 엄청났지만 이 무역으로 생기는 이윤도 엄청났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차를 한 번 실어 나르면서 생기는 무역의 대가로 다른 배 한 척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엄청난 금전적 이윤이 개입하는 순간, 차 무역은 이권 다툼으로 번졌을 것이고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도 쉽게 수긍이 가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다른 나라에서 차를 만들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낙점된 곳이 바로 인도입니다. 실론 섬 (지금의 스리랑카)은 원래는 커피가 많이 나는 곳이었으나 1869년 이후에 병충해로 커피농장이 전멸하였습니다. 이에 인도 아삼 지방의 차나무를 옮겨 심었습니다. 이것이 실론(Ceylon)티입니다. 아삼 차와 실론 차는 사실은 같은 계통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차가 들어오기 전에는 영국인들은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만을 먹었다고 합니다. 1840년에 베드포드 백작부인이 시장기를 참지 못하고 오후 5시 경에 차와 케이크, 과자 등 가벼운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보다 조금 이전에는 샌드위치 백작이 두 빵 조각 사이에 다른 것을 끼워서 먹는 방법을 발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오후에 차를 마시면서 샌드위치를 먹는 관습으로 자리잡았고 이런 식사 관행이 영국 귀족들 사이에 사교적인 행사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이 점심을 먹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97년경입니다.

홍차 한 잔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이처럼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찻잔을 한 번 저어봅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흔들린다고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요. 여하튼 역사 속으로부터 차는 그렇게 걸어 나와 우리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