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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봄날에 만난 일곱 살 인생

당신의 수호천사는 누구인가요?

일곱 살 인생을 만났다. 일곱 살이 무슨 인생이라고 하겠냐만, 아이의 7년은 그야말로 일곱 살 인생이라고 할 만했다. 내가 처음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이미 그는 스타였으니까.

처음 그의 이름이 KBS <인간극장> 회의 테이블에 오른 건, <병원 24시>를 제작하던 임 피디가 우리 팀으로 오면서다. 임 피디가 회의 테이블에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선배님들, 유리 공주 아세요?”

‘유리 공주’ 원경이와의 만남

유리공주! 세상에서 이렇게 불리는 원경이는 몇 해 전 ‘병원 24시’에 출연해 스타가 된 아이였다. 네 살이던 원경이는 ‘선천성 면역 결핍증’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세계에 5명, 한국에 2명뿐인 병, 열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몹쓸 병이었다. 오래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오만가지 합병증을 이겨야 하는 병이었다. 한마디로 면역 결핍증이란 병명은, 세상의 모든 바이러스를 온 몸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깨지기 쉬운 몸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세상 사람들을 울게 만든 그 장면, 그것도 폐렴이란 바이러스와 싸우는 그 때에 연출된 장면이었다.

폐렴으로 한밤중에 응급실로 실려 온 원경이, 고열에 시달리며 가쁜 숨을 내쉬는 작은 아이…. 그 모습이 애처로워 눈물을 흘리는 엄마에게 원경이가 던진 한 마디! “엄마 미안해. 아파서 미안해.” 그 순간, 엄마의 눈물은 통곡으로 변했다. 도저히 네 살 아이가 할 수 없는 속 깊은 말로 엄마를 울린 것이다.

이 한 장면으로 원경이는 스타가 되었다. 시청자들과 네티즌들은 유난히 예쁜 얼굴을 가진 그 아이를 ‘유리 공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곱 살이 되어, ‘인간극장’이란 휴먼다큐멘터리 회의 테이블에 다시 이름이 오른 것이다.

고민이었다. 이미 다른 프로그램의 대표적인 출연자였던 인물을 인간극장의 주인공으로 삼기는 부담스러웠다. 방송에서 아이템의 질은 신선도다. 다른 프로그램에 노출이 되면 그만큼 새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병원 24시>와 <인간극장>은 쌍벽을 이루는 휴먼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임 피디의 설명은 우리를 흔들리게 했다. 원경이는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갈 나이지만 3년 내내 병원을 다니느라, 학교를 갈 수 있을지, 간다고 한들 잘 따라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엄마는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딛기 위해, 모델 활동을 시켜볼까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였고 볼거리도 있었다. 열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아이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원경이를 만나보기로 했다.

고사리 손에 들린 ‘천사’

임 피디가 집으로 가서 원경이 모녀를 데리고 여의도로 왔다. 이렇게라도 나들이를 하고 싶은 모녀였다. TV에서 봤을 때의 그 앳된 얼굴은 사라졌고, 배는 임산부처럼 부풀어 있었다. 합병증으로 비장과 임파선이 부어 늘 만삭의 배를 달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부푼 배 때문에 모든 장기가 다 눌려 있어 기능이 어려워지고 몸의 움직임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 여섯 병의 항생제를 몸에 들이 붓고, 그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 원경이가 뒤뚱거리며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린 인사를 나눴고, 일단 맛있는 것을 먹기로 했다. 무얼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의도 방송국 주변 빌딩 지하의 어느 식당에 가서 뭔가를 참으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원경이는 밝고 유쾌했다. 엄마 희정씨는 천상 단짝 친구였다. 과하다 싶을 만큼 밀착되어 있는 두 사람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얼마를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소중하고 애틋하겠는가?

아무튼 두 사람은 모델 활동을 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댄스 배우는 이야기부터 연기 연습까지 아픈 아이와 아픈 아이를 돌보는 엄마라는 것을 잊을 만큼, 두 사람은 즐겁고 해맑았다. 볕 좋은 봄 날, 여의도 공원을 잠깐 산책하고 문방구에 가서 이것저것 미술 도구를 사주었다. 유난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게다가 아이들과 친해지는 데 선물 공세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문구점에서 우연히 유리 장식품을 발견했다. 투명하고 네모난 유리 안에 레이저로 천사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유리 공주라는 별명 때문이었을까? 그게 눈에 띄었다. “원경아! 이모가 이거 사줄까?” 원경이는 환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 했다. 고사리 손으로 그것을 꼭 움켜쥐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이 앙다문 손에 담겼다.

이렇게 우린 처음 만났다. 봄 소풍 같은 사전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원경이가 임 피디 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나를 향해 무거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이모, 내가 이모의 수호천사가 되어 드릴게요.” 손에는 유리 속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천사가 꼭 쥐어져 있었다. 요즘 말로 ‘심 쿵’이었다.
선물 보따리가 고마워서였을까? 아니면 그 아이의 눈에 내가 보호가 필요한 외로운 존재로 보였던 걸까? 왜 그런 말을 나에게 건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심장이 쿵하고 떨어진 것을 보면, 그때 나는 수호천사가 필요할 만큼 헐벗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일곱 살 인생은 나에게 그렇게 수호천사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다.

지지고 볶으며 방송은 무사히 나갔다. “엄마 아파서 미안해” 정도의 강력한 멘트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엄마,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어” “병원 다니는 일이 싫긴 하지만, 낫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야” 이런 애 늙은이 같은 멘트로 시청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반응이 좋아 1년 후, ‘원경이 학교가다’까지 방송을 했다. 그렇게 친해진 우리는 원경이 집에도 놀러가 원경이 할머니의 맛있는 김밥도 먹고 또 우리 집에도 초대해 딸아이와 같이 놀기도 했다. 그와의 기억엔 늘 맛있는 음식이 있다.

가끔 하늘을 보면…

세월이 흘러, 만남은 점점 뜸해지고 몇 년은 소식만 겨우 겨우 나누고 지냈다. 그러다 2013년 원경이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곱 살 인생으로 만났던 유리 공주는 열다섯 살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열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병을 안고 잘 버티며 엄마 곁을 지켰다. 장례식장에서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처음 만나 나에게 건넸던 그 말이 내 귀에 들렸다. “이모, 내가 이모의 수호천가가 되어 드릴게요.”

그 아이는 이미 그때에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무미건조한 이 세상에 잠시 내려온 천사였을까? 이도 저도 아니고, 어쩌면 그 당시 어떤 보험회사 광고에 나왔던 수호천사란 광고 문구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말을 통해, 그 아인 죽어서도 죽지 않은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친구인 희정씨 근황을 보면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원경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텐데, 원경이 엄마 희정씨는 잘 견디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가장 치열하게 사랑하며 살아온 모녀의 시간이 있어서 가능했으리라. 그리고 이제 하늘나라에서 숙녀가 된 유리공주는 엄마의 수호천사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문득 마음이 헛헛한 날이면 가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나의 수호천사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영원성’을 생각한다. 인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유리 공주는 그렇게 잠깐 우리 곁에 머물고, 수호천사란 이름만 남긴 것일까?

이유야 어쨌든 나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다. 얇고 가볍지만 제 기능을 톡톡히 하는 바람막이 점퍼 같다. 방송을 만들며 사는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아, 분노하고 좌절할 일투성이고 마음은 외줄 타는 초보 곡예사 같다. 그런 나에게 그 아이가 작은 위로의 손을 내민다.

당신에게도 이런 수호천사가 있는가? 없다면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쁘고 속 깊은 말 한마디로 마음을 녹이는 나의 수호천사를 빌려줄 용의가 있다. 물론 그 아이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2018년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