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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카페 2020.07 | Vol.8
월간 카페人  /  제4호  /  지상의 쉼표
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베사메무쵸’ 라파엘과 여종숙 씨

내가 지하철역에서 목을 빼는 이유

바쁘다는 핑계로 늘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다. 따지고 보면 시간이 덜 걸리는 것도 아닌데, 몸보다 마음이 더 바빠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우선 차를 몰고 나섰다가 막히는 길에서 발만 동동거리는 게 대개의 일상이다. 이런 나쁜 습관을 고쳐보겠다고 요즘은 종종 버스와 지하철을 탄다. 그런데 어느 날 나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지하철을 타는 날엔 어김없이 목을 빼고 여기저기를 살피는 거다. 특히 서울역 앞 4호선 지하철역에서는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

사진. 김수길

어딘가에서 기타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아예 기타 소리를 따라 꼭 연주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온다. 이유는 바로 오래전 만났던 출연자, 라파엘 때문이다. 그는 페루에서 온 음악가였다. 벌써 10년 전, 지하철역에서 만났던 그! 그를 인간극장 주인공으로 채택했던 건, 순전히 빛나는 외모를 가진 그의 아내 종숙 씨 때문이었다.

사실 <인간극장> 주인공을 뽑을 때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외모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스스로를 ‘외모지상주의자’라고 불렀으니까. 살아온 인생역정의 스토리가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을 더 빛나게 하는 건 거기에 꼭 들어맞는 외모다. 엄밀히 말하면 단순히 ‘예쁘다’ ‘예쁘지 않다’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에게 ‘호감이냐’ ‘비호감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실제로 똑같은 아이템이라도 주인공들의 외모가 수려할 때 시청률이 더 잘나온다. 진화론적으로도 준수한 외모에 사람들이 더 끌린다고 하니, 주인공의 외모의 따라 시청률이 오르고 내리는 것도 그러려니 해야 할 인간사가 아닌가 싶다.

베사메무쵸의 주인공을 찾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그 날도 아이템 춘궁기였다. 보릿고개는 이른 봄 한 번이지만, 아이템 춘궁기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온다. 아이템 사냥을 하던 막내 작가가 듣도 보도 못한 잡지책을 내밀었다. 지하철 관련 소책자 같은 잡지였는데 거기에 실린 한 장의 사진, 라파엘이란 페루 남자와 그의 아내 여종숙이 함께 잡힌 사진이었다. 내용은 아내인 종숙 씨가 라파엘의 거리 공연을 보고 홀딱 반해 결혼을 했다는 사연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그녀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기품 있고 아름다운 30대 초반 여자의 얼굴이었다. 무조건 만나보자고 했다.

안데스 전통악기 삼뽀냐(zampona)

그렇게 처음 그녀를 만난 곳이 지하철 4호선 지하철역이었다. 라파엘의 공연 시간에 맞춰 간 것이었다. 빛나는 외모의 종숙 씨는 한 30분 후에 나타났다. 그 때만해도 광고기획사를 다니고 있어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도착한 것이었다. 외모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게다가 명문대 대학원까지 졸업한 재원이었고 말도 잘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다. 사실 이것이 5부작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려면 이들에게 나올 수 있는 현장이 무엇이 있으며 이들 사이에 갈등 요소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극대화 할 것인지 여러 모로 따져봐야 하지만, 그냥 결정해 버렸다. 인생사 어찌 갈등이 없겠는가? 이런 무모한 말 한마디를 굳게 믿고 그렇게 <인간극장> ‘베사메무쵸’의 주인공을 결정해 버렸다.

그들의 결혼 스토리는 잡지에 나온 그대로였다. 97년 안데스 음악을 소개하고 싶어 한국에 온 라파엘 몰리나의 공연을 보고, 여종숙 씨는 영혼을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사귀게 되었고,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가 그들을 만난 건, 결혼 1년차쯤 됐던 것 같다.

종숙 씨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프랑스 연수를 다녀와 대학원까지 마쳤고, 전도양양한 커리어우먼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결혼시장에서도 열렬히 환영하는 A급 신붓감이었다. 이런 종숙 씨의 낯선 선택의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자신만의 저울을 가진 여자, 종숙 씨

그녀의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내 남편이 대기업 대리면, 그 다음은 차장 달고 부장 달고, 그 다음에는 임원이 되려고 밤낮 없이 일하고, 오직 낙이라고는 아파트 평수 늘리는 것인 그런 삶을 살겠더라고요. 그런 삶이 싫었어요.”

남편이란 존재와 정말 깊은 영혼을 나누는 결혼생활을 꿈꿨던 그녀였던 것이다. 모두들 남편감 스펙부터 따져 묻는 세태에 그녀는 좀 특별한 가치관을 가진 여자처럼 보였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주인공은 인간극장에 아주 좋은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결혼의 변을 듣고 우리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했다. 게다가 문화적인 차이도 있고 미래도 불분명했기에 매 순간 그녀의 선택이 늘 옳아 보이지는 않았다. 더욱이 좀 더 남편의 일에 깊이 개입하기 위해 회사까지 막 그만 둔 상태였다. 안정감 없는 삶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은 지루하거나 메마르지는 않았다. 후암동의 작은 집에서 서로 가사 일을 나눠하며, 시간만 나면 기타 들고 노래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사진. 김수길

원고에도 썼지만 그녀는 그녀만의 저울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자기만의 눈금을 가진 저울 위에 놓인 깃털이 아니던가? 깃털의 무게를 결정하는 건 자기만의 눈금일 뿐이다. 남들과 조금 다른, 더 예민한 눈금을 가졌기에 그녀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선택을 했고 그들은 행복했다. 가난한 뮤지션 부부의 삶, 그 자체!

그런데 그들보다 더 감동이었던 건, 종숙 씨의 아버지였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잘 난 딸이 가난한 페루의 뮤지션을 데리고 오면 방구들 이고 누울 만도 한데, 종숙 씨 아버지는 라파엘을 보는 순간, 자신의 사위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결혼 후 장인어른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위의 공연장 뒤 허드렛일을 도왔다. 사실 외국인과 결혼한 부부의 경우, 사회적 편견도 편견이지만 가족 안 문화적 갈등이 큰 질곡인데 이들 부부에겐 그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꼭 환영할 만한 선택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라파엘 종숙 부부 사이엔 그들만의 잣대가 만든 새로운 행복이 분명 있었다.

이 정도면 ‘인간사 어디 갈등이 없으랴?’ 라는 말이 무색하다. 사실 아무런 갈등이 없이 행복한 모습으로만 5부작을 끌고 갈 수 없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 말은 진리였다. 잉꼬부부 사이에도 갈등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 문제였다. 라파엘을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갖고 싶어 했고 종숙 씨는 아이를 원치 않았다. 몇 번의 다툼이 있었고, 그 덕(?)에 5부작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종숙 씨가 아이를 원치 않았던 이유는 다름 아닌 혼혈아에 대한 편견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관습에서 자유로운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유치곤 좀 의외였다. 그의 이어진 답은 이랬다. “내가 내 의지대로 선택하고 그 삶을 살면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그렇지만 이 편견 많은 한국사회에서 내 아이가 차별받으면 살 생각을 하면 겁이 나요.”

라파엘과 종숙 씨는 행복한 부모가 됐을까?

그녀의 두려움은 우리 사회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자신만의 저울을 가지고 있어도 헤쳐 나가기 어려울 만큼의 편견이 세상을 짓누르고 있다는 얘기다. 하여튼 그렇게 ‘베사메무쵸’는 방송이 나갔고, 그 후로도 라파엘 부부와 관계를 유지하면 지냈다. 종숙 씨가 쫑파티를 준비해줘 그의 집에서 비싼 차돌박이를 구워 먹으며 뒤풀이도 했다.

그 후로도 간혹 연락이 됐다. 방송이 나가고 2년 쯤 지났을 때였던가? 종숙 씨가 전화로 수줍게 고백을 했다. 임신을 해서, 곧 엄마가 된다고. 나는 너무 좋아서 온 마음으로 축하해 줬다. 마치 그들의 사랑이 세상의 편견을 이기기라도 한 것 마냥 기뻐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내 기쁨 안에 숨어 있었다.

사진. 김수길

방송으로 만난 인연이 대개 그렇듯이 몇 년 후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 그들을 생각하면 ‘어딘가에서 예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연락 한 번 해야지 하면서도 몇 년째 연락을 못하는 오래된 친구처럼 그들은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그렇게 잠자고 있다.

잠자는 그들이 잠시 잠을 깨는 곳이 바로 지하철. 나는 어쩌다 우연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지하철에서 늘 목을 빼고 두리번거린다. 한참 그러고 있으면 바람결 어딘가에서 안데스의 애잔한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소리에 다시 오래 전 인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그것이 알고 싶다> <명작 스캔들>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2018년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