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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방송의 스토리텔링

좋은 글은 작고 구체적인 것에서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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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pixabay

분명 인간 본성에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이 있는 듯하다. 작가란 이름으로 살다보니,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써요?’이다. 이 질문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어려움이 있다고 푸념한다. 수학 공식처럼 단계 별로 분명하게 설명해주면 좋으련만, 어떤 게 좋은 글인지 아닌지, 무엇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계발하는지, 모든 과정에서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 질문에 늘 두루뭉술하게 답하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상투적이지 않은 메시지가 핵심

때는 바야흐로 스토리텔링의 시대. 사과 하나를 팔아도 이야기를 보태고, 물 한 병, 오토바이 엔진 소리에도 이야기를 보태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디 마케팅만 그런가? 자기 소개서가 그 어떤 스펙보다 중요해진 현실에서 초등학생 때부터 자기 소개서를 써야하는 등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것이 지상 최고의 능력이 돼 버렸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스토리텔링은 스토리를 만드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분야다. 쉽게 말해 ‘스토리를 더 잘 전달하는 방식’을 스토리텔링이라고 한다. 주인공과 사건이 있고, 그것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그것의 인과관계를 구조화시키는 것이 스토리를 만드는 일이라면, 스토리텔링은 이것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느냐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 이야기하는 순서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제작의 핵심이요, 방송작가가 하는 기획, 구성 작업이다. 흔히 방송작가는 원고를 쓰는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원고를 쓰는 작업은 고작 전체 일에 1/10에 지나지 않는다.

KBS <인간극장>은 더욱이 휴먼 다큐멘터리를 드라마적인 요소를 가미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더더욱 구성이 복잡하다. 그저 매번 비슷한,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이템을 결정하는 제작진은 나름의 시대정신을 담아 ‘왜 이야기를 지금 이 시점에 방송해야 하는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메시지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인간극장>의 단골손님은 단연 ‘다둥이 가정’이다. 출산율이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현실에서 다둥이 집안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시대정신, 즉 메시지가 분명하긴 하다. 어떤 때에는 아이를 많이 낳으려는 부모의 철학을 메시지로 삼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형제애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기도 한다. 

주인공 후보를 만나고 와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나올 수 있는지를 확인한 후, 제작팀은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전달할지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난관은 어떻게 하면 ‘메시지는 분명하되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느냐’이다. 메시지만 분명한 방송은 어쩔 수 없이 상투적이다. 때문에 상투성을 벗고 참신성을 입기 위해 제작팀은 제작 기간 내내 천형처럼 고민에 고민을 보태게 된다.

충남 논산 가야곡에서 만난 개구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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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가야곡 아이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녀석들이 머리에는 팬티 하나씩을 뒤집어쓰고, 어깨에는 보자기를 하나씩 둘러매고 소파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이다. 오랫동안 인간극장 타이틀로 사용한 장면이기 때문에 기억하는 시청자도 꽤 있으리라. 진전, 진주, 진우, 진하, 진서… 정확히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부분 4살부터 여덟 ,아홉 살의 올망졸망한 연년생 형제들이었다. 이 형제들의 아버지인 이영선 씨와 남편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엄마 김미현 씨가 꾸린 이 다둥이 집은 재혼가정이다.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될 만큼 곡절 많은 삶을 살아서일까? 유난히 <인간극장>에는 재혼 가정이 많았다. 그래서 작가들끼리는 ‘인간극장이 사회에 공헌한 점이 있다면, 재혼가정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외국인 사위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다는 거다’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가야곡 꾸러기네 집도 이런 재혼 가정이었다. 더욱이 아버지 이영선 씨의 직업은 목사. 이혼이 쉽게 용납되지 않는 직업이었다. 깊은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가정을 꾸린 후, 두 사람은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시골로 내려왔다. 그것은 여러 가지를 포기한 변화였지만, 더 큰 변화의 시작일 뿐이었다.

가야곡에 터를 잡은 후, 부부는 일 년에 한 명씩 입양을 했다. 학교 때문에 멀리 나가 사는 영선 씨의 아들 진건 씨를 빼고, 다섯 아이의 부모가 된 것이다. 대가족 이야기는 그냥 카메라를 켜 놓아도 에피소드가 넘칠 만큼 왁자지껄했다. 솔직히 아버지는 썩 재미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언제나 진지하기만 해서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열심이었다. 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는 일은 아빠가 늘 동행했다. 야생화 이름을 알려주고, 계곡 깊은 곳에 다섯 형제들을 위한 전용 수영장을 만드는 일은 아버지 이영선 씨의 몫이었다.

엄마는 또 어떤가? 원고에도 몇 번 썼지만, 그녀는 따라갈 수 없는 슈퍼맘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어찌 그리 파워풀한 에너지가 나오는지, 게다가 일거수일투족에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출산을 포기했지만, 내가 포기한 것보다 몇 갑절 아이들에게서 기쁨을 얻는다”라고. 그렇다. 이 정도면 진정성 넘치는 주인공이고, 메시지도 분명했다. 현재까지도 해외 입양은 계속되고 있지만 국내 입양, 그 중에서도 남자 아이 입양이 희박한 현실에서 가슴으로 아이를 낳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니 이 얼마나 ‘공영적’이란 말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재미와 메시지가 분명한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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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 메시지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친환경적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룰을 만들며 살아가도록 지켜봐 주는지, 그들의 교육 철학이 궁금했다. 그러나 늘 그렇고 그런 대답이 이어졌다. 메시지를 전달할 잘 연마된 활이 없는 느낌이었다. 뭔가 감동적으로 이야기를 몰아갈 방법이 잘 찾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구성에 실마리를 던져 준건 슈퍼맘 미현 씨였다. 역시 미현 씨는 솔직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춘기가 되어서 자신들이 입양된 사실을 알게 되고, 혹시라도 삐뚤어지면 어찌 하냐는 질문을 피디가 했던 거 같다. 그때 미현 씨의 첫 반응은 물론 겁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오지 않을 가능성보다 올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이어지는 미현 씨의 답이 걸작이었다. 그래서 오늘을 더 열심히 산다는 거였다.

이게 무슨 맥락일까? 그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오늘 더 유난스럽게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끈끈한 유대감을 만드는 것은 미래를 내다본 행동이라는 거다. ‘혹시 아이들이 어긋나는 날이 오더라도, 어릴 적 만들었던 이 아름다운 추억, 넘치는 부모의 사랑이 아이를 수렁에서 건져 좋은 길로 인도하지 않을까?’ 이것이 미현 씨의 생각이었다. 오늘도 몸이 부서져라 아이들과 부대끼는 이유였다.

어찌 이것이 부모 자식의 관계만의 일이며, 입양 가정만이 문제겠는가? 오늘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꽃길만 펼쳐진 인생은 없다. 때문에 내일의 불행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을 누구보다 열심히, 또 소신껏, 즐겁게 산다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이 상상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가야곡 슈퍼맘이 이런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미현 씨가 불러 주는 말을 잘 정리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쓴다고?

가야곡 꾸러기들의 방송제작 과정에서도 글 잘 쓰는 법을 알 수 있다. 우선 에피소드를 펼쳐 놓아야 한다. 아이들이 팬티를 쓰고 독수리 오형제로 변신하는 에피소드, 계곡에서 신나게 놀다가 신발을 떠내려 보낸 일, 엄마가 아파서 누워있는데 아이들이 힘을 모아 엄마 병간호하는 장면들이 없이는 생생한 글이 써지지 않는다. 그렇게 에피소드를 펼쳐 놓은 후, 그것을 이야기하는 순서를 정해야 한다. 그 기준은 ‘오로지 입양으로 얻는 또 다른 기쁨과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이 아이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이다. 이것이 바로 방송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기법, 일종의 스킬이다.

그러나 좋은 글은 이런 스킬만으로 불가능하다. 미현 씨의 삶을 건 선택과 오늘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치열함이 없이는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글은 삶처럼 써야하고, 삶은 글처럼 살아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감동이 나오는 것이다. 감동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것에서 오는 법이다. 이것이 어찌 글쓰기뿐이겠는가? 우리 사는 모습도 글쓰기와 비슷하다. 가장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한 발 한 발이 우리의 삶도 잘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져 아이들이 잘 크고 있는지 소식은 알 수 없지만 엄마 아빠의 땀의 결실인 아이들은 잘 크고 있으리라 믿는다. 방송이 끝난 후, 그해 가을 보내주었던 탐스런 가야곡 대봉처럼 말이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그것이 알고 싶다> <명작 스캔들>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2018년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